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33화 (533/1,000)
  • -레고밟았어, 『닳고닳은 뉴비』 215화 中-

    *       *       *

    나는 예전에 그와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거미들의 왕국 부유섬.

    이 던전의 주인이었던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을 잡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우연히도 마침 부유섬을 방문했던 참인 벨제붑과 마주쳤는데 그 당시에는 그와 마주친 것만으로도 죽음을 직감했을 정도로 전투력의 격차가 심했다.

    그야말로 신과 벌레의 차이였으니까.

    ‘그때 용암룡 모르그마르가 나타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죽었겠지.’

    그 폭풍우 치던 밤바다의 공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사실 그 전에도 벨제붑의 힘을 겪어 본 적이 있기는 있는데 말야.’

    나는 부유섬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큘레키움 레이드 전에도 나는 벨제붑과 마주한 적이 있다.

    그것은 내 기억보다 조금 더 오래된 기억, 회귀 전의 경험이었다.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친구들과 파티 사냥을 하기 위해 늘 가던 사냥터로 향하던 길이었다.

    순간.

    웽-

    기분 나쁜 날갯짓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

    필드에 도착한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온통 시뻘겋게 질척이는 대지 위에는 무수한 뼈다귀들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뼈의 카펫.

    그것은 전부 유저들의 것이었다.

    정식으로 업데이트된 1, 2, 3차 대격변에 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일 개체, 단일 사건으로서 뎀 세계관에 가장 많은 피해를 끼쳤던 사건.

    일각에서는 ‘1.5차 대격변’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끔찍한 홀로코스트.

    전 대륙 인구의 1/3이상을 사망케 했던, 일명 ‘오염된 피 사건’의 시작이었다.

    ‘……벨제붑은 오염된 피 사건을 통해 수많은 시체들을 만들어 자신의 세력을 크게 불렸고 곧이어 대전쟁의 서막을 열었지.’

    벨제붑이 오염된 피 사건을 일으키면서까지 견제하려고 했던 대상은 뻔하다.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서로 경쟁했던 숙적, 타고나길 악마의 적으로 태어난 지배종.

    용(龍). 그 중에서도 시커먼 비늘을 가졌고 세 번째로 많은 나이를 먹었던 죽음룡 오즈!

    죽음룡 오즈가 마몬의 불카노스 광산을 빼앗아 자신의 몸을 강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벨제붑은 전 대륙에 무시무시한 역병을 창궐시켜 자신의 ‘아들들’을 살찌웠다.

    곧 벌어질 오즈와의 거대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뭐, 오즈랑은 확실히 싸우게 됐네.’

    내 전신을 감싸고 있는 오즈의 비늘이 사납게 곤두서는 것이 느껴진다. 본능적으로 운명의 적을 알아본 것이겠지.

    “운명의 적……이것이 바로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건가!”

    “어진, 노잼이다.”

    “으응? 어진아 나는 이해 못 했어, 무슨 개그였는지 설명해 주면 안 돼?”

    나는 드레이크와 윤솔의 반응은 잠시 무시하기로 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새롭게 바뀐 맵과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다.

    “어디 보자, 독 늪지대가 생겼고 구더기들의 산이 다섯 개 생겼고 악취 나는 바람이 불고…….”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수많은 커뮤니티 정보글에서 입수한 미래 지식과 같았다.

    벨제붑이 나타나면 그 맵은 원래 어떤 이름을 가졌든 간에 ‘구더기 언덕’으로 명칭이 바뀐다.

    다섯 개의 손가락처럼 높게 솟아난 봉우리들.

    온 세상에 구더기들이 득실대고 이 작은 아귀들이 퍼트리는 역병은 끝을 모르고 퍼져나간다.

    만약 벨제붑이 일반적인 맵, 혹여나 평범한 유저들이 많이 상주하고 있는 도시 근처에 소환되었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사람이 별로 없는 북대륙에서 시작한 역병이 전 대륙을 휩쓸며 기승을 부렸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래서 격리된 구역으로 온 것이지.”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 유빙들이 둥둥 떠다니는 가혹한 바다가 벨제붑과 본토를 차단한다.

    역병이 퍼지더라도 자체적으로 잠잠해질 수 있는 먼 오지(奧地)가 바로 이곳이다.

    …퐁당! …퐁당! …퐁당!

    섬 위로 그득그득 쌓인 구더기들은 그 수를 주체하지 못하고 섬의 외곽까지 밀려나 하나 둘씩 얼음바다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구더기들의 개체 수에 비례하여 불어나는 벨제붑의 위세가 바다로 인해 억제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모로 전장의 위치를 잘 골랐다고 할 수 있겠다.

    바로 그때.

    파리 대왕 벨제붑이 말했다.

    [너희 하잘 것 없는 것들아.]

    놈의 고유 대사이다.

    벨제붑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다섯 구의 시체였다.

    랠프, 잭, 피기, 사이먼, 로저.

    그레이 시티에서 탈출해 여기까지 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살인자 5인.

    그들을 내려다보는 파리 대왕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파리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라 표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렇게 짐작되었다.

    [너희는 올라가 누운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웽웽웽웽-

    벨제붑은 다섯 구의 시체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리고는 계속 음울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악마성좌를 소환한 대가는 크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받아가겠노라. 피와 살, 뼈, 터럭 한 자락까지 모두 내 아들들의 포식거리가 되리라.]

    동시에.

    다섯 구의 시체에 이변이 일어났다.

    빠그닥- 빠그작- 빠그작- 빠그작-

    랠프, 잭, 피기, 사이먼, 로저.

    다섯 시체가 격하게 요동치더니 이내 사납게 뒤틀렸다.

