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34화 (534/1,000)

534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8)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어느 고을이나 집안도 서로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한다.”

-예수가 자신을 벨제붑(בַעַלְזְבוּב)으로 몰아가는 바리새인을 꾸짖을 때 했던 말 (마태 12,25)-

*       *       *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혼자인 법.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타인과의 연대나 유대 따위는 필요 없다. 나를 제외한 타인을 ‘먹잇감’으로 보는 순간 진정한 ‘나’와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나’란 바로 나, ‘파리 대왕’을 뜻한다!]

벨제붑이 외쳤다.

동시에 아군을 알리는 푸른 표식이 사라지고 몬스터를 볼 때나 보이는 붉은 표식이 우리들을 갈라놓는다.

우리는 서로를 먹잇감으로 보게 된 것이다!

“……뭐, 일반적인 파티였으면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현실에서도 끈끈하게 함께하는 친구들이 아닌가.

‘팀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우리에게 있어서 벨제붑의 특성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애초에 마몬 레이드 당시 천문학적인 금액을 얻었을 때도 깨지지 않았던 친구 사이이거늘.

“어진, 그런데 시야가 빨갛게 물들어서 별로 좋지는 않다.”

“그러게. 어우, 배도 약간 고파지는데?”

“진정들 해. 눈 빨간 건 대충 참으면 되고 배고파진 건 그냥 밥 때 돼서 배고픈 거야.”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꼬르륵- 하고 배꼽시계가 울린다.

물론 게임 시스템의 영향은 아니고, 그냥 레이드를 오래 뛰다 보니 배가 고파진 것이지.

“오늘 저녁은 지옥에서 먹는다.”

나는 유명한 영화 명대사를 외치며 벨제붑의 앞에 섰다.

이윽고, 벨제붑의 공격이 제 2페이즈로 넘어갔다.

[아비의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 아들 된 도리로다.]

벨제붑이 가진 ‘최악의 다섯 특성’ 중 두 번째가 발현되었다.

첫 번째 페이즈 ‘식욕’ 특성에 이어 발동된 것은 ‘부자유친(父子有親)’ 특성 페이즈.

그것은 벨제붑의 수많은 아들들을 맞이해 싸우는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

얼음섬 마트료시카를 꽉 채우고 있는 엄청난 물량의 구더기들을 모두 막아 내는 것이 이번 과제다.

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

온 세상 천지를 뒤덮고 있는 구더기들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이곳이 섬이라서 일정 물량 이상 불어난 구더기들이 죄다 바다에 빠져 죽고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본토 어딘가의 드넓은 평야 지대였다면 아마 끔찍한 인해전술에 파묻혀 죽고 말았을 것이다.

“자, 시작해 볼까?”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내가 향한 곳은 구더기 언덕 중앙에 봉긋하게 솟아 있는 한 언덕이었다.

그곳은 주변이 말라죽은 고목과 얼음덩어리들에 가로막혀 있었고 언덕 꼭대기로 통하는 길목은 단 하나의 가파른 오르막길로 되어 있었다.

나는 언덕빼기 위로 올라가 입구를 점거하고 섰다.

“이제부터 입구막기 타임이다. 입구막기 초고수만 오세요.”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와 윤솔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친구들에게 ‘입구막기’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이 게임은 수십 년 전에 유행했던 스x크래프트의 유즈맵(Use Map) 버전으로, 사용자들이 직접 만든 모드이지.”

소수의 유닛을 가지고 언덕 입구를 사수하며 몰려드는 다수의 적들을 사살하면서 일정 시간 동안 버티는 것을 과제로 하는, 일종의 ‘디펜스 게임’으로 분류된다.

몰려드는 적이 언덕 입구를 밀고 들어와 언덕 안쪽까지 침투하면 경기는 패배로 끝난다.

2000년도 초반 등장 당시 단순한 룰과 고난이도의 협동 전략, 참신한 소재로 폭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당시 유즈맵 공방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을 정도였다.

