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62화 (562/1,000)

562화 폭탄선언 (4)

나는 오래 전 일을 생각했다.

예전에 LGB방송국으로 ‘고인물의 골목게이머’ 예능 프로그램 녹화를 하러 가던 길.

그 당시 나는 방송국 근처의 도로에서 유창과 다른 폭력배들의 다툼을 목격했던 적이 있었다.

‘너 이 자식들! 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냐!? 나 이 구역 지점장이야!’

차규엽에 의해 조직에서 축출된 유창은 한때 부하였던 이들에게 이를 갈았었다.

그리고 그때 유창을 향해 빈정거리던 이들이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들이었다.

‘거 큰형님 명령이시니 너무 앙앙거리지 마시고.’

‘이런 XX! 누나 때문이냐? 누나가 자기 안 만나 준다고? 우리 아빠도 그렇게 만들더니…이 졸렬한……!’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자면 이들의 사이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리고 지금, 유창과 그들은 또 다시 마주친 것이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반가운 얼굴들인데?”

유창은 빙글빙글 웃으며 눈앞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

차규엽의 똘마니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있는 유창의 등장에 바짝 긴장하고 있는 모양새.

셋 중 가장 앞에 있는 거구의 남자가 얼굴의 칼자국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어린 형님, 여기까지 와서 일 벌여 봤자 좋을 게 없…….”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내뱉을 수 없었다.

퍼억!

유창의 주먹이 그의 이빨을 모조리 부수고 입 안까지 가득 채워 버렸기 때문이다.

…왈그락!

유창은 남자의 입 안으로 우겨넣은 손으로 그의 혓바닥을 뿌리째 콱 움켜쥐었다.

“요요, 건방진 말을 하는 혓바닥이 요 혓바닥인가?”

“거억!?”

칼자국 남자가 두 손으로 유창의 손을 더듬더듬 잡는다.

하지만 유창은 그 전에 혀를 움켜쥔 손을 뒤로 확 당기고는 그대로 다시 한번 칼자국 남자의 안면 정중앙을 후려갈겨 버렸다.

…쿵!

쓰러지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체구의 남자가 단 두 대를 맞고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내가 그때 말했지? 다음에 눈에 띄면 뒤진다고.”

유창은 서슬 퍼런 시선으로 뒤에 남은 세 명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

“…….”

“…….”

나머지 세 남자는 유창과 쓰러진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후후, 김덩치 녀석. 결국 쓰러진 건가?”

“그 녀석은 우리 4천왕 중에…….”

“최강이었는데.”

그리고 셋 모두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으아아, 어린 형님 싸움 잘하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덩치도 한 방에 저 모양인데!”

“지, 진정해! 우린 넷이야!”

“이젠 셋이잖아! 그리고 셋으로도 못 잡아 저건! 저 괴물을 어떻게 이겨!?”

이미 기세는 무너졌다.

그들은 재빨리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어딘가로 지원 요청을 때렸다.

저 산기슭 아래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요란한 구둣발 소리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쯤 해서, 유창이 유다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늙은이 하나쯤은 잡을 수 있지?”

그러자 유다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유다희는 유창에게서 떨어져 후다닥 펜션 건물 안으로 달려간다.

“안 도와줘도 되겠어?”

내가 묻자 유창은 씩 웃으며 엄지손가락만 치켜세운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혼자서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것 같다.

“곧 경찰이 올 거야. 너무 무리하지 마.”

나는 당부의 말을 남긴 뒤 바로 뒤돌아 유다희의 뒤를 향해 뛰었다.

*       *       *

나와 유다희는 펜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펜션은 크고 넓었고 아주 많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테리어도 좋고 깔끔한 편이었지만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지 불은 들어오지 않았고 곳곳에 먼지가 수북했다.

“미로 같네.”

나는 어두운 복도를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유다희는 비교적 길을 잘 찾아내고 있었다.

마치 길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이 펜션에 왔던 적이 있어요.”

유다희는 내가 묻기도 전에 먼저 대답했다.

전보다 더욱 침울해진 목소리로.

“아버지가 대신 빵에 들어가기 전에 그놈이 생색이라도 내듯 이용권을 줬었죠. 마지막으로 가족끼리 한번 쉬다 오라고. 아버지는 펜션 같은 곳에 태어나서 처음 와 본다면서 좋아했어요. ‘말로만 듣던 펜션에 왔구나!’라고 하면서.”