    이내 다섯 구의 시체에서 통통하게 살찐 구더기 다섯 마리가 각각 모습을 드러낸다.

    놈들은 살인자들의 살을 파먹고 뼈만 깔끔하게 발라내어 세상에 남겼다.

    <벨제붑의 아들 ‘구더기 살점토막’> -등급: A+ / 특성: 맹독, 하수인, 어둠, 과식, 하찮음, 앙버팀, 질긴목숨, 오염된 피, 혈족전생

    -서식지: 데린쿠유 식량창고, 설원 북동지대, 구더기 언덕

    -크기: 10m.

    -모든 욕망과 본능이 거세된 채, 오로지 폭식(暴食)에 대한 갈망으로만 움직이는 살덩어리.

    먹고 싸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살점토막 구더기 다섯 마리가 낄낄 웃으며 구더기 언덕의 다섯 봉우리로 기어간다.

    마치 벨제붑의 다섯 손가락이 되겠다는 듯 말이다.

    동시에.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살과 내장을 발라먹힌 랠프, 잭, 피기, 사이먼, 로저는 뼈만 남은 채로 일어나 어기적 어기적 걷는다.

    어느덧 그들의 뼈에는 날카로운 뿔과 이빨들이 돋아나 있었다.

    윤솔은 살인자들의 시체를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미니언!?”

    그렇다.

    그레이 시티의 살인자 5인의 시체는 저주받은 유빙에 봉인되었고 그대로 악마 군영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악마 해골병> -등급: B / 특성: 악마, 어둠, 언데드, 하수인.

    -서식지: 칼바람 싸움터 우파 군영, 거인국

    -크기: 5m.

    -죽은 악마가 뼈만 남아 되살아났다. 그는 영원히 싸움터를 누빌 운명이다.

    미니언으로 전락한 플레이어라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하지만 이내 그렇게 부활한 육체나마 구더기들에게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다.

    살인자 5인의 시체는 그렇게 다섯 개의 구더기 언덕에 파묻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윤솔은 그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유빙의 해골병 미니언들이 이렇게 만들어진 거구나. 전부 다 벨제붑에 의해 타락한 자들의 영혼인 건가?”

    이렇게 숨은 설정을 찾아가는 것 또한 게이머의 즐거움 중 하나다.

    플레이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말이다.

    “자, 이제부터 진짜로 플레이 해 보자고.”

    나는 앞으로 한 발을 내딛어 벨제붑의 앞에 섰다.

    벨제붑은 수억 개나 되는 붉은 눈알들을 움직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너 하잘 것 없……]

    하지만 벨제붑은 말을 하다 말고 중간에 끊었다.

    “누가 하잘 것 없다고?”

    내가 전신에서 죽음룡 오즈의 아우라를 뭉게뭉게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천하의 벨제붑이라 한들 죽음룡 오즈를 무시할 수는 없다.

    벨제붑은 몹시 놀란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찌 오즈의 기운이 한낱 인간 따위에게!?]

    “좀 더 참신한 대사로 놀랄 수는 없나? 식상한데.”

    나는 바로 레이드에 돌입했다.

    마몬의 힘이 깃든 오른손과 피카레스크 마스크로 인한 공격력 버프 때문에 나의 한 방 딜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콰쾅!

    내 주먹에 피격당한 벨제붑이 뒤로 조금 물러났다.

    하지만 놈은 얼마 물러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잠시 멈췄다.

    윤솔의 신성불가침 보호막이 벨제붑의 몸에 일순간 마비를 걸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드레이크의 화살 난사가 이어졌다.

    배드엔딩의 뼈로 대를 만들고 불카노스로 촉을 만든 화살이었다.

    우리의 공격세례를 받던 벨제붑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건방지다.]

    그 말을 끝으로 벨제붑이 첫 공격을 개시했다.

    츠츠츠츠츠츠츠…

    벨제붑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특성들 중 최악으로 손꼽히는 것 하나가 벌써 등판했다.

    ‘식욕(食慾)’ 특성.

    폭식을 관장하는 대악마답게 놈은 ‘식사’, ‘먹이’, ‘포식’ 등등에 관련된 스킬을 주로 사용한다.

    이 ‘식욕’ 특성이란 단순하다.

    벨제붑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의 동맹, 파티 관계를 해제시키고 그간의 카르마 수치들을 전부 블라인드, 무효화 시켜주는 것.

    한 마디로 파티원들 간의 내분을 일으키는 것이다.

    제물이 되었던 다섯 살인자들 때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혼자인 법.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타인과의 연대나 유대 따위는 필요 없다. ‘나’를 제외한 타인을 ‘먹잇감’으로 보는 순간 진정한 ‘나’와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나’란 바로 나, ‘파리 대왕’을 뜻한다!]

    벨제붑은 해골병으로 전락한 다섯 살인자들을 비웃으며 외쳤다.

    동시에 나는 시야가 붉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드레이크와 윤솔 역시도 마찬가지겠지.

    뿌지직- 지지지직-

    상태창이 심하게 요동친다.

    <파티■*$궳%^&뙑 목록■>

    -드■이크&*뚥%$웺팗

    -■솔긹%*^샯궯

    지금껏 우리를 굳게 이어 주고 있던 파티 시스템이 먹통이 되었다.

    아군을 알리는 푸른 표식은 사라지고 몬스터를 볼 때나 보이는 붉은 표식이 서로를 가리킨다,

    모든 규율과 연대의 부재(不在).

    아노미(Anomie).

    아포칼립스(Apocalypse).

    꼬르륵…

    배꼽시계가 운다.

    식욕이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를 먹잇감으로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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