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16)
5 페이즈(phase)가 시작되었다.
1페이즈: ‘식욕(食慾)’ + ‘팀킬’
2페이즈: ‘부자유친(父子有親)’ + ‘입구막기’
3페이즈: ‘극독(劇毒)’ + ‘오델로’
4페이즈: ‘폭식(暴食)’ + ‘역류성 식도염’
그리고 마지막 5페이즈, 회귀 전에도 후에도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할 궁극의 단계.
그것은 바로 ‘혈족전생(血族轉生)’이었다!
나는 드디어 이 오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
혈족전생이란 자신과 피가 이어진, 설정 상 동류(同類), 혹은 하위종에 속하는 개체의 몸으로 자신의 생명을 전송해 목숨을 계속 이어 갈 수 있는 특성을 뜻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벨제붑은 분명 그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킥킥킥킥! 인간! 죽인다!]
나를 향해 기어 오던 살점토막 구더기는 기어 오는 자세 그대로 번데기가 된다.
이후 놈은 초고속으로 우화하여 또다시 거대한 파리의 외형을 갖추게끔 되었다.
<벨제붑>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40m.
-이 세상의 모든 악마를 지배하는 일곱 성좌 중 하나.
폭식과 부패를 지배하는 위대한 마왕.
“너. 네가 올라가 누운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벨제붑- <구약, 역왕기(疫王記) 하권,
역왕 1,3-4>
사망 패널티 때문인지 한 등급이 다운 그레이드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충분히 놀라운 상황이었다.
‘오염된 피’에 감염된 대상은 죽어서 수많은 구더기로 변하고 그 구더기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커지고 강해진다.
그리고 파리 대왕인 벨제붑은 사망 시 그 수많은 구더기들 중 하나의 몸을 빌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무한전생! 영원히 죽지 않는 몸!
벨제붑이 왜 오염된 피 사건을 일으켜 전 대륙에 수많은 구더기들을 창궐케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놈은 절대로 죽지 않는 영원한 서브 목숨들을 비축해 놓았던 것이다.
설정 상 벨제붑은 시체의 유골에서 태어난 아주 작은 구더기가 진화하고 또 진화하여 여기까지 온 존재.
시간과 구더기들만 충분히 있다면 이 역겨운 파리 대왕은 언제고 다시 힘을 되찾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영원히!
나는 침음성을 삼켰다.
“결국 그 많던 구더기들은 궁지에 몰린 상위종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서브 목숨 같은 거였군. 평상시에는 단순한 식량 역할을 하고 말이야.”
아들은 아빠 백 믿고 설치고.
아비는 아들을 자신의 두 번째 몸, 아니면 언제나 잡아먹을 수 있는 식량 정도로 생각하고.
윤솔과 드레이크도 탄식했다.
“막장 부자네요.”
“하지만 저런 부자관계 의외로 꽤 흔하다. 자기 아빠가 누구누구인데 아느냐면서 위세 부리는 사람들 엄청 많이 봤지. 아니면 자식한테 자기 꿈이나 생각만을 강요하는 부모라든지.”
뭐, 아무튼.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웨에에에엥!
번데기의 몸속에서 급속도로 우화한 벨제붑이 또다시 이쪽을 향해 돌격을 감행해 왔다.
“침착하자.”
나는 일부러 숨을 느리게 쉬었다.
하지만 손과 발은 그보다 훨씬 빨리 움직인다.
나는 남은 슬라임 젤리들을 최대한 긁어모았고 아직 여벌의 심장을 감싸고 있는 포션들도 살짝 남았다.
“S급 정도라면 그럭저럭 한 판 붙어 볼 만하지.”
나는 마몬의 건틀릿을 들고 벨제붑의 돌격에 맞섰다.
드레이크 역시도 근처의 화살들을 수거한 뒤 나를 엄호하기 시작했다.
윤솔의 신성보호막 역시도 나를 휘감아 지킨다.
나는 바로 주먹을 내뻗어 벨제붑의 미간 정중앙을 후려갈겼다.
…콰쾅!
한 등급 너프의 체감폭은 엄청났다.
예전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뒤로 밀려나는 게 고작이던 벨제붑이 뒤로 확 내동댕이쳐졌다.
[…으으으으으으!]
벨제붑은 약해진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분노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나는 오른팔에 전해져 오는 저릿한 감각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너프된 게 이 정도라니.’
새삼 내가 지금껏 무엇과 싸워 왔던 것인지 실감이 든다.
