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40화 (540/1,000)
  • 540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15)

    벨제붑의 본래 이름은 ‘바알제불(Ba'al Zebul)’이며 에크론의 도시 팔레스타인에서 숭배 받았던 신이다.

    이 말은 본디 히브리어로 ‘높은 저택의 주인’ 또는 ‘하늘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이 명칭이 ‘솔로몬 왕’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알제붑(Ba‘al Zebûb)’으로 바꾸어 버렸다.

    ‘제붑(zebûb)’은 히브리어로 ‘파리’, 혹은 ‘오물’을 뜻하기에 벨제붑은 ‘파리 대왕’, ‘오물 대왕’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       *       *

    나는 눈앞으로 쇄도하는 파리 대왕을 보며 이를 꽉 악물었다.

    머릿속에서는 과거 악의 고성에 도전할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일찍이 지혜로운 왕으로 소문난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세계를 지배하는 일곱 악마 중 하나가 나를 끝없는 시험에 빠트렸다.

    나는 나의 덕망과 지혜를 믿고 맞서 싸웠으나 결국 이렇게 무릎을 꿇는다.

    아아, 나는 그렇다손 쳐도. 나를 믿고 이 땅의 번영을 함께 일궈 낸 백성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두렵도다.

    이 글를 읽는 이여! 그대라면 이미 나의 덕망과 지혜, 용기와 힘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일 터, 부디 나의 원한을 풀어 주기를 바란다.

    나를 이렇게 만든 악마의 이름은 벨제붑! 그 이름도 증오스러운 파리 대왕일지어니…!

    -『어둠 대왕의 일기』 中-

    당시 어둠 대왕이라는 보스급 몬스터를 잡았을 때 얻었던 히스토리의 파편에는 분명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내 퀘스트 일지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히든 퀘스트 ‘어둠 대왕의 회한(悔恨)’을 발견하셨습니다>

    <파리 대왕 처치- 0/1>

    내 상태창 구석에 오랜 시간 동안 보관되어 먼지만 쌓여 가고 있었던 퀘스트.

    이제 비로소 어둠 대왕의 한을 풀어 줄 때가 되었다.

    “솔로몬 왕을 타락시킨 대가를 치러라, 이 파리야!”

    한때 천공섬의 황제인 니고데모의 벗이자 용사 도로시, 최후의 드워프 벨럿 등이 백성으로 있던 마을의 왕이었던 존재.

    생전의 덕망과 지혜, 명성이 워낙에 높았기에 굵직굵직한 메인 스토리 급 NPC들의 히스토리에 빠짐없이 언급되던 히든 NPC.

    나는 그의 원한이 담긴 목걸이를 높이 들었다.

    거무튀튀한 외형의 작은 목걸이.

    혼자서 모든 빛을 다 빨아들이고 있었기에 캄캄한 가운데에서도 유독 눈에 잘 띄었다.

    어둠 대왕의 눈동자를 그대로 빼다 박은 것처럼 기이하게 타오르는 빛이 눈앞에 있는 파리 대왕을 응시하고 있었다.

    끝없는 증오와 저주의 기운을 담아서!

    “와라!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반격이다!”

    나는 목걸이를 꽉 쥔 채 벨제붑과 격돌했다.

    콰-콰콰콰콰쾅!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벨제붑이 온몸으로 나를 강타했다.

    벨제붑의 발악기 마계다이브!

    대기가 몇 겹으로 중첩되었다가 한꺼번에 박살났고 무시무시한 폭풍이 일어 주변을 싹 쓸어버렸다.

    소닉붐과 같은 막대한 충격파가 몇 차례에 걸쳐 내 몸을 타격했고 이내 벨제붑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독 기운이 나의 몸을 먼지처럼 바스라트린다.

    동급의 고정 S+등급 몬스터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벨제붑의 돌진에 적중했으니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찰나의 틈을 노려 반격했다.

    오즈의 비늘을 세워 반사 데미지를 쏘아 보냈고 마몬의 오른팔과 데스웜의 왼팔로 꽤나 묵직한 반동 데미지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죽음만큼은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앙버팀 특성으로 버티려 했지만 엄청난 속도로 창궐하는 역병의 기운과 뒤늦게 따라오는 2차, 3차 충격파는 내 전신을 허공에 뜬 채로 짓이겨 놓기에 충분했다.

    저 멀리 초보자 마을의 창고 속, 포션에 절여둔 여벌의 심장을 발동할 시간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어진>

    LV: 91

    HP: 0/910

    나는 죽었다.

    그리고 나의 심장이 멈추는 것이 확인되자마자.

    …고오오오오오!

    대기가 폭력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죽음이 최종 결정된 장소를 시작으로 시커먼 원 하나가 생겨났다.

