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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31화 (531/1,000)
  • 532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7)

    야릇한 햇볕 속, 암퇘지의 머리는 재미있다는 듯 씽긋 웃고 있었다.

    꾀는 파리도, 도려내어진 창자도, 막대기에 꽂혀 있다는 창피함조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투로.

    -윌리엄 골딩,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中-

    *       *       *

    나는 그때쯤 나타났다.

    그때가 언제냐고 하면, …음, 딱 이 알림음이 떴던 시점이랄까?

    -띠링!

    <대망자의 잔류사념이 사라져 갑니다>

    <잭 메리듀 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내가 속했던 거인 진영은 결국 패배했다.

    하지만 뭐, 사실 애초에 이 게임의 승패는 내 관심 밖이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나와 드레이크, 윤솔은 대망자가 일어나기 전까지 놈의 뒤통수 뒤에 붙어서 몸을 숨기고 있었고 대망자가 일어난 뒤에는 높게 솟구친 서릿발 오브젝트 뒤에 딱 붙어서 정황을 살피고 있었다.

    살인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으음, 평범한 5인 큐의 상황이군.”

    주로 낮은 티어의 구간대에서 저런 상황이 많이 벌어지곤 한다.

    드레이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흐음, 보아하니 저 잭이라는 녀석이 혼자 살아남겠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오히려 저 피기라는 친구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피기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어두운 마음을.

    그 증거로.

    윙윙윙윙윙윙윙-

    살점토막 구더기가 남기고 간 파리 몇 마리가 피기의 몸 근처를 끈덕지게 맴돌고 있다.

    너무 작은 파리들이어서 남들은 보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오로지 나만은 캐치해 낸 것이다.

    나는 뾰족한 얼음 고드름 위에 올라앉은 채로 두 팔을 쫙 벌렸다.

    “좋았어. 이제야 내가 그린 큰 그림이 틀을 잡아가는군.”

    원뢰(遠雷),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천둥과 비바람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나는 눈을 감고 얼음섬 바깥에 펼쳐지고 있을 모습을 떠올렸다.

    …쿠르릉! 콰쾅!

    휘몰아치는 밤하늘, 불길한 소용돌이를 그리는 먹구름들 사이로 내리꽂히는 낙뢰의 하얀 궤적.

    폭풍우가 휩쓸고 간 수면은 거칠게 갈아엎어지고 그 근방에 있던 모든 바다괴물들은 공포에 질려 물 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간다.

    비로소 대기는 역한 녹빛으로 물들고 차가운 북빙을 녹이는 후끈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두둑-

    하늘로부터 무언가가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바로 구더기! 수없이 많은 구더기들의 소나기!

    통통하게 살찐 이 작은 아귀(餓鬼)들이 먹구름 소용돌이 중앙에 뚫린 구멍으로부터 끝없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띠링!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가 무너집니다!>

    요란한 알림음과 함께.

    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

    잔뜩 흥분한 파리들의 텐션!

    피기의 몸을 휘감고 있는 파리들이 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

    …퍼억!

    붉은 피가 튀며, 피기가 잭을 죽였다. 때려죽였다.

    나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멍한 표정의 피기가 피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파리들이 그런 피기의 주변을 넘실거리며 기묘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철컥-

    파리들이 만들어 내는 기묘한 궤적을 눈으로 좇던 드레이크가 멍한 표정으로 쇠뇌에 화살을 먹였다.

    옆에 있던 윤솔이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드레이크 씨!”

    “…….”

    “드레이크 씨!”

    “……앗.”

    윤솔이 뺨을 한번 찰싹 때리고 나서야 드레이크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불현듯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순간 분위기에 휩쓸렸군. 큰일 날 뻔했어.”

    “……어진아, 이거 괜찮은 거야? 느낌이 이상한데. 파리들 움직임을 바라보다 보면 정신이 멍해져.”

    나는 윤솔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게임은 인간의 원초적인 부분까지 흔드는 악마의 놀잇감이다.

    특히나 이 게임에 깊이 몰입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정신을 놓게 될 가능성이 컸다.

    “파리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마. 현혹된다.”

    전문가가 아니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흐트려 놓는 기묘한 무늬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들어본 것 같다.

    아마도 저기 있는 저 불쾌한 벌레들은 그 궤적을 온몸으로 재현해 내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고인물답게 주변 파리들에게 신경을 완전히 꺼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윤솔이 신기하다는 듯 감탄한다.

    “와아… 어진아, 어떻게 그렇게 딱 보고 싶은 것만 잘 봐?”

    이거 칭찬이겠지? 욕 아니겠지?

    나는 무어라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휘이이이잉-

    차가운 북풍이 밀려나고 뜨뜻한 동풍이 불어온다.

    새롭게 밀려드는 기류에는 역한 악취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점점 이쪽을 향해 들이닥치는 역한 바람을 맞으며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비해. 이제부터 ‘진짜’가 온다.”

    *       *       *

    콰쾅! 콰콰콰쾅!

