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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35화 (535/1,000)
  • 535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10)

    고대 사람들은 파리라는 생물이 악령 그 자체거나 혹은 사람에게 악령을 옮기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파리가 꾀었던 음식을 먹으면 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고 썩은 고기나 쓰레기에 떼 지어 몰려드는 파리 떼를 보고는 불길하고 더러운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파리들은 시체의 유골에서 태어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파리를 회피했고, 또 그 때문에 신들에게 산 제물을 바쳤다.

    ‘죽음의 냄새’와 ‘병을 유발하는 더러움’!

    이 불길한 파리들을 부하로 거느리는 이가 바로 벨제붑이다

    -마노 다카야, 『타락천사』 中-

    *       *       *

    파리 대왕 벨제붑은 외형도 그렇고 설정도 그렇고 여러 모로 참 역겨운 몬스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놈이 가해 오는 공격의 성질이 ‘독’과 관련되어 있음을 유추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벨제붑의 3페이즈, 극독(劇毒)!’

    드디어 벨제붑을 상징하는 다섯 최악 중 세 번째가 등장했다.

    꾸르르륵… 꿀렁…

    가만히 서 있던 내 발밑에 녹빛이 도는 검은색 원이 커다랗게 생겨났다.

    지독한 시독(屍毒)이 끓어오르는 웅덩이.

    바닥도 없는 이 늪에 빠졌다가는 중독보다 익사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으, 이 익숙한 악취.’

    나는 순간 회귀 전 이놈의 독에 수없이 죽었던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려버렸다.

    전 대륙을 역병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던 오염된 피 사건!

    수억 배로 희석된 놈의 독에도 죽었을 만큼 벨제붑의 독은 강력했고 그때의 나는 나약했다.

    심지어 눈앞의 이 독은 원액(原液)이 아니던가!

    PTSD가 내 몸을 일순간 빳빳하게 굳혔다.

    “어진아! 피해!”

    마침 내 옆에 있던 윤솔이 커다란 손을 뻗어 내 등을 밀어주었기에 나는 겨우 웅덩이가 생성되기 전 옆으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꾸르르륵… 꾸르르륵… 꾸르르륵… 꾸르르륵… 꾸르르륵…

    극독 웅덩이는 하나가 아니다.

    내가 피해 움직이면 웅덩이는 내가 밟은 새로운 땅을 무너트리며 계속해서 등장한다.

    츠츠츠츠…

    극독 웅덩이에 빠진 뼈다귀 몇 개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커멓게 변했고 이내 부식되어 가루로 바스라졌다.

    “휴. 덕분에 살았네. 고마워 솔아.”

    나는 윤솔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순간의 방심에 그간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뻔했다.

    “한 방울만 몸에 튀어도 무조건 중독될 거야. 조심해.”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경고하는 동시에 내 자신의 멘탈도 단단히 다잡았다.

    벨제붑이 만들어 내는 독이야말로 이 세계관 최강의 극독, 한때 전 대륙을 공포로 몰고 갔던 오염된 피의 근원이자 핵심(核心)인 것이다.

    “…바실리스크의 독은 명함도 못 내밀겠군.”

    드레이크가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벨제붑의 독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통틀어 가장 강하다.

    적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츠츠츠츠츠…

    도처에 역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장판처럼 깔리는 독 데미지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때.

    “어엇!?”

    이번엔 윤솔이 발을 헛디디며 바닥에 쓰러졌다.

    전 구더기 웨이브 당시 마나를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신성불가침 보호막을 바로 쓸 여유가 없었다.

    “이런!”

    나는 잽싸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윤솔을 끌어안고 등을 아래로 해서 슬라이딩!

    하지만 안타깝게도 새로 생겨난 극독 웅덩이에 발목을 스치고 말았다.

    꾸르르르륵!

    발목이 검은색, 녹색으로 물들며 천천히 부식된다.

    “어, 어진아, 미안해. 나 때문에…….”

    윤솔이 울먹였지만 나는 손을 뻗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나에게는 믿는 구석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수수께끼 역병 해독제> / 재료 / A+

    독을 중화하는 정체불명의 약물.

