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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29화 (529/1,000)

530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5)

살인자 5인은 사태를 파악했다.

“좋아. 일반적인 AOS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랠프는 침착하게 미드 라인을 골랐다.

세 갈래로 갈라진 길.

이 너머에는 상대방의 본진인 좌파 군영, 거인족 해골병 광장이 있을 것이다.

랠프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우리는 다섯인데 길은 셋이야. 그렇다면 2, 2, 1로 찢어지게 되니 전력이 분산되지. 그러니 다섯이 한 길로 진격해서 빨리 상대방 진영의 핵을 소멸시키는 것이 낫겠어.”

그러자 잭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길도 좁은데 여기로 다섯 명이 다 가자고? 로저랑 나는 됐어. 바텀으로 가서 날뛰어 주지, 아니면 나 혼자 탑으로 가는 것도 괜찮고.”

랠프와 잭이 또다시 시선을 마주한다.

랠프는 잭의 멱살을 턱 잡고 으르렁거렸다.

“제발 그 입 좀 닥쳐 잭, 이 파티의 대장은 나야.”

“허?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냐?”

잭은 히죽 웃으며 랠프의 시선을 맞받는다.

쿠르르륵!

…스르릉!

랠프의 불꽃과 잭의 창이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때.

뚜우우우우-

또다시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좁은 얼음굴이라 그런지 더욱 더 크고 웅웅 울리는 소리.

피기가 소라껍데기에 입을 대고 힘껏 숨을 불어 넣고 있었다.

잭이 귀를 막고 이를 뿌득 갈았다.

“저 관종 돼지새끼가 이제 툭하면 소라를 불어제끼네?”

랠프 역시도 못마땅한 시선으로 피기를 돌아본다.

피기는 울상을 지은 채 말했다.

“저, 저기 얘들아. 내 말 좀 들어줘. 지금 여기서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잖아.”

“으음, 피기 말이 맞아. 일단 빨리 진격해서 고인물 파티를 처치하는 게 먼저지.”

사이먼 역시도 피기의 편에 서서 고개를 끄덕인다.

잭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이 새끼들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놀고 있어? 메인 딜러를 누가 할 건지 정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전략이 장난이야?”

하지만 잭의 분노는 랠프의 체념으로 마무리되었다.

“에휴, 메인 딜러는 그냥 네가 해라. 나는 서포트 할 테니까.”

랠프는 잭과 상종하기 싫다는 듯 온몸에 화염을 두르고 뒤로 가 버렸다.

잭은 울컥했지만 피기와 사이먼의 말대로 여기서 팀원과 좌충우돌 할 여유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쳇, 가자!”

잭은 로저를 데리고 중앙 대로로 진입했다.

랠프와 피기, 사이먼이 그런 잭의 후미를 따라갔다.

진격하는 동안 피기가 수줍은 표정으로 랠프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

랠프가 고개를 돌리자 피기가 말했다.

“저기, 랠프. 내 의견에 따라 줘서 고마워. 소라를 불길 잘했어.”

그러자 랠프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나는 네 말을 들은 게 아냐, 사이먼의 말을 들은 거지. 그 소라의 권위도 존중할 겸 말이야.”

말을 마친 랠프는 피기의 손을 탁 뿌리쳐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며 중얼거렸다.

“……피기(piggy:돼지) 주제에 어디서 맞먹으려고.”

랠프가 훌쩍 앞서나가고 나자 피기는 자연스레 뒤로 쳐지게 되었다.

춥고 어두운 정적이 피기를 잡아먹듯 감쌌다.

“헉!?”

얼마간 가만히 서서 말이 없던 그는 이내 자신이 일행들에 비해 많이 뒤처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헐레벌떡 앞으로 뛰어갔다.

…한편.

잭은 맨 앞에서 창을 든 채 마구 날뛰고 있었다.

“우하하하하! 여기도 경험치 꿀 사냥터구만! 미니언들은 무한대로 리젠되니 포션만 있다면 여기보다 더 좋은 사냥터가 없겠어!”

잭은 거인 해골병들을 마구 부수고 다니며 웃어 댔다.

그때.

“엇?”

중간 라인 앞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린다.

윤솔. 그녀가 살인자 다섯 명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다닥-

윤솔은 적들을 보자마자 겁먹은 표정으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헤헤헤, 사냥감이다! 저 암퇘지를 쫓아라! 죽여! 피를 쏟아내!”