    마치 블랙홀처럼 생긴 검은 구멍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죄다 휩쓸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계 심층부로 통하는 차원문이 생겨난 것이다!

    [하잘 것 없는 것들아! 본 대왕은 오늘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훗날 내가 다시 창궐할 날, 너희들의 세상은 멸망하리라!]

    벨제붑은 남은 이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는 마계로 통하는 포탈을 향해 웽 날아갔다.

    그렇게 놈은 도주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어딜 가려고?”

    죽은 즉시 바로 되살아난 내가 놈의 뒷다리를 붙잡지만 않았어도 말이지.

    [……!?]

    벨제붑은 진심으로 놀란 기색으로 머리를 틀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전신이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는 내가 있다.

    -<이어진 폴다운 모드>

    LV: 91

    호칭: 여덟 다리 대왕 참수자(특전: 불완전변태)

    그렇다.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의 힘이 멈췄던 내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 것이다!

    거기에 한번 멈췄던 여벌의 심장이 목말랐던 듯 포션을 힘차게 빨아들였고 나는 다시 활력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것도 모든 스탯들이 10배로 뻥튀기된 채로!

    “어때? 한때 부하로 거두고 싶어 했던 거미의 힘이.”

    내가 거미 여왕의 힘을 뿜어내자 벨제붑은 정말로 많이 놀란 듯 보인다.

    얼마나 놀랐으면 한순간 날개를 움직이는 것도 잊고 밑으로 조금 추락했을 정도였다.

    [비, 비켜라!]

    벨제붑은 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자 나를 다리에 매단 채로 마계 차원문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내가 벨제붑을 순순히 보내 준다고 해도 그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이가 하나 있었다.

    …번쩍!

    바로 어둠 대왕 솔로몬이다!

    내 심장이 멈춤과 동시에 목에 걸린 솔로몬의 목걸이가 맹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각성(覺醒)!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등급과 특성이 해금된 것이다.

    -<솔로몬의 목걸이> / 목걸이 / S

    어둠 대왕 솔로몬이 최후의 결전 직전에 잠시 빼 놓았던 목걸이다.

    만약 솔로몬이 이것을 목에 걸고 있었다면 당신은 절대로 그를 쓰러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10% (특수)

    -특성 ‘피장파장의 오류’ 사용 가능 (특수)

    지금껏 내가 아끼고 또 아껴 왔던 능력.

    회귀 전 세상에서는 유일하게 앙신 조디악만이 손에 넣었던 특성이다.

    ‘피장파장의 오류’

    ↳이 특성을 보유한 존재를 죽인 이는 저주를 받아 최대 HP의 100%에 해당하는 체력을 잃습니다.

    “나를 죽인 자는 죽는다.”

    -어둠 대왕-

    어둠 대왕의 고유 특성으로 엄청난 사기 스킬 중 하나이다.

    만약 어둠 대왕이 이 목걸이를 지닌 채 나와의 싸움에 임했다면 나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어둠 대왕이 나와 싸우기 전 이 목걸이를 풀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싶었지만 그것은 게임 설정과 스토리를 향유하는 게이머의 상상력으로 남겨둘 몫이겠지?

    …번쩍!

    내 손에 쥐어진 목걸이는 이내 섬뜩한 핏빛으로 빛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창백한 두 개의 손이 뻗어 나와 벨제붑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내 기억 속에도 있는 어둠 대왕의 손이다.

    [그-오오오오오오!? 이건!? 이건!?]

    벨제붑은 온몸을 파르르 떨며 발버둥 쳤다.

    놈은 마계의 차원문에서 불과 몇 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10배나 폭증한 속도로 그런 벨제붑의 몸 위를 타올랐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동시에, 나는 마몬의 오른팔을 높게 들어 벨제붑의 머리통 위를 두들겼다.

    그러고 보니 인간이었던 마몬을 타락시켜 악마로 만든 놈도 벨제붑이다.

    참으로 많은 곳에 악의 뿌리를 뻗고 있는, 말 그대로 ‘원흉(元兇)’ 그 자체!

    이내 10배로 강해진 마몬의 망치가 수직 궤도로 떨어져 내려 벨제붑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뻐-억!

    벨제붑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마계로 통하는 차원문에 막 앞다리를 걸치기 직전이었다.

    [아, 아, 아, 안 돼!]

    벨제붑은 뒤집어진 채 하늘을 향해 배를 드러내 보이며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섯 다리는 점점 배 안쪽을 향해 말려들고 있었다.

    죽어 가는 벌레의 특징 중 하나다.

    그리고.

    “돼.”

    그런 벨제붑의 배 위로 내 주먹이 떨어져 내렸다.

    …콰쾅! …우지지지직!

    피니쉬 블로우!

