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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38화 (538/1,000)
  • 538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13)

    적벽대전 당시 주유는 제갈량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한 달 안에 화살 10만 개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한 달이 아니라 나흘 만에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는 사흘 동안 드러누워 놀기만 하였다.

    이윽고 마지막 날, 제갈량은 물안개가 낄 것을 예측하고는 큰 배에 수많은 짚단을 쌓아둔 채 적진의 진영 앞까지 가 북과 꽹과리를 쳤고 적들은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자 화살만을 무수히 발사했다.

    이 화살들은 고스란히 짚단에 박혔고 제갈량은 10만 개가 훨씬 넘는 수의 화살을 가지고 유유히 본진으로 돌아왔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中-

    *       *       *

    “준비하시고.”

    나는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벨제붑의 거대한 몸을 향해 외쳤다.

    “쏘세요!”

    동시에 드레이크가 화살을 장전했다.

    꾸드드드득-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드레이크는 지금 수십 대의 화살을 한꺼번에 장전 중이라는 것이다.

    퍼퍼퍼펑! …푸푸푸푹!

    이내, 엄청난 수의 화살들이 날아가 벨제붑의 몸통을 때렸다.

    [오오! 모기가 문 것이냐! 가렵지도 않도다!]

    파리가 모기를 무시하는 것이 어째 좀 아이러니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이내 벨제붑의 폭식을 방해한 대가로 드레이크에게 패널티가 가해졌다.

    -띠링!

    <파리 대왕의 대만찬을 방해하셨습니다>

    <파리 대왕이 ‘드레이크’님의 테이블 매너에 격노합니다>

    <당분간 식사 시간에는 ‘화살 쏘기’ 행위가 금지됩니다>

    <제한 시간: 1분>

    앞으로 1분간 화살 쏘기 행위가 금지되었다.

    궁수가 화살을 쏘지 못하면 바보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드레이크는 쇠뇌를 놓고 대신 단검을 들었다.

    동시에.

    -띠링!

    나에게 알림음이 떴다.

    <‘드레이크’님이 거래를 요청하였습니다>

    <수락/거절>

    “님아 선제요.”

    “……?”

    “아, 쏘리. 본능적으로 그만.”

    습관적으로 우리나라 게이머 특유의 인사법이 나왔다.

    나는 주둥이를 찰싹 때리며 거래 버튼에 손을 가져다댔다.

    이윽고.

    내가 거래를 수락하자 아이템 두 개가 내게 넘어온다.

    -<‘사드락(Shadrak)’의 쇠뇌> / 한손무기 / A+

    -<‘로루하마(Loruhamah)’의 쇠뇌> / 한손무기 / A+

    예전 천공섬에서 가챠로 뽑은 고성능 쇠뇌.

    나는 이 두 무기를 장비하고는 재빨리 드레이크의 화살을 한 뭉텅이 장전했다.

    쇠뇌의 좋은 점은 활과 달리 한 번에 여러 대의 화살을 뭉텅이로 날려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퍼펑! 퍼퍼펑! 펑!

    나는 드레이크만큼 잘 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민첩 스텟이 상당하기에 에임이 잘 맞는다.

    벨제붑의 몸뚱이에 내가 쏘아 보낸 화살이 무수히 박혔다.

    -띠링!

    <파리 대왕의 대만찬을 방해하셨습니다>

    <파리 대왕이 ‘고인물’님의 테이블 매너에 격노합니다>

    <당분간 식사 시간에는 ‘화살 쏘기’ 행위가 금지됩니다>

    <제한 시간: 1분>

    나는 화살 쏘기 행위가 밴 되자마자 바로 윤솔에게 거래를 걸었다.

    <‘고인물’님이 거래를 요청하였습니다>

    <수락/거절>

    “네, 택포인가요?”

    “……솔아. 택배비 포함이 여기서 왜 나와.”

    “아차차! 미안, 미안!”

    윤솔도 거래창을 보자마자 무의식중에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빨갛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거래 버튼을 연타했다.

    그리고 쇠뇌를 넘겨받은 윤솔이 또다시 화살을 한 무더기 장전해 벨제붑에게 쏘아 보낸다.

    악귀대왕의 뿔 아이템이 있어서인지 윤솔의 공격력 역시도 상당했다.

