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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37화 (537/1,000)

537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12)

<히드라 ‘유생체(幼生體)’> -등급: A / 특성: 무한성장, 백전노장, 과식, 맹독, 고속재생, 마법 면역

-서식지: 거인국, 똬리를 튼 사념(巳念)

-길이: 32m.

-‘아홉 개의 머리’를 가졌다는 신화 속의 뱀.

성장폭이 무한대에 가깝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여덟 개의 머리를 가진 커다란 흑뱀이 나와 벨제붑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쉬이익-]

히드라는 오랜만에 보는 내 얼굴이 반갑다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거린다.

예전에 천공섬에서 식인황제 보카사의 화염마법을 막아 달라고 부탁했던 데 이어, 나는 히드라에게 벨제붑의 역병 폭풍을 막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할 수 있지?”

[쉐에엑-]

히드라는 자신 있다는 듯 콧김을 뿜어냈다.

나는 히드라의 뒷모습을 보며 약간 안쓰러움을 느꼈다.

단순히 세계 최강의 극독으로 통하는 벨제붑의 독을 뒤집어쓰는 것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다.

‘히드라는 성체가 될수록 길들이기가 힘들지.’

그 말대로다.

히드라는 성장하고 진화할수록 지능이 퇴화하고 공격적인 본능만이 남아 결국에는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살인기계로 변한다.

아직은 유생체라서 나를 따르고는 있지만 아마 조만간 같이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녀석을 전혀 다른 진화체계로 진화시켜야 하는데… 나는 그 방법을 모른단 말이지.’

아쉽게도 히드라와의 인연은 얼마 남지 않았다.

레이드가 끝나고 나면 녀석을 어디 다른 곳에 방생하든지 해야 할 것 같다.

뭐 아무튼.

지금은 지금에만 최선을 다해야 했다.

벨제붑은 딴 생각을 해 가면서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니.

[쉬이이이익-]

히드라는 커다란 체적으로 내 주변에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사납게 몰아치는 벨제붑의 역병 폭풍으로부터 나를 지켰다.

츠츠츠츠……

히드라의 비상직적인 마법, 독 저항력으로도 벨제붑의 독만은 완전히 막지 못했다.

히드라는 괴로워하면서도 두꺼운 비늘들로 나를 감싼 똬리를 풀지 않았다.

결국.

쿵-

히드라는 신음 소리를 내며 바닥에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때쯤 해서 역병 폭풍도 멈췄다.

애초에 페이즈가 끝날 때 들어오는 가불기이니만큼 그 시간도 짧다.

“괜찮아?”

나는 바닥에 늘어져 숨을 몰아쉬는 히드라를 쓰다듬었다.

[쉬이익-]

히드라는 내 손길이 기분 좋다는 듯 미약하게 꼬리를 살랑거린다.

독 저항력이 워낙 넘사벽으로 강한 녀석이라 그런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녀석을 얼러 줄 틈이 없다.

벨제붑이 또다시 공격을 감행하려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 많았어. 푹 쉬어.”

나는 히드라를 반지 안으로 역소환시켰다.

그때.

-띠링!

모두의 귓가에 요란한 적색경보가 떴다.

<파리 대왕이 공복(空腹)에 지쳤습니다>

알림음을 들은 드레이크와 윤솔의 표정이 밝아졌다.

“놈의 배가 텅 비었나 보다! 그렇게 열심히 독을 쏟아내더라니!”

“만세! 드디어 약해졌다!”

드레이크와 윤솔이 원딜에 바짝 힘을 기울였다.

드레이크는 배드엔딩의 외골격을 깎아 만든 화살대에 순 불카노스로 만들어진 화살촉을 달아 마구 난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살은 고정 S+등급 몬스터의 외골격조차 뚫고 퍽퍽 틀어박힌다.

윤솔은 그런 드레이크의 화살에 신성한 불길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대상에게는 축복의 효과를 가져다줄 이 화살은 유일하게 악마에게만 치명적인 데미지로 변한다.

더군다나 이 둘은 마몬을 잡고 난 직후 ‘탐욕의 악마사냥꾼’이라는 호칭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악마 계열 몬스터에게는 데미지가 두 배로 들어간다.

따라서 벨제붑은 지금 꽤나 상당한 양의 피해를 입고 있는 중이었다.

드레이크는 신나게 화살을 쏘며 내게 외쳤다.

“어진! 놈이 약해졌다! 지금이 딜 타이밍 아닌가!?”

하지만.

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벨제붑이 공복 상태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에게 있어 썩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저건 벨제붑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니야. 국면이 새로운 페이즈로 전환되었다는 뜻이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벨제붑이 움직였다.

놈은 ‘식욕(食慾)’ 특성에 이은 ‘공복(空腹)’ 특성으로 한층 더 흉악하게 변했다.

피 구덩이처럼 시뻘건 안와 속에 디글디글 들어찬 수억 개의 눈알들이 석류알처럼 붉게 빛난다.

우적- 우적- 우적- 우적-

놈은 커다란 주둥이를 들어 대기를 흡입했다.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 위에 있던 무수한 구더기들이 바람에 쓸려 벨제붑의 입 안으로 향했다.

또한 대지에 널브러져 있던 악마 해골병들의 뼈 역시도 벨제붑의 식사거리가 되었다.

빠그작- 빠그작- 질겅질겅…

바닥의 뼈와 살점들을 모두 주워먹은 벨제붑은 한참 동안이나 기괴하게 생긴 구강을 움직여 저작물(咀嚼物)을 모두 삼켜 버렸다.

이윽고, 벨제붑의 주둥이가 이상한 모양으로 벌어졌다.