눈앞에 있는 벨제붑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만나 왔던 그 어떤 S급 몬스터들보다도 강했다.
웨에에에엥-
놈은 날개를 뻗어 역한 바람을 일으켰고 뒤에 있던 드레이크와 윤솔을 저 멀리 날려버렸다.
오로지 불완전변태 특성으로 스탯이 10배 폭증한 나만이 폭풍에 날아가지 않고 지면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뒈져라!]
벨제붑이 악을 내지르며 나에게 떨어져 내린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벨제붑이 극한에 몰린 만큼 나 역시도 극한에 몰려 있었다.
여벌의 심장을 감싸고 있는 포션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느껴진다.
벨제붑의 극독에 감염되었고 불완전변태 특성의 패널티도 몸을 갉아먹고 있는데다가 윤솔의 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상황이 너무 안 좋다.
거기에 벨제붑은 또 왜 이렇게 팔팔한지.
크라켄이나 용옥의 고문기술자 같은 초엘리트 몬스터들보다도 훨씬 더 강해 보인다.
[네놈! 네놈 때문에 나는 또다시 억겁의 세월 동안 성장과 탈피를 반복해야 한다! 오오! 이 밉고 저주스러운 놈!]
벨제붑은 악의와 저주를 토해 내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온몸에 끔찍한 부패의 기운을 휘감은 채로.
그때.
…번쩍!
내 앞을 막아서는 존재가 있었다.
[쉬이익!]
히드라!
녀석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반지에서 뛰쳐나와 나를 휘감은 것이다.
“……너!?”
내가 고개를 드는 순간, 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쉬이익-]
놈은 내 얼굴에 자신의 이마를 한번 툭 맞댔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벨제붑을 향해 마주 뛰어들었다.
[비, 비켜라 이 자식! 갸아아아악!]
벨제붑은 당황했다.
놈은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콰쾅!
벨제붑은 히드라와 부딪쳤고 놈의 강력한 독 기운은 이내 히드라의 비늘을 타고 흩어져 버렸다.
쿵-
벨제붑은 궤도가 꺾여 이상한 방향에 처박혔고 히드라는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동시에.
쨍그랑-
내 약지손가락에 있던 반지가 깨졌다.
아주 오래 전, 메두사를 잡고 얻었던 반지.
그때 메두사를 모시던 녀석이 내게로 와 지금껏 참 오랜 시간 일해 주었다.
“……너, 임마.”
나는 울음을 참고 기어가 눈앞에 있는 히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쉬익-]
히드라는 힘겹게 숨을 내뿜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놈은 내에게 독기 어린 숨결을 뱉기 싫어 최대한 숨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고맙다 임마, 늘 무리한 것만 시켜서 미안했어.”
[쉬-]
“…잘 가라. 푹 쉬고.”
나는 히드라의 눈을 감겨 주었다.
동시에, 히드라의 HP가 0이 되었다.
피기가 암퇘지의 죽음에 오열했듯, 한번 죽은 펫은 다시 살릴 수 없다.
하물며 반지마저 깨져 버린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으윽! 그르르륵!]
저 멀리서 벨제붑 역시도 꿈틀거린다.
하지만 놈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히드라가 마지막 순간 벨제붑의 날개를 물어뜯었는지 놈은 뒤집어진 채로 뱅글뱅글 돌고 있었던 것이다.
으레 날개 찢어진 파리가 그렇듯.
“정말 질기고 추하고 역겹구나. 컨셉 한번 잘 잡았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앞에 있는 파리 대왕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놈에게 통렬한 일격을 날렸다.
“내 펫의 복수다!”
옆구리를 폭파시킬 듯 내뻗어진 마몬의 망치 건틀릿!
벨제붑의 그 통통한 몸이 ㄱ자로 꺾였다.
[게에에에에엑!?]
나는 치밀어 오는 분노와 함께 계속해서 주먹을 난타했다.
…쾅! …콰콰쾅! …우르릉! …쾅! …우지끈!
와류와 지진. 지형을 통째로 뒤바꿀 수 있는 광역기가 1:1 기술로 터져 나온다.
결국 벨제붑은 그 자리에서 몸이 두 동강 나 사망하고 말았다.
“…잡았나?”
내가 역겨운 피와 내장을 뒤집어쓰고 중얼거리는 순간.
[킥킥킥킥킥킥…]
바로 뒤에서 또다시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두 번째 구더기가 번데기 상태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망할!”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재빨리 뒤돌아 달렸다.