    -띠링!

    <파리 대왕의 대만찬을 방해하셨습니다>

    <파리 대왕이 ‘윤솔’님의 테이블 매너에 격노합니다>

    <당분간 식사 시간에는 ‘화살 쏘기’ 행위가 금지됩니다>

    <제한 시간: 1분>

    역시나 윤솔 역시 벨제붑에 의해 화살 쏘기 행위를 밴 당했다.

    그때쯤 해서 1분이 지나 드레이크의 밴이 풀렸다.

    윤솔에게 쇠뇌를 넘겨받은 드레이크는 벨제붑을 향해 화살을 발사했다.

    [오-오오오오!]

    벨제붑은 붉어진 눈을 들어 사납게 포효했다.

    아무리 모기에게 뜯기는 것이더라도 이렇게 몇 십 방씩 번갈아 가며 뜯기는 것은 부담스러울 테지.

    이게 바로 개인 아이템의 공유재산화!

    “거래 원합니다. 조용하고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아이디는 ‘직거래살인마’입니다.”

    “일단 보내 주세요. 그럼 한 달에 3만 원씩 10번 드릴게요. 보증서에 뭐라고 적혀 있나요?”

    “으음~ 너한테는안팔아요 라고 적혀 있네요.”

    우리는 훈훈하게 우리 민족 고유의 거래용 덕담을 주고받으며 활과 화살을 건넸다.

    간만에 옛날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옛날 생각나는군. 벽돌을 줬었겠다, 그놈!”

    뭐 아무튼.

    이런 식으로 아이템을 돌려가면서 딜을 넣으면 벨제붑의 대만찬 기간에도 충분히 상당량의 딜을 박아 넣을 수 있다.

    ……물론 ‘식욕’ 특성으로 인해 모든 파티 상태가 해제된 상황에서 아이템 거래를 믿고 할 수 있을지는 파티원간의 신뢰도에 달려 있겠지만 말이다.

    “뭐, 그럭저럭 피해 다닐 만하지? 딜도 어찌어찌 박히긴 하고.”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구더기 언덕 저 위를 바라보았다.

    불길한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는 아래 파리 대왕이 부유한다.

    놈은 통통하게 살찐 몸 전체에 엄청나게 많은 화살들을 박은 채 웽웽 날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딜 넣는 게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

    대만찬 기간의 금기행위는 아이템 돌려쓰기로 해결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폭식 특성의 문제는 단순히 ‘밴(Ban)’ 뿐만이 아니다.

    -띠링!

    <파리 대왕의 폭식이 한계를 맞이했습니다>

    <상태이상: 역류성 식도염>

    <파리 대왕이 지금까지 먹었던 것들을 모두 게워냅니다>

    폭식 특성을 발동한 벨제붑은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 ‘역류성 식도염’ 상태에 빠지게 되고 지금까지 흡수하거나 밴 시켰던 모든 공격들을 반사 데미지의 형태로 게워낸다.

    [궤에에에에에엑-]

    벨제붑이 끔찍한 구토를 시작했다.

    파리 대왕의 거대한 주둥이에서 역겨운 토사물들이 쏟아져 나와 대지를 뜨겁게 적신다.

    동시에, 지금까지 놈이 입었던 피해들이 고스란히 반사되기 시작했다.

    촤촤촤촤촤촤촥!

    벨제붑의 주둥이가 크게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엄청나게 많은 화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가 번갈아 가며 쐈던 모든 화살들이 소나기처럼 날아든다.

    피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초 광역공격이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다면 이 무시무시한 대공습 앞에 망연자실한 채 지레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진! 지금!”

    “오케이!”

    우리는 다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지금껏 노려 왔던 타이밍이었다.

    “드디어 이걸 쓸 때가 왔군.”

    드레이크는 등에 메고 있던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자질구래(磁質彀錸)’한 화살통> / 허리띠 / A+

    자석 자(磁), 바탕 질(質), 활 쏘기에 알맞을 거리 구(彀), 레늄 래(錸).

    양철 골렘의 코어를 깎아서 만들어 낸 화살통으로 자질구레한 것들을 담을 수 있다.

    -민첩 +10%

    -특성 ‘자동회수’ 사용 가능 (특수)

    예전에 리치왕을 잡고 보상으로 얻은 화살통.