그녀의 목소리에는 잃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회한, 그리고 앞으로 잃어버릴 지도 모르는 동생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담겨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 잠겨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꽉 짚어 주었다.

손에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

유다희가 조금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 마.”

그 말에 유다희의 큰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간 내 손 위에 또다시 그녀의 손이 놓인다.

……아니, 놓이려 했다.

삭-

내가 그 전에 손을 빼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

나는 유다희의 어깨에서 재빨리 손을 뗀 뒤 전방을 향해 몸을 낮게 숙였다.

계단 아래 작은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왜 이리 말을 안 들어? 지금껏 네 병원비 대 주던 게 누구인지나 알기나 해!?]

차규엽의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놈의 목소리는 점점 더 또렷하게 들려온다.

[다시 한번 말한다. 협상 따위는 없어!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 불참 선언을 하든가, 아니면 대표 선수 자격은 유지하되 바스터즈로 이적을 하든가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언니 오빠의 안전은 장담 못……]

차규엽. 놈은 유세희를 협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뛰쳐나갔다.

…쾅!

문이 거의 부서지다시피 열린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차규엽이 화들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그 앞에 있는 소파에는 손이 꽁꽁 묶인 유세희가 입에 테이프를 붙인 채 앉아 있었다.

“이 자식!?”

차규엽보다 내가 훨씬 빨랐다.

나는 바로 앞으로 내달려 차규엽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한때 뒷골목에서 먹어 줬던 왕년의 조직폭력배를 너무 쉽게 봤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득!

차규엽은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내 발을 잡아 꺾은 뒤 역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헉!?’

나는 늙은이답지 않은 그의 완력과 악력에 당황했다.

“이, 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가뜩이나 궁지에 몰려 있는 차규엽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내 목을 찍어 누른다.

나는 두 손을 뻗어 놈의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차규엽의 힘이 훨씬 더 셌다.

아마 최후까지 몰린 이가 뿜어내는 미증유의 독기였으리라.

“……!”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유다희.

그녀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와 차규엽을 바라보고 있었다.

패닉. 차규엽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으으… 으으으…….”

그루밍(grooming).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과 뇌리에 차츰차츰 각인된 공포.

그것은 직접 대면하는 순간 새삼스럽게 거대한 두려움이 되어 사람의 몸을 짓누른다.

나는 유다희에게 외쳤다.

“다희야! 움직여!”

하지만 유다희는 그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큰 두 눈에서 눈물만이 뚝뚝 떨어진다.

“으…으으으으…!”

유다희는 온 힘을 다해 움직이려 했지만 전신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박된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기까지 했다.

한편, 차규엽은 유다희를 노려보며 흐흐 웃었다.

“두 년놈들이 붙어먹긴 붙어먹은 모양이구나. 이 은혜도 모르는 더러운 것들.”

놈은 다시 핏발 선 눈을 내게로 고정했다.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어디 얼굴이나 좀 보자. 이 시건방진 새끼!”

그리고는 내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과 음성변조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마왕님한테서 손 떼!”

차규엽의 손이 내 얼굴에 닿는 순간, 유다희의 몸이 기적과도 같이 움직였다.

그녀는 거의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일어나 차규엽의 손을 걷어찼다.

덕분에 나는 차규엽의 손에서 풀려나 숨을 쉴 수 있었다.

막혔던 숨을 몰아쉬고 있으니 저 앞에서 차규엽이 유다희의 손목을 잡아끌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년!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런데 감히 나를 배신해!? 이 X녀 같은 X!”

차규엽은 유다희의 팔을 잡아 흔들며 악다구니를 쓴다.

유다희는 다시 몸을 바들바들 떨며 그런 차규엽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말했다.

“몬스터!”

내 말을 듣는 순간 유다희의 풀려 버린 동공에 한 줄기 빛이 돌아왔다.

나는 다시 말했다.

“몬스터라고 생각해! 살인자들의 탑!”

그 순간.

유다희의 눈에 다시금 생기가 어렸다.

그녀는 두 눈을 들어 눈앞에서 악을 지르는 차규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의 다 세어 버린 백발, 질질 흐르는 침, 시뻘건 눈알.

자연적으로, 그녀의 동공에 익숙한 수치들이 아로새겨지기 시작했다.