하지만 그보다는 녀석의 우화가 한 발 빨랐다.
[갸-아아아아악!]
이내 거대한, 아니 아까보다는 조금 작아진 파리 대왕이 또다시 내 앞에 섰다.
<벨제붑> -등급: A+ / 특성: ?
-서식지: ?
-크기: 35m.
-이 세상의 모든 악마를 지배하는 일곱 성좌 중 하나.
폭식과 부패를 지배하는 위대한 마왕.
“너. 네가 올라가 누운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벨제붑- <구약, 역왕기(疫王記) 하권,
역왕 1,3-4>
이제 A+등급까지 몰락한 벨제붑, 하지만 그 위용은 여전히 상당하다.
내가 비틀거리며 멈춰 서자 놈은 또다시 나를 향해 그 무식한 돌진 공격을 감행해 왔다.
하지만.
퍼억!
이내 머리통에 틀어박힌 굵은 화살 한 대가 놈의 돌진 궤도를 옆으로 틀어 버렸다.
핑- 피잉-
이내 쏘아진 작은 화살 두 대가 벨제붑의 머리통에 돋아난 작은 더듬이 두 개를 끊어내 버렸다.
웨에에에엥-
더듬이를 잃은 벨제붑은 바로 앞에 있는 나를 향해 날아들지 못하고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꺾어진다.
“진즉에 더듬이부터 노릴 것을 그랬군.”
폭풍에 날아갔던 드레이크가 다시 내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윤솔도 함께였다.
…파아앗!
윤솔은 돌아오자마자 내게 힐을 걸어 주었고 덕분에 나는 리타이어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마워, 친구들.”
나는 묵은 숨을 토해 내며 힘없이 웃었다.
여전히 친구들의 얼굴은 내게 새빨갛게 보였지만 나는 이제 그들의 기척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내. 벨제붑은 세 번째 목숨을 얻어 다시 태어났다.
놈의 등급은 이제 A급.
드레이크의 화살만으로도 충분히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이다.
펑! 퍼펑!
드레이크가 남은 화살을 모두 쏟아 붓는 것으로 벨제붑은 세 번째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이내 네 번째 목숨.
벨제붑의 등급은 B+급.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목숨.
위풍당당했던 파리 대왕의 등급은 B급까지 떨어졌다.
크기도 아주 아주 작아진 모양새.
[뽀애앵! 뽀앵!]
이쯤 되면 쥬딜로페의 선에서도 정리 가능했다.
쥬딜로페는 풍뎅이 병사들과 함께 몰려가 나뭇가지로 벨제붑을 마구 구타하기 시작했다.
잉잉잉…
벨제붑은 작아진 날개를 뻗어 힘껏 저항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쪽수를 이겨 내기는 힘들었다.
심지어 쥬딜로페는 벨제붑을 부하로 삼고 싶었는지 와두두 포자를 뿌리기까지 했다.
[베에에엡! 나는 죽음을 택하겠다!]
난죽택.
결국 펫이 되기 싫었던 벨제붑의 자폭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한때 1.5차 대격변이라고까지 불리며 이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대재앙급 몬스터의 최후라기에는 너무나도 질기며 추악하고 비참하며 없어 보이는 죽음이었다.
…펑!
벨제붑이 자폭하자 주변에는 독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쥬딜로페는 일찌감치 뒤로 숨었기에 폭발에는 당하지 않았지만 꽤 놀랐는지 히끅히끅 울면서 내게 달려와 안겼다.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후애애애앵!]
하지만 내가 아무리 토닥여 줘도 쥬딜로페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어진.”
“…어진아.”
드레이크와 윤솔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나는 비로소 쥬딜로페가 왜 이렇게 서럽게 우는지 알 수 있었다.
히드라.
차갑게 굳은 채 빙판 위에 쓰러져 있는 녀석을 보자 나 역시도 착잡한 기분이 든다.
아무리 게임 속 펫에 불과하다지만 지금껏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녀석이다.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휘이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분다.
독 기운이라고는 한 점도 실려 있지 않은, 북해의 맑은 바람이었다.
동시에.
우리의 귓가에 바람소리보다도 맑은 음성 메시지가 메아리쳤다.
-띠링!
<세계 최초로 ‘악마성좌 벨제붑’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YES: 고인물>
<보상이 지급됩니다!>
파리 대왕, 벨제붑의 완연한 사망을 알리는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