    그동안 쏘아 보낸 화살을 자동으로 회수하는 용도로만 썼던 아이템이다.

    이 화살통에는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어서 드레이크의 쇠뇌에서 쏘아진 화살은 무조건 다시 이 화살통을 향해 되돌아와 격납되게끔 되어 있다.

    “이거나 먹어라!”

    드레이크는 럭비선수처럼 화살통을 껴안은 채 벨제붑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화살 자동수거 기능이 있는 자신의 화살통을 허공으로 냅다 집어던졌다.

    빙글빙글빙글-

    그것이 향하는 방향은 바로 벨제붑의 입 속이었다!

    휘리릭- 턱!

    역류성 식도염이라는 상태이상에 걸려 있기에 활짝 벌어져 있던 벨제붑의 입 안으로 드레이크의 화살통이 들어가 박혔다.

    동시에.

    차라라라라라락-

    벨제붑이 반사해 낸 수많은 화살들이 허공에서 일제히 방향을 바꾸었다.

    화살도, 화살의 형상을 한 반사 데미지도 모두 화살통을 향해 되돌아간다.

    그 수는 우리가 지금까지 레이드를 하면서 쏘아 보냈던 화살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두 배나 많았다.

    …우득! 뿌부북!

    어마어마한 양의 화살이 박혀드는 소리는 의외로 짧았다.

    화살들이 박히는 타이밍이 거의 동시였기 때문이다.

    단단한 외골격이 깨지고 그 밑의 두텁고 질긴 생가죽이 찢어지는 소리.

    수없이 많은 화살들이 그런 벨제붑의 몸을 뚫고 들어간다.

    [그-아아아아아아악!]

    이번만큼은 천하의 파리 대왕도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좋았어!”

    나는 쾌재를 불렀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폭딜을 꽂았다.

    금상첨화로.

    -띠링!

    <파리 대왕의 ‘대만찬(大晩餐)’이 종료되었습니다>

    <파리 대왕의 ‘대조찬(大朝餐)’까지 남은 시간 07:59:58>

    4페이즈, 벨제붑의 폭식 시간이 끝났다.

    놈의 스킬 쿨타임은 8시간, 다음 날 아침까지는 폭식 특성이 봉인된다.

    나는 온몸에 화살이 박힌 채 비틀대는 벨제붑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부터는 5페이즈, 나도 모르는 영역이야.”

    하지만 뭐가 나올지 몰라도 상관없다. 지금부터는 그냥 일방적으로 쥐어 패는 일만 남았으니까.

    [부오-오오오오옷!]

    벨제붑은 너덜너덜해진 주둥이로 모든 것을 다 게워내며 이쪽을 향해 돌진해 왔다.

    분노와 배고픔에 눈이 멀어 버린 듯하다.

    나는 시간이 된 것을 느꼈다.

    레이드 시작과 동시에 뒤로 슬쩍 빼 놨던 아군을 불러들일 타이밍이다.

    “쥬딜로페!”

    내가 이름을 부르자.

    [호에엣!]

    저 구더기 언덕 뒤의 얼음덩이 위에서 잽싸게 솟구쳐 오르는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쥬딜로페와 그녀를 호위하는 풍뎅이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경례를 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땅에다 무언가를 잔뜩 깔아 놓고 있었는데 일을 하는 도중 잠시 농땡이를 피우면서 바닥에 깔던 것을 집어먹기도 하는 듯 태도가 영 불량했다.

    […핫!?]

    나에게 경례를 하던 쥬딜로페는 이내 자신이 여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재빨리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엉겁결에 경례를 한 자신의 손이 밉다는 듯 한동안 볼을 부풀린 채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쥬딜로페와 풍뎅이 녀석들이 땅에 깔고 때론 집어먹기도 하던 것들을 주목했다.

    그것은 반투명하고 동글동글, 말랑말랑한 작은 덩어리.

    한때 조디악이 대량으로 양산하려 시도했던 사기 아이템!

    -<츄츄의 슬라임 젤리> / 재료 / D

    그레이 시티의 명물 슬라임 젤리.

    슬라임으로 만든 젤리답게 주변 환경의 영향을 잘 받는다.

    바로 ‘슬라임 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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