    나는 벨제붑의 뱃가죽 정중앙에 또다시 위력 10배짜리 마몬의 망치를 꽂아 넣어 주었다.

    츠츠츠츠츠츠…

    벨제붑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검록색 기운이 천천히 사그라든다.

    동시에 벨제붑의 시뻘건 눈도 점차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빠직! …빠드득! …빠각!

    시커먼 외골격에 금이 간다.

    배에서부터 시작된 커다란 균열은 점차 작은 실금으로 퍼져 곧 파리 대왕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벨제붑> / S+

    -HP: 0/1,910,321,000

    총 HP 십구억 천삼십이만 천의 대괴수.

    하지만 지금 잔여 HP는 0.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잡았다! 잡았어, 어진!”

    “꺄아아아악! 수고했어 어진아아아!”

    드레이크와 윤솔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드디어 잡았다. 그 ‘벨제붑’을 말이다.

    ‘오염된 피 사건’의 주범으로서 한때 단신으로 온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초재앙급 몬스터를 내가 쓰러트리고 만 것이다!

    “하하… 하하하하. 결국 성공했네.”

    나는 힘 빠진 소리로 웃으며 솔로몬의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파사삭…

    솔로몬의 목걸이는 마치 제 소임을 다했다는 듯, 천천히 가루로 변해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간다.

    어둠 대왕의 한이 이제는 좀 달래졌을까?

    ……한데?

    나를 향해 달려온 드레이크와 윤솔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어, 어진.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경험치나 레벨이 전혀 안 올랐어!”

    ……?

    나는 그 말을 듣고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과연, 친구들의 말대로였다.

    싸우면서 조금씩 올라가곤 하는 경험치를 제외하면 특별한 변화가 없다.

    벨제붑을 쓰러트린 것에 대한 보상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뭐지? 이 위화감은…….’

    순간 내 등골이 오싹하다.

    차갑게 식은 땀 한 줄기가 정수리에서 턱 끝까지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알림음도 안 들리는군. 벨제붑 급의 몬스터가 죽었다면 당연히 아카식 레코드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야 할 텐데…….”

    내 말에 드레이크와 윤솔이 고개를 들어 눈앞의 거대한 파리 시체를 바라본다.

    하지만 분명히 벨제붑은 죽어 있었다.

    놈의 HP는 0이 되었고 시체는 이미 하얗게 굳어 조금씩 바스라지고 있다.

    [뿌우?]

    쥬딜로페가 나뭇가지로 콕콕 찔러 봐도 회생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지?”

    나는 내가 뭘 놓치고 있는지 고민해 보았다.

    바로 그때.

    불현듯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미래 지식의 한 파편.

    ‘…5페이즈!’

    그렇다.

    회귀 전의 세상에서 수많은 공격대가 벨제붑을 잡으려 시도했지만 모두들 벨제붑의 제 4페이즈 이상을 넘지 못했다.

    엄청난 희생을 내 가면서 잡을라 치면 꼭 4페이즈의 끝에서 마계다이브라는 도주기를 써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벽을 넘었다.

    4페이즈의 끝에서 히든카드를 써서 벨제붑의 도주를 저지했고 그대로 멋지게 놈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그럼 벨제붑의 제 5페이즈, 다섯 번째 최악의 특성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회귀 전 있었던 게임 발표회에서 분명 뎀 고위 개발자가 말했어. 벨제붑의 페이즈는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렇다면 내가 놓치고 있는 다섯 번째 무엇인가가 있다는 건데…….’

    아무도 겪어 본 적이 없는 것은 나 또한 모른다.

    내가 그렇게 혼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킥킥킥킥킥킥.]

    어디선가 나를 비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벨제붑의 목소리였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벨제붑은 죽었어!”

    “시체도 분명 여기에 있는데!?”

    드레이크와 윤솔도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거대한 무엇인가가 이쪽을 향해 접근해 오는 것이 보인다.

    <벨제붑의 아들 ‘구더기 살점토막’> -등급: A+ / 특성: 맹독, 하수인, 어둠, 과식, 하찮음, 앙버팀, 질긴목숨, 오염된 피, 혈족전생

    -서식지: 데린쿠유 식량창고, 설원 북동지대, 구더기 언덕

    -크기: 10m.

    -모든 욕망과 본능이 거세된 채, 오로지 폭식(暴食)에 대한 갈망으로만 움직이는 살덩어리.

    먹고 싸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것은 벨제붑의 첫 등장 당시 살인자들의 시체를 파먹고 태어난 다섯 마리의 거대한 구더기들 중 하나였다.

    […이놈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

    벨제붑의 목소리로 저주를 토해 내는 거대한 구더기를 보는 순간.

    “……!”

    나는 그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혈족전생(血族轉生)!’

    그렇다.

    고정 S+급 몬스터의 흉악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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