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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28화 (528/1,000)

529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4)

-띠링!

<‘칼바람 싸움터 중립지대’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이야, 간만이네.”

나는 얼음굴 내부의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차갑게 부유하는 얼음 가루, 엉겁결에 물 밖으로 끌려나온 물고기들의 파닥거림, 빙벽 위에서도 자생할 정도로 생명력 질긴 물이끼들의 비린내, 바닥의 경사로를 따라 콸콸 흘러내려가는 바닷물…….

‘옛날엔 고인물 친구들끼리 여기서 참 대전 많이 했는데. 그 친구들은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아직 게임 시작도 안 했으려나?’

나는 회귀 전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며 얼음굴의 빙벽을 슬슬 쓰다듬었다.

드레이크 역시도 나름 추억을 회상하는 듯 얼음굴을 두리번거린다.

“그러고 보니 어진, 여기도 꽤 오랜만이군.”

“음? 아아, 그렇지. 저번에 여기에 왔을 때 내 레벨이 40이었으니까.”

현재 내 레벨은 무려 91이다. 아마 전 세계 그 누구와 비교해도 제일 높겠지.

나는 감개무량한 심경으로 얼음굴 안쪽으로 내려갔다.

쪼르르륵……

남자화장실에서 날 법한 물소리와 함께 바닷물 줄기들이 얼음바닥을 흘러내린다.

“으아, 험난하네.”

윤솔은 미끌거리는 얼음바닥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춥고 어두운 얼음굴 바닥에는 바닷물이 흐르고 있어 미끄러웠고 또 워낙에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해서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얼음벽, 천장 곳곳에 얼음 고드름들이 툭툭 튀어나와 있어서 까딱 잘못하면 이마에 혹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웃을 뿐이다.

“예전에 드레이크도 그 말 했었는데.”

“으흠. 어진. 자꾸 뉴비 취급 마라. 나 정도면 이제 어엿한 고인물 아닌가.”

“오호, 드레이크 씨도 저 같은 시절이 있었군요? 이거 새로운걸.”

나와 드레이크, 윤솔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던전 깊은 곳으로 향한다.

이윽고 횃불 빛이 번지는 정면에 내가 원하던 광경이 보인다.

왼쪽 길, 오른쪽 길.

양 갈래 선택지가 떴다.

“어진, 어디로 가야 하나?”

드레이크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게 물었다.

나는 주저 없이 좌측 길을 골랐다.

“우리는 이번에도 거인의 편에 선다. 나중에 거인국 갔을 때 잘 보이려면 꾸준히 밑 작업을 해 둬야지.”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거인국 떡밥도 좀 흘려 주고!

하지만 드레이크와 윤솔은 앞을 살피는 데 집중하느라 내 말을 못 들은 것 같다.

…아쉽지만 설명은 다음 기회에 해 주는 수밖에.

한편, 윤솔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우측이 아니라 좌측으로 오면 어떻게 해? 양쪽으로 사람이 골고루 퍼져야 하는 것 아냐?”

“오, 그거라면 다 방법이 있다. 예전에 어진이 썼던 방법인데…….”

이번에는 드레이크가 나섰다.

그는 허리춤의 포션 병을 들고 바닥에 굴리려 했다.

예전에 내가 유다희를 낚을 때 썼던 방법을 쓰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드레이크를 만류했다.

“아냐. 그건 좀 똑똑한 적에게나 통하는 방법이고. 이번에 우리를 추격해 오는 놈들은 예전 추격자들과는 달리 머리가 좀 나쁠 거야. 복잡한 생각은 할 줄 모르는 놈들 같으니 포션 전략은 관두자고.”

“그러면?”

드레이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새끼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아예 왼쪽 길로는 발도 못 들이게 해 주려고.”

*       *       *

한편.

랠프, 잭, 피기, 사이먼, 로저, 살인자 5인 파티 역시도 얼음굴 양 갈래길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애초에 선택권이 없었다.

“우욱!? 이게 뭐야!”

랠프는 눈앞에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검록색 안개에 경악했다.

쉬이이이익-

좌측 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지독한 독안개였다.

마치 그들에게 우측 길로 가라고 강요하는 듯한 광경.

“빌어먹을,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랠프는 팀을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독을 뚫고 전진하느냐, 아니면 쉽게 우측 길로 피해 가느냐.

쿠르르륵!

랠프는 한 손에 거대한 화염 줄기를 만들어 내 전방의 독을 태워 버렸다.

불길에 닿은 독안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그라든다.

지글지글지글지글……

사멸한 독안개는 밀폐되고 더운 곳에 방치된 시체처럼 지독한 냄새를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러나 독을 불로 태우고 나면 저 안쪽 동굴 깊숙한 곳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독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랠프는 이를 갈았다.

“젠장. 이 독들을 전부 태워 버리면서 앞으로 가려면 마나 소모가 막대하겠는데? 악취도 너무 심하고.”

살인자 5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뿌우우우-

얼음굴 안에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좁은 공간이라서 더욱 더 크게 울리는 소리.

“젠장! 이 돼지새끼가 진짜 돌았나!? 뭐 하는 거야!”

잭이 성큼성큼 걸어가 소라껍데기에 입을 대고 있는 피기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그러자 피기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고인물 그 사람 방송 종종 보는데… 고인물의 공격 패턴 중 하나가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는 주변에 뿌리는 거야. 어떤 몬스터의 독인지는 모르겠는데 무지 독하더라고. 어지간한 A급 몬스터들도 모두 괴로워하는 것으로 봐선…….”

그 말에 로저와 사이먼도 미간을 찌푸렸다.

랠프는 피기가 들고 있는 소라껍데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건데? 소라껍데기를 분 이유가 있겠지?”