잭은 창을 들고 윤솔의 뒤를 추격했다.

로저가 그 옆을 보조하고 있었다.

잭은 얼음굴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치고 있었다.

“죽여라!”

“목을 따라!”

“세게 때려라!”

잔뜩 흥분한 살인자들 목소리가 동굴 안에 천둥처럼 메아리치고 있었다.

잭은 창을 들고 윤솔의 뒤를 바짝 쫓았다.

“이년은 힐러야! 분명 약할 거다! 바로 죽여 버리자구! 목을 자른 뒤 고인물 그놈에게 보여 줄……!?”

하지만 잭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도망치던 윤솔이 순간 빙글 뒤돌아 잭에게 손을 확 뻗었기 때문이다.

힐러의 손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흉악한 손아귀를.

“…너 지금 나한테 암퇘지라고 했니?”

순간 뻗어오는 손가락 틈 사이로 잭은 보았다.

자신을 향해 차갑게 빛나는 무시무시한 눈초리를.

오싹-

잭은 그 찰나의 순간 몸을 떨었다.

전신을 뒤덮는 소름. 지금 그가 목격한 윤솔의 시선은 지금껏 그가 추격하며 본 사냥감의 겁에 질린 가련한 눈빛이 아니었다.

피식자(被食者)가 아닌 포식자(捕食者).

그 무엇보다도 강한 육식동물의 눈빛.

‘…지, 지금까지 쫓던 그 여자 맞아?’

저 흉악한 손아귀에 잡히면 생으로 찢겨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머리털이 쭈뼛하다.

“히이익!?”

잭은 그 자리에서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뒤로 나동그라졌다.

“…….”

한편, 윤솔은 바닥에 쓰러진 잭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없이 등을 돌렸다.

윤솔은 이내 다시 나는 듯한 발걸음으로 뒤돌아 도망친다.

아니, 도망친다기보다는 더러운 것을 피해 물러난다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말 그대로,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었으니까.

순간 잭의 얼굴이 분노로 확 뜨거워졌다.

‘말도 안 돼! 내가 쫄았다고!? 고인물도 아닌 저 고문관 년한테!?’

잭은 잽싸게 일어났다.

옆에서 주춤거리던 로저가 잭의 눈치를 본다.

“따라왓!”

잭은 아까의 굴욕을 애써 털어내고는 다시 창을 꼬나 쥐었다.

멀어졌던 후미의 랠프, 피기, 사이먼도 어느새 잭과 거리를 확 좁힌 상태였다.

랠프가 물었다.

“어이 메인 딜러님, 아까 앞서 가더니 왜 아직 여기에 있어?”

“…….”

랠프의 비꼬는 듯한 물음에 잭은 대답하지 못했다.

차마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애에게 쫄아서 뒤로 자빠졌다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       *

이윽고.

살인자 5인은 상대편 광장에 입성했다.

수많은 악마 해골병들이 달려들어 거인 해골병들을 도륙내고 있었다.

쿠르르륵!

랠프가 손을 뻗어 거대한 화염폭풍을 일으켰다.

화염에 닿은 거인 해골들은 화장터의 뼛가루처럼 부서져 빙판 위에 까끌까끌한 잿가루로 남았다.

잭과 로저는 각기 창과 건틀릿으로 거인 해골병들의 벽을 부순다.

사이먼은 그런 동료들에게 열심히 힐을 해 주었고 피기 역시도 자신의 펫인 돼지를 소환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분전 중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상대방은 어디에 있지?”

랠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주위를 살폈다.

고인물, 드레이크, 윤솔. 이 셋은 어디를 봐도 보이지 않는다.

고인물이나 드레이크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방금 전 마주쳤던 윤솔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잭은 황당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설마 탈주한 건가? 여기서 탈주하면 로그아웃 패널티가 있을 텐데? 멸칭 디버프도 걸릴 것이고.”

로그아웃을 했다면 허탈해진다.

하지만 로그아웃을 해도 육체는 얼마간 게임 속에 남게 되니 서두르면 놈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때.

뚜우우우우-

또다시 뱃고동 나팔 소리.

잭의 두 눈이 순간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거의 노이로제에 가까운 반응.

그가 고개를 홱 돌린 곳에는 피기가 쭈뼛거리는 태도로 서 있었다.

손에는 소라껍데기를 든 채로.

