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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71화 (571/1,000)
  • 571화 한국 VS 대만 (6)

    …드르륵! …드르륵! 달그락!

    걸쭉하고 무거운 용암이 천천히 수류를 만든다.

    뜨거운 열해(熱海) 밑바닥에서 날카로운 쇠붙이 따위가 땅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퍼퍼퍼펑!

    걸쭉한 용암의 수면을 깨트리며 그 밑에서 수많은 화살들이 뱀처럼 타올라왔다.

    끈적하고 무거운 용암 속에 갇혀있던 화살들이라 그런가 대기 중으로 나오는 순간 더욱 더  빠르게 쏘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와라, 나의 화살들아.”

    드레이크는 가슴을 꿰뚫은 창을 단단히 움켜쥔 채 힘겹게 웃어보였다.

    취취취취취췩!

    화살들은 일사분란하게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드레이크의 화살통으로 향했다.

    문제는 그 화살통이 피반창의 배에 아주 가깝게 대어져 있다는 것이다.

    “으윽!? 이 자식이!”

    피반창은 황급히 드레이크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꾸욱!

    드레이크가 한 손으로 피반창의 창대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다른 손으로 피반창의 뒷목을 콱 억눌러 더더욱 억세게 나포할 뿐.

    ‘구, 궁수가 무슨 악력이 이렇게…!?’

    피반창은 눈앞에서 빛나는 드레이크의 섬뜩한 눈빛에 당황하여 발버둥쳤다.

    심지어 피반창의 창날에는 미늘이 다닥다닥 돋아나 있었기에 창을 회수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망할! 달링 이건 좀 너무하는 것 아냐!?”

    피반창은 자신의 애병까지 내팽개친 채 드레이크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악마성좌 벨제붑조차도 결국 벗어나지 못했던 드레이크의 발악기이다.

    …퍼퍼퍼퍼퍼퍼퍼퍽!

    무수히 많은 화살들이 피반창의 등과 어깨, 배를 꿰뚫고 화살통 안으로 갈무리되었다.

    “크학!?”

    피반창은 배와 등, 어깨죽지와 팔, 허벅지 부근에 32개나 되는 화살구멍이 뚫린 채 뒤로 나가 떨어져야 했다.

    그 틈을 나서 드레이크는 겨우겨우 뒤로 물러났다.

    “내 심장은 오른쪽에 있다. 참고하도록.”

    드레이크는 구멍 난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힘겹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이내 손을 들어 태그 사인을 외친다.

    이윽고, 드레이크는 한국 측 진영으로 무사 귀환했다.

    HP가 힐러와의 교대로 회복하기도 힘들 정도로 아슬아슬했기에 사실상 리타이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드레이크는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래도 체면치레는 해서 다행이군.”

    “고생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주먹을 들어 드레이크의 가슴에 대고 퉁 쳤다.

    (그 때문에 드레이크의 HP가 3정도 깎여 정말로 죽을 뻔했지만!)

    드레이크는 숨을 몰아쉬며 땅 위에 걸터앉았다.

    힐러와의 태그로 회복하려면 필드로 한 번 더 나가야 하지만 그랬다간 바로 죽을지 모르기에 굳이 태그는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냥 생존한 것에 의의를 둬야겠다. 이렇게 무참하게 당할 줄이야. 방심한 탓이 컸어.”

    “그래도 리덩후이를 잡고 피반창의 HP를 상당히 깎아 뒀잖아. 1.5인분은 한 것이니 남는 장사야.”

    나와 드레이크는 짤막하게 대화를 마쳤다.

    현재 한국 측 가용 가능한 엔트리는 마동왕, 마태강, 윤솔로 3명.

    HP가 경각에 이른 드레이크와 유세희는 제외한 결과이다.

    반면 대만 측에는 이제 두 명의 선수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마저 피반창의 HP는 드레이크의 화살비 역류에 적중당해 HP가 30% 이하로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흐후, 드후후후후후…”

    피반창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대지에 굳게 서 있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와중에 스탯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HP가 떨어질수록 피지컬이 상승하는 온갖 변태 특성들을 몸에 휘감고 있는 탓이다.

    “나는 몸이 걸레짝이 되는 게 좋아. 더 빨라지고 더 세지거든.”

    피반창은 홍조 띤 얼굴을 들어 기이한 열기를 뿜어낸다.

    그리고 다음으로 나올 한국 선수를 기다리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드레이크 캣을 죽여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네. 흐흥~ 뭐 상관없어. 다음 놈 나와라~”

    뭐가 되었든 상관없으니 그저 날뛰고 싶어 죽겠다는 기색이다.

    엄재영 감독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드레이크가 대만 측 힐러 겸 주술사 리덩후이를 예상외로 쉽게 잡아 준 덕분에 일이 순조롭게 풀리겠다. 대만은 지금 힐러가 없으니 피반창을 회복시킬 수단도 없지.”

    “……그렇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최대한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피반창의 남은 HP를 깎아내고 마지막 선수에게 집중 화력을 쏟아부어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엄재영 감독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태그.”

    맨 처음 필드로 나간 이는 윤솔이였다.

    그녀는 앙룡의 혓바닥을 밟는 동시에 바로 상공에 힐 마법을 뿌렸다.

    그리고 신성한 기운이 강림하기 직전 재빨리 태그를 외치고 유세희와 교대했다.

    위잉-

    윤솔이 남긴 빛을 이어받은 유세희의 HP가 꽤나 상승했다.

    피반창은 그 모습을 꽤나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헤에, 꼬맹이가 다시 나왔네? 앞에 허접들 상대로 재미 좀 봤나보지? 아니면 한국에는 더 이상 인물이 없나?”