<차규엽> -등급: D / 특성: 양아치, 쓰레기

-서식지: 레드문

-크기: 1.7m.

-알고 보면 뭣도 없는 놈에 불과하다.

살인자들의 탑에서 봤던 악몽아귀가 절로 떠오른다.

‘그래, 그때 거기서 만났던 몬스터들이 훨씬 더 무섭고 흉악했어!’

유다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앞으로 움직였다.

빠악!

단단한 것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유다희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동시에.

“어억!?”

차규엽이 두 손으로 아래턱을 감싸 쥔 채 나뒹굴었다.

뿜어져 나오는 핏물에 흰 이빨들이 우르르 섞여 나왔다.

“…어?”

유다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쓰러진 차규엽, 그동안 거목(巨木)처럼 보였던 그가 이렇게나 작고 허약한 인물이었던가?

박치기 한 방에 나가떨어질 정도로?

하지만 나만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의 힘도 장난이 아니지.’

예전에 유다희가 족발 뼈를 힘으로 부수던 것을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녀 쪽의 유전자는 아무래도 힘 쪽으로 축복을 받은 것 같다.

나는 그런 유다희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짚어 주었다.

“자, 얼른 세희를 챙겨야지.”

그러자 내 말에 유다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니 소파에 묶여 있는 유세희가 이쪽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게 보인다.

“언니야…….”

“막내야!”

유다희는 한달음에 뛰어가 유세희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서로 펑펑 우는 두 자매.

나는 그런 유다희와 유세희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찌익-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화끈한 감각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일어난 차규엽이 깨진 유리조각을 손에 들고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흐흐…흐흐흐흐. 이 죽일 놈년들. 결국 여기까지 따라와 내 일을 망쳐 놓는구나.”

붉음이 천천히 번지는 와이셔츠, 흥분 상태라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꽤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놈이 대각선으로 그은 유리조각은 내 등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깊은 흉터를 남겨 놓았다.

“죽어! 죽어 버려!”

놈은 유리조각을 들고 내 얼굴을 향해 한 번 더 내리그었다.

…빠각! …빠가각!

유리조각에 난자당한 가면에 금이 갔다.

이대로 갔다가는 얼굴이 드러나는 것은 둘째쳐도 아마 끔찍한 흉터가 남겠지.

나는 황급히 가면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났다.

“마왕님!”

유다희가 그런 내 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차규엽의 눈은 이미 맛이 갔는지 나와 유다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赤)빛으로 물든 두 눈은 마치 온 세상을 적(敵)으로 돌리려 하는 모양새.

내 앞을 감싸는 유다희를 보자 차규엽은 더욱 더 분노했다.

“그래! 둘 다 뒈져라 그냥!”

놈은 자기 몸을 도외시한 채 유리조각을 들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우리 언니를 그냥 놔둬!”

펜션 전체를 울릴 정도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세희, 줄에서 풀려난 그녀가 전력으로 뛰어와 차규엽을 들이받은 것이다.

언니와 오빠를 닮아 힘세고 강한, 그리고 용감한 일격!

전장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눈 먼 화살이라는 말이 있다.

눈 먼 공격이 유효타를 만들어내는 것은 게임 속에서 으레 있는 법이다.

…퍽!

차규엽은 영 좋지 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지옥불과 같은 작열통을 느꼈다.

“……!”

그는 으레 간지 나는 악역들이 내뱉곤 하는 최후의 멘트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따흑!?”

그저 터진 물줄기를 손으로 막으려 하는 헛된 손동작으로 사타구니를 움켜쥔 채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그대로 기절했을 뿐.

풀썩-

유다희는 힘이 빠지는지 유세희를 끌어안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 벽에 기대어 쓰러진 나에게 다가온다.

“마왕님! 마왕님! 드, 등은 괜찮아요!?”

그녀는 피로 물든 내 등을 허둥지둥 끌어안은 채 울먹였다.

손으로 터진 상처를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지만 그녀의 흰 손과 몸이 붉게 물들 뿐이다.

호수처럼 크고 맑은 그 눈에 물안개가 가득 넘실거리는 것을 보니 내 기분도 묘해졌다.

“…오지 마. 피 묻어.”

나는 쪼개진 가면을 덮은 손에 힘을 주고는 벽에 완전히 기댔다.

그때쯤 해서. 먼 밖으로 경찰차가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화 한편 다 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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