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39화 (539/1,000)
  • 539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14)

    -<츄츄의 슬라임 젤리> / 재료 / D

    그레이 시티의 명물 슬라임 젤리.

    슬라임으로 만든 젤리답게 주변 환경의 영향을 잘 받는다.

    -<지옥불 코어 반쪽> / 재료 / S

    반으로 쪼개진 빨간 구슬 조각.

    너무나도 뜨거워 악마조차도 열상(熱傷)을 입고 만다는 지옥 동쪽의 불길이 담겨 있다.

    내가 쥬딜로페를 시켜 바닥에 잔뜩 깔아 놓은 것은 바로 슬라임 젤리다.

    이 슬라임 젤리는 주변 환경에 따라 자신의 체질을 바꾸는 슬라임처럼(가령 숲에 사는 슬라임은 풀/독 타입, 사막에 사는 슬라임은 모래/바위 타입, 추운 곳에 사는 슬라임은 눈/얼음타입 등) 가까이 있는 다른 아이템의 영향을 받아 옵션이 바뀐다.

    나는 그레이 시티에서 히든 퀘스트인 ‘츄츄의 복수’를 클리어했고 그 보답으로 슬라임 젤리를 제조할 수 있는 비밀 레시피를 습득한 상태.

    고로 나는 살인자들의 탑 5층의 소유권을 얻자마자 그곳을 공장으로 개조했고 츄츄를 시켜 대량의 슬라임 젤리들을 양산했었다.

    그 후 발록과 데모고르곤을 잡고 얻은 지옥불 코어와 슬라임 젤리들을 하나의 밀폐된 공간에 몰아넣고 오랜 시간 숙성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나에게 있는 대량의 슬라임 젤리들은 뜨거운 화염 데미지를 머금고 있게 되었다.

    그것도 벌레들에게 있어서 아주 치명적인.

    [뿌앵?]

    물론 아군 설정이 되어 있는 쥬딜로페에게는 데미지를 입히지 않지만 말이다.

    기껏해야 핫팩 정도의 온기로 끝나겠지.

    “자, 대만찬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 실컷 먹으라고!”

    나는 벨제붑을 향해 외쳤다.

    예전에 ‘살인자들의 탑’을 공략하던 당시 조디악도 7층의 보스인 고정 S+등급 몬스터 벨페골을 잡기 위해 이 공략을 사용했던 적 있었다.

    “핫하! 받아라! 젤리 투척!”

    나는 예전에 조디악에게 배운 대로 젤리를 던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어깨너머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퍽- 콰르르륵!

    발갛게 물든 슬라임 젤리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벨제붑의 몸에 닿았다.

    그리고 마치 화염병처럼 펑 터지며 뜨거운 불길을 끼얹는다.

    [부오-오오오오!]

    파리 대왕은 괴로운 듯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아마 고정 S+등급 몬스터의 방어력과 저항력을 감안하면 저 정도는 그냥 뜨거운 물 한 방울이 튄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펑! 퍼엉! 펑! 쿠르르르륵!

    뜨거운 물 한 방울들이 많이 모이면 한 컵이 되고 한 바가지가 되고 한 솥이 되는 법이다.

    “슬라임 젤리 같은 걸 끼얹나~ 내 안에 타고 있는 불 위에다~”

    나는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며 젤리를 집어던졌다.

    보급형 지옥불 코어들이 불줄기를 내뿜어 벨제붑의 전신을 휘감아 조이고 있었다.

    [그아아아악!]

    벨제붑은 벌레타입 몬스터답게 불에 약하다.

    더군다나.

    “…응?”

    나는 데미지 양을 계산하던 중 벨제붑에게 추가 데미지가 들어가고 있는 정황을 포착했다.

    분명 내가 예상했던 슬라임 젤리의 화염 공격력보다 높은 데미지가 딜 미터기에 기록되고 있었다.

    “아하! 그것 때문인가!?”

    나는 이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전 나와 벨제붑이 부유섬의 영해에서 처음 만났을 때, 놈은 용암룡 모르그마르와 한번 붙었던 적이 있다.