지금 벨제붑의 두 번째 페이즈인 ‘구더기 웨이브’는 바로 이 입구막기 게임을 오마쥬하고 있는 것이다.

드글드글드글드글드글……

한편, 구더기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세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놈들은 잡아먹을 것이 없자 서로의 몸을 탐하길 주저치 않는다.

큰 놈은 잡아먹고 작은 놈은 잡아먹힌다.

언덕 아래에는 형제고 동료고 없는 게걸스러운 살육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윤솔은 언덕 입구 아래에서 미친 듯이 기어오고 있는 구더기 떼를 바라보며 징그럽다는 듯 몸서리쳤다.

“어진아, 이 구더기들을 언제까지 막아야 하는 거야? 공략 어려워?”

“음, 어렵기로 악명 높긴 한데… 사실 몬스터 웨이브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야. 다만…….”

나는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윤솔과 드레이크를 돌아보며 말했다.

“트롤과 아군 PK범이 너무 많아서 문제지.”

그렇다.

입구막기 중 가장 유명한 버전은 7인 입구막기이다.

일곱 명이 힘을 합쳐 언덕 입구를 막고 농성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꼭 이 7인 중 한명이 고의 실수를 하거나 자폭, 아군을 죽여서 게임 클리어를 실패하게 만든다.

시작하자마자 같은 편을 죽이거나 입구를 막는 척 하다가 적에게 문을 열어 주거나 하는 고의 트롤들 때문에 체감 난이도가 극악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오죽하면 입구막기의 시작은 파이팅이고 끝은 패드립이라는 유머도 있겠는가.

심지어 여기 이 벨제붑의 구더기 웨이브는 그 전에 발동된 ‘식욕’ 특성과 맞물려 더더욱 클리어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자면 동맹이 풀린 상태에서 입구막기 게임을 하는 것이랄까?

“꼭 이랏샤이마세! 하면서 입구의 문을 여는 트롤들이 존재하지. 아군에게 마법을 쓰거나 칼침을 놓는 또라이들도 많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입구막기는 게임 시스템 자체가 마음 속 트롤을 끄집어내게끔 되어있다.

인간의 마음 속 밑바닥, 본연의 악의를 드러내게 만드는 구조.

이것이 파리 대왕 벨제붑의 식욕 특성과 맞물려 극악의 난이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자, 나는 중앙에 서겠다.”

“알겠다 어진, 나는 좌측을 보조하지.”

“그럼 나는 우측에서 힐을 줄게!”

우리는 벨제붑의 먹잇감이 된 살인자 다섯과는 다르다.

서로를 먹잇감, 사냥감으로 보지 않고 철저하게 협력하고 배려, 존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파티 플레이 아니겠나!

나는 힘차게 외쳤다.

[Join]

[::3인 입구막기 초고수만::@@@@@@]

그리고 바로 실전으로 돌입했다.

입구를 떡-하고 틀어막고 있으니 언덕 아래 구더기들이 우글우글 몰려온다.

놈들은 역겨운 체액을 뿜어내며 살찐 몸을 뒤척여 오르막을 올라오고 있었다.

“자, 일단 못 올라오게 점액부터 깔고요.”

나는 숨을 참고는 전신에서 씨어데블의 점액을 내보냈다.

꿀렁- 꿀렁- 꿀렁- 꿀렁-

내 몸을 흠뻑 적신 점액들은 마치 꼼장어의 그것처럼 끈적하고 미끈하게 내리막길을 흘러간다.

당연히 여기에 닿은 구더기들은 마찰력이 0이 되어 버린 대지를 더 이상 기지 못하고 발버둥친다.

하지만 아무리 점액이 미끈거린다고 해도 인해전술에는 장사 없다.

구더기들은 점액에 범벅된 형제들의 몸을 밟고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쯤 해서 오더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 우선 내가 반사데미지, 혈액포식자, 앙버팀, 여벌의 심장 등등으로 입구를 틀어막을게.”

나는 탱커 캐릭터가 아니기는 하지만 일단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몸빵이 될 수 있다.