    -독 저항력 +?

    약간 뒤늦게 뛰어온 드레이크가 재빨리 나에게 물약 병 하나를 건넸다.

    “자, 네 아들을 죽이고 얻은 것이다. 효과가 있겠지?”

    나는 벨제붑을 향해 패드립(?)을 친 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해독제를 발에 뿌렸다.

    그러자 벨제붑의 독이 눈에 띄게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이 해독제는 아마도 현 시점에서는 신전에 가지 않고 벨제붑의 극독을 해독할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오오. 이 해독제, 성능이 제법 괜찮군?”

    드레이크가 해독제 병을 꼭 쥔 채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살점토막 구더기가 드랍한 해독제 아이템의 수량은 꽤나 많았던지라 한동안은 이것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해독제의 물량이 무한한 것이 아니었기에 빨리 대처법을 찾아야 했다.

    무작정 도망만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설명했다.

    “내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벨제붑의 독 공격에는 특정한 패턴이 있다고 해.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까 잘 봐.”

    물론 미래의 수많은 고인물 용사들이 1.5차 대격변이라고 불렸던 벨제붑에 대항해 가며 목숨으로 알아낸 정보들의 총체이다.

    절대로 틀릴 리가 없었다.

    파팟!

    나는 벨제붑의 시선을 끌며 앞으로 내달렸다.

    츠츠츠츠… 꿀렁!

    아니나 다를까, 벨제붑은 내 발밑에 거대한 극독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놈은 내 발밑에 하나, 그리고 내 도주경로를 예측하여 그보다 조금 앞쪽에 또 다른 극독 웅덩이를 소환했다.

    예상한 대로의 흐름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봐, 벨제붑의 공격 패턴은 늘 대상의 양 옆을 포위하는 식으로 진행되지. 나를 좌우에서 압박하는 이 검록색 웅덩이를 보면 뭐 떠오르는 것 없어?”

    내 물음에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번으로는 알 수 없지. 몇 번 더 보여 줄게.”

    나는 지그재그로 움직여 벨제붑의 주위를 돌았다.

    그르르르륵… 꿀렁! 꿀렁! 꿀렁!

    벨제붑은 계속해서 크고 둥근 극독 웅덩이를 소환해 내 양편을 압박한다.

    직선 코스로 가다가는 바로 중독되어 죽기 때문에 나는 부지런히 전후좌우 대각선으로 움직여야 했다.

    한참 동안이나 내 움직임을 살피던 윤솔과 드레이크는 이내 동시에 한 마디를 던졌다.

    “오델로(Othello)?”

    정확하다.

    오델로는 두 명이 가로 세로 8칸의 오델로 판 위에서 한쪽은 검은색, 다른 한쪽은 흰색인 돌을 번갈아 놓으며 진행하는 보드게임이다.

    꾸르르륵…

    벨제붑은 이 게임에서 ‘흑’을 잡는다.

    그리고 놈이 군림하고 있는 이 거대한 필드를 8x8 구획으로 나누어 극독 웅덩이를 계속 생성해내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이 게임에서 ‘백’을 잡는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벨제붑은 먼 곳에서 돌을 놓는 반면 플레이어는 자기 자신이 직접 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돌은 이것으로 놓는 거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추가적으로 꺼냈다.

    -<수수께끼 역병 제독제> / 재료 / A+

    독을 억제하는 정체불명의 약물.

    -독 저항력 +?

    내가 이것을 극독 웅덩이에 뿌리자 재미있는 변화가 일어났다.

    꾸드드드드득-

    부글부글 끓던 시독이 끈적하게 융기하더니 흰 색으로 꾸덕꾸덕 굳어 가는 것이다!

    그러자 벨제붑이 불쾌한 기색으로 날갯짓을 했다.

    놈의 커다란 주둥이 빨판에 주름이 생기자 또다시 극독 웅덩이가 생겨났다.

    …꾸르르르르륵!

    내가 제독제를 뿌려 흰 색으로 만든 웅덩이 양편에 새로운 극독 웅덩이가 생겨났다.