    당시 벨제붑은 모르그마르에게 기습을 당해 처음부터 큰 화상 데미지를 입었었는데 아마 지금 벨제붑은 그 때문에 미약하게나마 ‘상태이상: 화염’에 빠져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 때문에 화염 계열 공격에는 추가 피해를 입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건……!

    “어진, 화재인가?”

    “그래! 호재야!”

    “…아니, 화재냐고 물어본 거야. 어진아.”

    드레이크와 윤솔이 내 옆에 와 섰다.

    그들 역시 손에 젤리를 집어 들고 마구 던지는 중이었다.

    “영!”

    “차!”

    “영!”

    “차!”

    이내 젤리에서 뻗어 나온 불줄기들이 벨제붑에게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보낸다.

    그것들은 마치 불로 만들어진 뱀처럼 벨제붑의 여섯 다리를 휘감고 타올라 바람을 일으키는 날개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웽웽웽웽웽웽-

    역한 바람이 점점 더 후끈해진다.

    불은 역한 것들을 태우며 점점 더 크게 번져만 간다.

    불길에 휘감긴 벨제붑의 수억 눈동자가 더욱 더 시뻘겋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꾸르르륵! 꿀렁- 꿀렁- 꿀렁-

    위기감을 느낀 벨제붑이 또다시 극독 웅덩이를 소환하기 시작했다.

    윤솔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저 끔찍한 독을 다시 마주하게 되다니!

    “아앗, 이제 제독제도 없어서 오델로도 못 둘 텐데!?”

    “노노, 걱정할 것 없어. 오델로 마지막 판의 백돌 기보를 그대로 되짚는 수준에서 그치니까. 기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정형 패턴이니 피하기는 쉬워.”

    나는 드레이크와 윤솔을 안심시켰다.

    단 하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벨제붑의 ‘반전(反轉)’ 특성 때문에 아까 놈이 둔 흑돌의 기보가 아니라 나와 친구들이 뒀던 백돌의 계보대로 극독 웅덩이가 소환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아까 내가 뒀던 모든 수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고 마지막 판의 흑백 기보 또한 외우고 있었기에 극독 웅덩이가 어디에 생겨날지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파앗!

    나는 벨제붑이 만들어 낸 극독 웅덩이를 뛰어넘으며 생각했다.

    ‘벨제붑의 반전 특성을 몰랐다면 다 잡아 놓고 여기서 죽었을지도…….’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캐치한 고인물들의 집단지성이 참 놀랍기도 하다.

    쿠르르륵!

    이윽고, 준비한 슬라임 젤리도 어느덧 바닥을 보인다.

    애애애애애앵-

    벨제붑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사납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쾅! …콰쾅! …우르릉!

    놈은 이제 육중한 덩치로 몸통박치기까지 감행한다.

    내가 도망 다니는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거나 여섯 다리를 휘두르는 등 아주 난폭한 움직임.

    평소 근접전, 육탄전을 싫어하는 벨제붑이 이런 공격 패턴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놈이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겠지?

    “이건 피하는 게 좋겠다.”

    어차피 깎단 데미지도 걸어 놨으니 급할 것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시간은 우리 편이었으니까.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를 데리고 구더기 언덕을 타 내려갔다.

    다행스럽게도 이 얼음섬에는 수많은 고드름과 종유석, 얼음바위들이 돋아나 있기에 숨을 곳이 많았다.

    우리는 울퉁불퉁한 얼음골 사이로 들어가 벨제붑의 난동을 피하기로 했다.

    “이제 슬슬 끝이 보이는군.”

    나의 깎단 데미지는 지금도 벨제붑의 숨통을 차근차근 조이고 있다.

    슬라임 젤리로 인한 데미지에 좀 전 드레이크의 제갈량 화살 공략의 데미지까지 누적되어 있으니… 이 페이스만 잘 유지하면 정말 대형사고 하나 치겠다.

    그때.

    번쩍!

    벨제붑의 몸에서 시커먼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츠…

    북방의 하늘에 검은 커튼이 드리워졌다.

    마치 오로라, 흑색의 오로라를 보는 것 같은 진풍경.