    상대방은 물론이요 같은 팀 동료들까지 가차 없이 폄하하는 피반창의 언행에 유세희가 표정을 찡그렸다.

    “저는 버리는 카드인데요?”

    대놓고 돌직구를 던지는 유세희다.

    피반창이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유세희는 다시 톡 쏘아붙였다.

    “저는 앞에서 이미 두 명 하고 싸운 터라 HP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차라리 죽을 각오 하고 당신 HP나 깎아먹을 수 있으면 이득이니까요.”

    “하! 감독이 너한테 그리 하라 시키든? 다 큰 어른들이 너무하네~”

    “제가 자청해서 나온 건데요? 그리고 당신 정도는 제 힘으로도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

    피반창은 유세희에게 도발을 걸다가 본전도 못 찾고 말았다.

    이내 그의 눈 밑에 스산한 다크서클이 드리워졌다.

    “우리 꼬맹이, 방금 그 말 후회하게 될걸?”

    “당신도 후회하게 될 거에요.”

    유세희는 피반창의 말에 바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 대꾸보다 먼저 나온 것은 긴 대낫에서 뿜어져 나오는 종횡무진의 참격이었다.

    “태그 안 하고 나를 만난 걸.”

    눈 먼 처형인의 참격이 또다시 검붉은 대지를 토막내 가르기 시작했다.

    *       *       *

    윤솔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이번 경기 어떻게 봐?”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4D로.”

    “아, 진짜루! 세희 말이야. 위험한 것 아냐?”

    윤솔의 게임센스는 꽤 좋다.

    그녀는 피반창이 처음 필드에 나왔을 때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강해져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 채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이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피반창은 몸이 만신창이가 되면 될수록 속도와 공격력이 올라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유세희와 비슷한 수준으로 HP가 떨어지고 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피반창이 훨씬 더 유리한 싸움이었다.

    특히나 이렇게 자유분방함을 기조로 하는 근접 딜링 싸움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틀에 박히지 않고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는 유세희의 자유로운 공격패턴.

    하지만 피반창 역시도 의외성과 다양성 면에서는 아시아 넘버원의 근접 딜러다.

    ‘재능 면에서는 세희가 압도적이지만 지금 당장 이룩해 낸 성과와 경험은 아무래도 피반창 쪽이 낫지.’

    유세희가 100의 잠재력 중 30의 실력을 개화해 낸 상태라면 피반창은 50의 잠재력 중 40을 개화했다고 볼 수 있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30과 40의 싸움이니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유세희의 대낫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윽! …이익!”

    유세희는 전후좌우 사방팔방 동서남북 위 아래 위위 아래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을 가리지 않고 밀려들어오는 피반창의 창날에 연신 뒤로 물러나고만 있었다.

    그리고 상대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피반창의 창에는 더욱 더 가학적인 가속도가 붙는다.

    유세희는 불카노스 대낫을 들어 피반창의 창을 간신히 막아 내고 있었지만 HP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위태로워 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윤솔이 안타깝게 말했다.

    “나랑 태그할까?”

    하지만 나도 엄재영 감독도 고개를 저었다.

    “자기랑 비슷한 공격패턴을 가진데다가 실력도 더 뛰어난 상대랑 붙어볼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지. 이것도 좋은 공부야.”

    “지금까지 일반인들 사이에서 천재로 살아온 세희에게 있어서는 좋은 자극이 될 거다.”

    한마디로 임자 한번 만나보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자극하고 싶은 사람은 유세희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꽈악!

    투신 마태강. 지금 내 옆에 서서 두 주먹을 꽉 쥐고 필드를 내려다보고 있는 요 녀석.

    마태강은 유세희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두 다리를 들썩인다.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

    아무래도 유세희가 많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 아까도 세희가 리덩후이에게 당하고 있을 때 자기를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쳤던 것이겠지.’

    나는 새삼 회귀하기 전 세상의 마태강을 떠올렸다.

    그때 투신 마태강이라 함은 1:1의 지존, 한 마리 고고한 늑대였다.

    항상 홀로 레이드를 뛰었고 프로리그에서는 개인전에서만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 누구도 믿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훨씬 빠르게 갈 수 있었던 경지에 몇 번이나 돌아서 도달했다.

    ‘무조건 혼자 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동료라는 것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군요.’

    이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개인 리그에서 우승하고 은퇴했을 때 은퇴 소감으로 남긴 말이었다.

    한 번도 남을 이해한 적 없고 한 번도 남에게 이해받은 적 없던 불패의 투사.

    그것이 바로 투신 마태강이었다.

    그러나 이번 생의 마태강은 조금 달라졌다.

    동료. 같은 팀원을 생각하는 마태강의 시선은 회귀 전 메마르고 삭막했을 때보다 훨씬 더 뜨겁고 촉촉했다.

    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과 의지가 전혀 새로운 경지로의 문을 열어 줄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형님! 저를 내보내 주십쇼!”

    결국 마태강의 입에서 이 말이 다시 나오고야 말았다.

    엄재영 감독은 말없이 나를 돌아본다.

    나는 마태강을 향해 말했다.

    “세희는 임자 한번 만나보는 경험도 필요해.”

    내 말을 들은 마태강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인다.

    감히 내 말을 거역할 수는 없다는 표정.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녀석의 표정은 미묘해진다.

    “아니면 네가 세희의 임자가 되든가.”

    나는 말을 하며 마태강의 등을 탁 하고 떠밀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태그!”

    저 멀리 필드 위에 있는 유세희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거 참, 사랑하면 서로 통한다더니만.

    이내 마태강의 두 눈에 불이 확 붙는다.

    녀석은 온 힘을 다해 땅을 박차고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저희 그런 사이 아닙니다아아아-!”

    늘 하는 뻔한 멘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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