“드레이크는 일단 내 뒤쪽 좌측에 홀드를 하고 있으면서 HP통이 높은 구더기들 위주로 골라 저격을 해.”

드레이크는 마름쇠를 심거나 작은 화살들을 부채꼴 각도로 난사할 수도 있는 훌륭한 원딜러이다.

“솔이는 내 뒤쪽 우측에서 조금 더 아래의 외곽으로 돌아가서 언덕 끝부분, 절벽 아래의 구더기들 진입로 쪽 포인트에다가 신성불가침 장막을 걸어 줘. 그러면 구더기들이 비탈길 입구에서 병목현상을 일으키며 버벅거릴 거야.”

윤솔은 힐러의 역할뿐만 아니라 적들에게 각종 상태이상을 거는 디버프 마스터이다.

“드레이크는 바닥에 마름쇠를 심을 때 솔이에게 스플래쉬 데미지 주지 않도록 주의하고, 솔이는 절벽가에 바짝 붙은 구더기의 원거리 체액 분사를 잘 피하는 동시에 틈틈이 나한테 힐을 걸어 줘.”

즉, 비록 3인뿐이라고 해도 우리의 조합은 꽤 좋은 편이라는 말씀.

내 오더를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대답했다.

“라져!”

[뿌앵쓰!]

동시에 내 품에서 튀어나온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쥬딜로페, 이 녀석은 자신을 따르는 풍뎅이 병사들을 이끌고 허공에서 난입해 오는 작은 역병파리들과 용맹히 싸우기 시작했다.

…딱! …딱콩! …딱!

두 개의 나뭇가지를 들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쥬딜로페는 어느덧 나의 움직임을 많이 닮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암살자 타입이랄까?

한편.

나는 옆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얼음덩어리 몇 개를 캐서 1시 쪽을 막았다.

그러자 구더기들은 슬금슬금 돌아 7시 방향으로 돌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입구막기 짬밥이 좀 쌓이면 이런 꼼수도 쓸 수 있지.”

나는 다시 보석을 7시에 박아 구더기들을 또다시 1시로 돌아 올라오게 만들었다.

그러니 구더기들은 일직선 길을 ㄹ자 모양으로 돌아서 올라오게 된 셈이다.

일명 ‘보석 공사’로 통하는 수법, 원작 게임의 원본 공략과는 조금 다르게 재현했지만 적의 이동을 방해한다는 점에서는 원리가 비슷하다.

“보석공사 완료. 이제 버티기만 하면 된다.”

나는 계속해서 구더기들을 몸으로 막아냈다.

너무 많은 수가 쌓였다 싶으면 틈틈이 발을 굴러 땅을 뒤집어 주면 되니 웨이브가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동료를 믿을 수 있고 구더기들의 독에 면역이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어차피 구더기들의 이빨이라고 해 봐야 간지러울 뿐이란 말이지.”

나는 몸을 갉아대고 있는 구더기들을 반사 데미지로 날려버리며 씩 웃었다.

…….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그 많던 구더기들도 이제 슬슬 바닥을 보인다.

푸욱- 철퍼덕!

드레이크가 손에 든 단도를 내리찍어 발밑까지 기어든 구더기에게 최후의 공격을 가했다.

“이것으로 얼추 정리된 것 같다, 어진.”

나는 정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산혈해(尸山血海)!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바다를 이루었다.

구더기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섬은 여전히 수많은 구더기들로 뒤덮인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해서 싸워 온 우리는 알 수 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 웨이브도 서서히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하아……. 배고프다. 내 비위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어.”

윤솔이 짧은 한숨을 돌리는 그 순간.

스스스스-

하얀 바다를 이루던 구더기들이 홍해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

그제야 아들들의 죽음 앞에 화가 난 아비, 파리 대왕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성급하지도, 조급하지도 않다.

그저 그 분노를 한껏 드리우며 천천히 날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도망치지 못할 것을 너무도 당연히 확신하며.

[너, 네가 올라가 선 언덕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벨제붑.

역병과 부패의 황제가 본격적으로 출격을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