    하지만 그 검은 장막은 마치 우리의 도주로를 차단하려는 음흉한 의도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웨에엥-

    먹구름 소용돌이의 중심에 선 파리 대왕.

    벨제붑이 검은 오로라를 등진 채 우리를 향해 두 눈을 빛냈다.

    [나는 높은 저택의 주인, 하늘의 왕, 너희를 응당 필멸로 이끄는 구도자이리니…!]

    말을 마친 벨제붑은 불타고 있는 전신에서 검록색 매연을 줄기줄기 피워 올렸다.

    나는 직감했다.

    저것은 4페이즈 최후반부에 나오는 벨제붑의 발악기 ‘마계 다이브’!

    적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격해 엄청난 위력의 물리 데미지와 독 데미지를 박아 넣는 기술로 한때 부유섬에서 용암룡 모르그마르를 저 멀리 날려버렸던 필살기이다.

    하지만, 마계 다이브라는 기술은 단순한 발악기가 아니다.

    마계 다이브라는 돌진공격에 피격당한 적이 죽었을 경우 그 자리에 마계로 가는 차원문이 열리게 된다.

    그러면 벨제붑은 그 문을 통해 마계 심층부로 도망쳐 버리는 것이다.

    즉, 마계 다이브는 벨제붑의 HP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쓰는 도주기이자 곧 생존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 자식, 나를 죽이고 마계 포탈을 열어 도망칠 심산이군.”

    내가 벨제붑의 ‘다섯 최악’ 중 네 개까지밖에 모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마계 다이브 스킬에 피격당해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사망하게 되면 마계로 통하는 포탈이 열리고 벨제붑은 도망친다.

    회귀 전. 오염된 피 사건을 끝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용사, 협객, 고인물들이 벨제붑을 잡기 위해 도전했지만 전부 이 네 번째 페이즈 끝에서 실패하고 놈을 놓쳐버렸던 것이다.

    세상에, 고정 S+등급 몬스터를 거의 다 잡아 놓고 놓치게 된다면 그 억울함이 어느 정도일까?

    ……하지만 나는 그 억울함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15년 동안의 집단 지성이 끝나는 종점(終點). 그곳에 내가 섰다.

    “너는 오늘 내가 잡고 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앞에 있는 벨제붑을 노려보았다.

    아직 나에게는 마지막 히든 카드가 남아 있다.

    이것을 어느 타이밍에 쓰느냐가 이번 당락을 좌우하겠지.

    마침내.

    …웨에에에에엥!

    벨제붑이 마지막 생명을 불태운다.

    놈은 불붙은 전신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고 이내 내가 있는 방향으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이이-

    이명(耳鳴)이 미친 듯이 심해진다.

    나의 마법 저항력으로도 이렇게 들릴 정도면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은 이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리타이어 당하겠지.

    “오, 온다! 어진!”

    “꺄아아악! 저건 못 막을 것 같아!”

    드레이크가 날려 보낸 화살도, 윤솔이 만들어 낸 신성 보호막도 모두 소용없다.

    벨제붑의 마계 다이브는 물리 공격력, 독 공격력을 총 합산했을 경우 마몬의 망치를 뛰어넘는 사기적인 데미지를 기록하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물러나 있어. 나 혼자 어떻게든 해 볼게.”

    나는 온몸에 각종 생존기들을 도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제붑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지는 긴가민가하다.

    ……그런 고로, 나는 지금이 최후의 승부수를 띄울 차례임을 직감했다.

    차락-

    나는 목에 걸려 있는 금속의 차가운 이물감을 느꼈다.

    …윙윙윙윙윙윙!

    아까부터 계속 파리의 날개처럼 진동하는 아이템이 하나 있다.

    -<솔로몬의 목걸이> / 목걸이 / ?

    어둠 대왕 솔로몬이 최후의 결전 직전에 잠시 빼 놓았던 목걸이다.

    만약 솔로몬이 이것을 목에 걸고 있었다면 당신은 절대로 그를 쓰러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둠 속성 저항력 +10% (특수)

    -? (특수)

    오래 전, 악의 고성을 공략할 당시 얻었던 히든 피스.

    이 목걸이가 벨제붑을 향해 맹렬하게 펄떡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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