나는 이 파리가 지금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비웠으면 채워야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벨제붑은 역병을 마음껏 쏟아낸 만큼 지금 엄청나게 먹어 대고 있는 것이다.

쿠르르륵!

이내 벨제붑의 두 눈이 수억 개의 빛줄기를 뿜어내며 타오른다.

놈은 한층 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몸집을 비틀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날아들었다.

-띠링!

<파리 대왕의 식욕에 발동이 걸렸습니다>

<대만찬(大晩餐)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이제 4페이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

드디어 왔다.

벨제붑의 다섯 최악 중 네 번째이자 내가 아는 마지막 특성!

그것은 바로 ‘폭식(暴食)’ 특성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기세, 벨제붑이 근접까지 다가와 공격을 시도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윤솔도 드레이크도 바짝 긴장했다.

“으앗! 이리로 곧장 날아오고 있어!?”

“어진! 어서 다음 오더를!”

친구들은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미안. 이번 공격은 답이 없다.”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벨제붑의 다섯 공격패턴 중 네 번째 공격 패턴인 ‘폭식’은 단연코 벨제붑의 모든 특성 중 가장 최악의 것이다.

“벨제붑은 부패와 폭식을 상징하지. 그러니 ‘폭식’ 특성이 가장 최악인 것도 당연해.”

“으음. 부패와 폭식이라. 하긴, 부패에 가면 폭식을 하게 되니 연관성도 있어 보이는군.”

“그건 부패가 아니라 뷔페에요 드레이크 씨.”

뭐 아무튼.

나는 드레이크와 윤솔의 원거리 딜링을 중지시켰다.

“벨제붑의 폭식 특성은 아주 위험해. 놈이 폭식에 들어가는 동안 녀석을 때리면 해당 동작을 벨제붑에게 빼앗겨 더는 할 수 없게 된다.”

……?

드레이크와 윤솔은 아무래도 내가 한 말을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알기 쉽게 바로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딱!

바닥에서 돌맹이 하나를 집어든 나는 그것을 높게 던져 벨제붑의 몸통을 공격했다.

돌맹이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는 벨제붑의 머리통을 통 때리고 튕겨나갔다.

그리고 이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또다시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조각을 집어 들고 던지려 하자 해당 동작이 시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마비라도 걸린 듯, 돌조각을 던지려는 시늉만 하면 전신이 빳빳하게 굳어 버린다.

“바로 이거야. 벨제붑은 폭식을 통해 플레이어의 해당 공격 모션 자체를 빨아먹어서 밴(ban) 시켜 버리지. 그러면 플레이어는 벨제붑에게 같은 종류의 공격을 할 수 없어.”

즉 폭식 특성을 발동하고 있는 벨제붑에게 마법이나 화살, 칼을 휘두르면 영영 그 동작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금지, 봉인류 특성을 사용하는 몬스터는 그동안 몇 있어 왔지만 단순히 돌을 던지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등의 기본 공격 모션까지 제한시켜 버리는 미친 밴 폭은 확실히 처음이었다.

“흐음, 자기를 공격한 적의 스킬을 모조리 밴 시킨다는 건가? 사기적이로군.”

“스킬을 넘어서 기본 동작까지 봉인하다니. …정말 굉장하네, 고정 S+급 몬스터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평범한 찌르기나 베기 등 일반 기본 공격조차도 모조리 금지를 먹을 수 있다.

심지어.

[그웨에에에엑-]

콰콰콰콰콰콰쾅!

벨제붑은 지금껏 자기가 당했던 공격들을 모조리 게워내기 시작했다.

“그래, 채웠으니 또 비워야겠고?”

나는 벨제붑이 쏟아내는 공격들을 보며 뒤로 빠졌다.

벨제붑은 지금껏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당했던 원딜 데미지와 나에게 당했던 근딜 데미지를 모조리 뱉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오즈의 반사 데미지와도 비슷하다.

…쾅! …콰콰콰쾅! 우지지직!

무수한 화살비가 빙벽에 스크래치를 내 놓는다.

동시에 벨제붑의 몸에서 거대한 주먹 모양의 기류가 뿜어져 나와 주변을 온통 초토화시켰다.

마몬과 데스웜의 힘이다.

이 지독한 난반사 데미지에 우리는 속절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공격을 하면 해당 공격이 밴 당하고 거기에 반사 데미지까지 들어오는 구조야. 솔직히 답이 없지.”

나는 암담한 심경으로 말했다.

돌파구 없는 지독한 고난이도.

솔직히 이것만큼은 15년간의 미래 지식으로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

‘남은 카드가 두 장 있기는 있는데… 이걸 써도 아슬아슬하겠고.’

나는 벨제붑의 남은 HP를 보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딜 미터기를 계산해도 아슬아슬하게 한 끗발이 모자란다.

미리 안배해 둔 비장의 무기들을 꺼낸다 해도 벨제붑 레이드를 성공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 긴가민가한 상황이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요행수를 바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내 계산 외의 지원화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때.

“어진. 내게 생각이 하나 있다.”

드레이크가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무언가를 귀뜸했다.

회귀 전 세상에서 PVP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았던 고인물 드레이크 캣.

나는 그의 번뜩이는 기지를 듣고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 수가 있었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가.

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벨제붑의 폭식 특성을 파훼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고인물은 고인물이다.

“왜? 뭔데, 뭔데.”

윤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돌아본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그런 윤솔을 바라보았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화살을 모아 온 일화를 알아?”

드레이크가 생각해 낸 작은 꼼수, 아무래도 이것이 레이드의 사활을 가르는 열쇠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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