“내, 내 말을 들어줘! 뭔가 이, 이상해! 고인물 파티가 이렇게 무방비하게 당할 리가 없어! 분명 뭔가를 노리고 있는 거야! 우리는 디버프 각오하고 빠, 빨리 로그아웃하는 게 그나마 피해를 덜…….”

하지만 피기는 여전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이 돌아간 잭이 창대를 휘둘러 피기의 머리통을 후려갈긴 탓이다.

“제발 그만 나대, 이 돼지 새끼야! 네 찡찡대는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 같다고!”

잭은 귀에서 피가 나도록 손가락을 쑤셔 박았다.

“……?”

피기는 깨진 안경을 움켜쥔 채 고개를 들었다.

잭의 반응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때보다도 격했다.

“시끄러시끄러시끄러시끄러시끄러시끄러시끄러시끄러엇!”

그는 손가락 하나를 귀에 넣고 쑤시다가 이내 손가락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를 모두 쑤셔 넣고 휘젓기 시작했다.

피가 줄줄 흐르고 안에서 무언가 붉고 푸른 덩어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잭의 모습을 본 랠프, 피기, 로저와 사이먼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동시에, 그들에게도 잭에게 들리는 이명(耳鳴)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윙윙윙윙윙윙윙-

마치 수백억의 파리 떼가 모여 내는 듯한 불쾌하고 불길한 날갯짓 소리.

“끄아아아아아! 시끄러워어어어어어!”

잭은 귀 안에 든 것들을 뽑아내며 절규했다.

랠프가 그런 잭의 가슴을 확 밀쳤다.

“그, 그만해 잭! 사이먼! 빨리 잭에게 힐을 해 줘!”

그러나 잭은 랠프를 보고 눈을 희번뜩거린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 이 새끼야! 오냐오냐 해 주니 진짜 대장인 줄 알아!?”

“뭐라고? 이게 돌았나.”

랠프는 잭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평소대로라면 이쯤에서 혀를 차며 물러났을 잭의 반응은 달랐다.

화악-

격한 반응, 창날이 날아들었다.

랠프는 순간 고개를 틀어 잭의 창을 피했다.

창은 랠프의 뺨을 옅게 흩고 지나갔을 뿐이지만 분위기를 완전히 박살내 버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나마 실낱같이 이어지던 유대감마저도.

“……너 이 새끼. 이게 무슨 짓이야.”

랠프의 눈빛도 변했다.

그는 자기가 뿜어내는 화염만큼이나 뜨겁고 붉은 시선으로 잭을 노려보았다.

“큭큭큭큭. 대장인 체 꼰대짓 말라 이거야. 뒤지기 싫으면.”

“허어,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잭과 랠프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 와중에 모두의 귓가에 메아리치는 환청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

귀 속의 고막굴을 넘어 얼음굴 전체를 울리는 이명.

바로 그때.

그 이명을 끊어내는 소리가 한 번 더 있었다.

뚜우우우우-

다시 소라껍데기 나팔 소리.

피기가 깨진 안경알 너머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다, 다들 내 말 들어! 나는 말할 권리가 있어! 이 소라를 봐!”

소라고둥을 흔드는 피기.

하지만 그는 결국 이번에도 말을 끝맺는 데에 실패했다.

…퍽!

안경이 완전히 부서지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잭이 창끝으로 피기의 머리통을 한 번 더 후려갈긴 것이다.

이번에는 날붙이가 달린 방향이었다.

“너는 그냥 여기서 죽어라, 이 돼지 새끼야.”

잭은 시뻘건 눈초리로 피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뾰족한 창끝을 들어 피기를 겨누었다.

“…….”

랠프도, 로저도, 사이먼도 그런 잭을 막지 않았다.

무법천지, 범죄자들의 도시에서도 유일한 금기로 통했던 ‘팀킬’이 모두의 암묵적 합의 아래 자행되고 있었다.

이윽고, 잭의 창이 피기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뿌욱-

질긴 가죽 찢어지는 소리, 그리고 안의 부드러운 것들이 헤집어지는 소리.

붉은 피가 차가운 빙벽에 흩뿌려진다.

동시에 해골병들이 벌이는 광장 전투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신호가 들렸다.

-띠링!

<적진이 함락 직전입니다>

<전사들의 맹렬한 투지가 ‘칼바람 싸움터의 지배자’를 자극합니다>

<‘대망자(大亡者)’가 눈을 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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