    섬이 무너진다.

    하지만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반만 무너졌다.

    얼음 광장의 천장이 주저앉으며 파도와 바람이 살이 와 닿았다.

    [오-오오오오오오!]

    살아남은 악마족 대망자가 꿇어 엎드리는 자세로 바닥에 납작 붙어 어딘가를 향해 절을 올렸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악마 대망자가 가라앉아 있던 녹색의 독액 늪이 끓으며 어마어마한 수의 구더기들이 땅 밑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늘에서도 엄청난 수의 구더기들이 쏟아져 내린다.

    온 세상을 뒤덮는 구더기들의 대홍수!

    피기는 피에 흠뻑 절은 채로 그 모든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

    순식간에 수북하게 쌓인 구더기들이 엄청난 기세로 번진다.

    통통하게 살찐 그것들은 마치 흰 파도처럼 범람해 얼음섬 위를 뒤덮었다.

    이윽고.

    구더기의 비와 역병 바람에 뒤덮인 얼음섬의 지형과 이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띠링!

    <히든 던전 ‘구더기 언덕’을 발견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고인물>

    나는 딱 구더기 언덕이 시작되는 초입에 걸터앉아 있었기에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최초 방문자 특전을 얻게 되었다.

    <구더기 언덕> -등급: ?

    등급 불명의 인스턴트 던전.

    하지만 이 던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이미 자명하다.

    [오-오오오오!]

    악마족 대망자가 두 팔을 벌려 계속해서 경배를 올린다.

    무려 A+급씩이나 되는 자연재해급 몬스터가 이렇게 압도적인 저자세로 나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이내 수없이 많은 구더기들의 악마족 대망자의 몸을 타올라 빽빽하게 뒤덮어 버렸다.

    한편.

    “…….”

    피기는 뒤집어지는 이 세계를 앞두고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현실 감각을 잊어버린 걸까?

    그는 이 순간에도 바닥에 뒹굴어 다니고 있는 옛 동료들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윙윙윙윙-

    구더기와 파리가 드글드글 꼬여든 시체.

    피기는 시체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했다.

    든든한 성격으로 모든 일을 리드했던 대장 랠프.

    괄괄하고 호전적이지만 성과는 확실했던 딜러 잭.

    늘 묵묵히 뒤에서 서포트를 해 주던 사이먼.

    과묵하고 듬직하게 팀의 방패가 되던 탱커 로저.

    하지만 지금 랠프는 꼬챙이에 꿰여 죽었다.

    잭은 머리통이 으깨져 죽었다.

    사이먼은 목이 잘려 죽었다.

    로저는 불에 타 죽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 쓸모없는 돼지, 아니 피기.

    피기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흩어진 잭의 머리 살점을 그러모았다.

    순간, 그는 따로 떨어져 놀던 잭의 두 눈알과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몰아치는 폭풍우 속, 잭의 머리는 재미있다는 듯 씽긋 웃고 있었다.

    꾀는 파리도, 박살난 두개골도, 바닥에 산산조각 나 있다는 창피함조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투로.

    “으아아아아아아아!”

    피기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머리를 네 등분하고 있는 뻘건 흉터가 더욱 깊게 벌어지며 핏물들이 뿜어져 나온다.

    그 모양은 정확히 거꾸로 뒤집어진 십자가를 그리고 있었다.

    동시에.

    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웽-

    이명(耳鳴)이 최고조에 이른다.

    피기의 절규가 뚝 멎었다.

    쩌어억-

    그리고 그의 머리를 가른 붉은 역십자가 완전히 쩍 벌어졌다.

    …꾸르륵! …꾸륵!

    그 상처 깊은 곳에서 핏물과 함께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펑! 소리와 함께 피기의 머리통을 부수고 허공으로 뛰쳐나온다.

    “……왔군.”

    나는 피기의 두개골을 부수고 그 안에서 소환된 거대한 것을 바라보았다.

    통통하게 살찐 배, 부숭부숭 돋아난 털, 시커먼 몸 곳곳에서 번쩍번쩍 뿜어져 나오는 역한 녹빛, 루비처럼 빨간 눈알.

    그것은 끔찍한 외형을 하고 있는 한 마리의 파리(Fly)였다!

    “안녕. 또 보네, 우리 구면이지?”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어색하게 흔들어 보였다.

    이 세상 모든 썩은 것들의 주인.

    부패와 역병의 관장자.

    윙윙거리는 것들의 왕.

    죽음 뒤의 우선권자.

    벌레의 정점(頂點).

    모든 병마와 그로 인해 파생된 죽음들까지 통틀어 관장하는 악마지존.

    ‘오염된 피 사건’의 주범으로서 한때 단신으로 온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초재앙급 몬스터.

    폭식(暴食)과 부패(腐敗)의 악마성좌 ‘벨제붑’, 그 이름도 두려운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그동안의 수많은 과정을 거슬러 마침내 오늘.

    나는 드디어 이놈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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