독을 뚫고 좌측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우측으로 돌아갈 것이냐.

하지만 피기는 전혀 다른 선택지를 내놓았다.

“내 제안은 지금 당장 우리들 모두 돌아가서 다시 배에 타고 본토로 돌아가는 거야.”

그 말에 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피기. 그건 안 돼.”

랠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저와 사이먼 역시도 고개를 끄덕여 같은 의견을 표했다.

하지만 피기는 소라껍데기를 꼭 끌어안은 채 고집을 부렸다.

“느낌이 정말 이상해. 고인물 저 사람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머이자 스트리머야. 다들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잊었어? E스포츠 최강국이라고! 날고 기는 게임방송 스트리머들이 득실득실하단 말야! 그런 곳에서 짱먹는 탑 티어 랭커가 뭐가 무섭다고 우리에게서 자꾸 도망치겠어!? 분명 무슨 꿍꿍이가……!”

그러나 피기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잭 메리듀, 그가 손바닥을 들어 피기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기 때문이다.

땅그랑!

피기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안경이 고드름에 맞아 깨졌다.

잭은 바닥을 나뒹구는 피기를 경멸의 시선으로 깔아 보며 말했다.

“지랄 좀 하지 마, 돼지야.”

“…….”

“뭐가 그리 불만이길래 계속 찡찡거리는 거야? 고인물? 저 알몸 변태가 뭐가 무서워? 기껏해야 운 좀 좋은 놈일 뿐이야. 저능한 몬스터 상대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것밖에 못하는 얍삽한 얼간이라고. 막상 상태창 까서 보면 레벨도 한 50이나 될까 말까일 거다.”

“…….”

“반면 우리는 PVP를 통해 단련된 숙련자들이야. 이런 진흙탕 싸움에는 도가 텄지. 그리고 나와 랠프는 레벨이 무려 40대란 말이야. 예전 그레이 시티에서는 기습을 당한 것이라서 어쩔 수 없었지만… 랠프와 내가 마음먹고 둘이 힘을 합치면 고인물 저놈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발라 버릴 수 있어.”

“…….”

“그리고 고인물, 저 자식이 네 말대로 그렇게 대단한 실력자라면 진작에 프로로 데뷔했겠지. 몬스터만 잡아 본 샌님이라 플레이어들과의 싸움은 그다지 경험이 별로 없을걸? 그러니 무서워서 저렇게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것 아니겠냐? 그레이 시티 때야 뭐 좀 당황해서 진 거고.”

잭은 피기를 향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랠프 역시 잭의 의견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잭은 다시 한번 말했다.

“너는 못 돌아가. 네가 돌아가 버리면 우리가 돌아갈 배가 없어지잖아. 그러니 닥치고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 아무도 너 같은 놈한테 1인분 안 바라니까 발목만 잡지 말라 이거야.”

피기는 결국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파티에서는 그가 제일 레벨이 낮았기 때문이다.

“흥.”

잭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피기에게서 시선을 뗐다.

랠프와 잭은 간만에 의견이 맞았다는 듯 좌측 길을 유심히 바라본다.

“이 독의 벽을 뚫고 가는 것은 좀 어렵겠어. 정말 이쪽으로 못 오게 하겠다는 필사적인 의지가 느껴진다고.”

“그만큼 놈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이겠지. 뭐 좋아, 오른쪽으로 가서 정정당당하게 놈들을 사냥하는 것도 재밌겠군. 어차피 이 아래에서 만날 테니까.”

살인자들은 결국 우측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밑에서 벌어질 해골병들의 싸움에 참전해 사냥감을 잡을 계획이었다.

이윽고.

얼음굴을 타 내려온 살인자들은 예상했던 알림음을 들을 수 있었다.

-띠링!

<‘칼바람 싸움터 우파 군영’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YOUdie’>

익숙한 이름을 들은 살인자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잭이 씹어 내뱉듯 중얼거린다.

“유다희, 그 망할 년이 이곳의 최초 발견자였나. 나중에 반드시 복수해 주겠어.”

그때.

우지직- 우지직- 우지직-

드넓은 광장 끝에서 수많은 해골병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악마의 형상을 한 수많은 뼈다귀 괴물들이 느릿한 동작으로 일어나 대열을 이룬다.

-띠링!

<‘칼바람 싸움터 양 군영’에 모든 필요 인원이 충족되었습니다>

<‘칼바람 싸움터 양 군영’의 전사들이 눈을 뜹니다>

살인자들은 직접 겪는 이 상황에 놀라 허겁지겁 얼음벽에 붙어 광장 외곽으로 숨었다.

-띠링!

<미니언들이 생성됩니다>

이윽고 시커먼 마기를 내뿜는 해골 악마들이 뿔과 이빨을 들이밀고 라인을 따라 전진하기 시작했다.

<악마 해골병> -등급: B / 특성: 악마, 어둠, 언데드, 하수인.

-서식지: 칼바람 싸움터 우파 군영, 거인국

-크기: 5m.

-죽은 악마가 뼈만 남아 되살아났다. 그는 영원히 싸움터를 누빌 운명이다.

그 모습을 본 잭은 신이 나 외쳤다.

“이봐! 우리도 가자! 지금쯤 덜덜 떨고 있을 변태 놈이랑 재수 없는 활잡이, 고문관 여자를 찾아내 박살 내 주자고!”

대장인 랠프가 제일 먼저 앞장섰다.

잭이 질세라 뒤를 따랐고 로저와 사이먼이 그 뒤를 맡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쭈뼛거리는 피기가 맨 뒤에 있었다.

윙윙윙윙윙-

불길한 이명(耳鳴)이 피기의 귓속을 둥그렇게 핥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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