    그러자 내가 희게 만든 웅덩이가 다시 검록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봐, 완전 오델로지?”

    내가 씩 웃자 윤솔과 드레이크는 그제야 긴장을 약간 풀었다. 아주 약간은.

    나는 박수를 치며 벨제붑을 노려보았다.

    “오델로 방식의 제독은 플레이어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걸 잘 봐.”

    목표는 벨제붑이 방금 만들어 낸 극독 웅덩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뛰어 그 위를 펄쩍 뛰어넘었다.

    도약하여 멀리뛰기, 내 기동력으로도 아슬아슬하게 성공할 정도로 넓은 독 늪이다.

    동시에 나는 공중에 체류하는 상태로 제독제를 뿌려 양편의 극독 웅덩이를 희게 만들었다.

    그러자 중앙에 있던 극독 웅덩이까지 천천히 억제되어 희게 굳어가는 것이 보인다.

    말하자면.

    ●●●

    이 상태에서 제독제를 뿌려 양편의 극독 웅덩이를 제독하자.

    ◌●◌

    이런 상태가 되었고. 이후 오델로의 규칙에 따라.

    ◌◌◌

    가운데 극독 웅덩이 역시도 자동 제독된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겠지 제군들?”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막막할 정도로 압도적인 극독 패턴을 돌파할 희망이 생긴 것이다.

    “자! 그럼 전략적 응용이다!”

    나는 본격적으로 벨제붑을 압박해 가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그림에 따라 벨제붑은 차근차근 돌을 놓는다.

    당연하다. 벨제붑은 몬스터이고 몬스터의 기본은 플레이어를 공격하는 것이니까.

    아무리 벨제붑이 똑똑하고 또 딥러닝으로 다양한 전략을 창조해낸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내가 향하지 않는 방향으로 돌을 놓을 수는 없다.

    타타타타탁!

    나는 지그재그로 뛰어 벨제붑의 극독 웅덩이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이윽고 벨제붑이 오염시킨 시커먼 극독 웅덩이들과 내가 제독한 흰 웅덩이들이 복잡하게 배열되었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모양이다.

    X●◌

    ●●◌

    ◌●◌

    여기서 내가 제독제를 뿌린 곳은 저 X표시가 있는 곳이었다.

    …쨍그랑!

    내가 코르크 마개를 따고 제독제 병을 바닥에 깨트리자마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

    ◌◌◌

    ◌●◌

    가로 세로 대각선에 있던 극독 웅덩이 3개가 한꺼번에 제독되며 벨제붑의 입지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오-오오오오오!]

    분노한 벨제붑이 사납게 포효한다.

    놈의 분노가 대기의 파동을 만들어내 나의 볼살을 떨게 만들고 있었다.

    “하긴, 제독제 한 병으로 웅덩이 세 개를 잃었으니 빡칠 만도 하지.”

    그러나 벌써부터 화내면 섭섭하단 말씀!

    당연한 말이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나는 씩 웃으며 웅덩이 하나를 에돌아 동료들과 합세했다.

    호다다닥-

    나는 드레이크와 윤솔, 심지어 쥬딜로페까지 보내 벨제붑의 마나를 낭비시킴과 동시에 내가 원하는 다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 꿀렁! 꿀렁! 꿀렁!

    벨제붑은 나와 동료들의 움직임을 따라 연달아 웅덩이를 소환해 냈다.

    동시에 우리가 뿌린 제독제 역시도 놈의 웅덩이를 차근차근 제독해 간다.

    어느덧 64구획으로 나뉜 대지의 꽤 많은 부분이 검고 희게 물들었을 때.

    [……!]

    벨제붑이 순간 극독 구덩이를 소환하는 것을 멈추고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드레이크와 윤솔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다.

    “아니, 놈이 움직임을 멈췄다!”

    “엇? 왜 멈췄지!?”

    하지만 나는 예상대로의 반응에 쾌재를 불렀다.

    ‘…좋았어! 걸려들었다!’

    내가 아까부터 노렸던 것은 오델로의 규칙 중 하나인 ‘패스(Pass)’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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