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3)
거대한 유빙들이 둥둥 떠다니는 연안의 만(灣).
음울한 분위기의 물안개 사이로 1천 톤 규모의 거대한 선박이 보인다.
유령처럼 나부끼는 돛, 성벽처럼 견고한 선체에 해골의 눈처럼 뻥 뚫린 창문들.
나는 눈앞에 있는 ‘악마의 만찬’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보네.”
한때 유저들에게 있어 ‘세상의 끝’으로 통하는 이곳.
바다 너머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유저들이 함선 앞에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배를 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모양새.
나는 그 무리 중 제일 앞에 있는 사람에게 주목했다.
“……어라?”
낯익은 얼굴, 그녀는 일본의 최고수 중 하나인 ‘아키사다 아야카’였다.
나에게 오염된 피 사건을 최초 제보했던 고마운 목격자.
‘그러고 보니 길드원들이랑 함께 심해 탐험을 할 계획이라고 했었지. 여기서 보네.’
그러나. 미안하지만 이 배를 타는 것은 내가 먼저다.
타타탁-
나는 빙판 위를 달려 배에 다가갔다.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닻줄이 빙벽에 단단히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우-우우우……
가까이 다가가자 낮고 무거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배 자체가 우는 것 같은 광경.
“어엇?”
배를 탈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아키사다 아야카와 그녀의 길드원들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내 모습에 당황했다.
이내 내 앞으로 NPC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의 만찬’ 호 선장 치 카이>
뼈와 가죽만 남아 있는 장신의 여해적이 나를 향해 검은 눈을 치떴다.
[…승객인가? 뱃삯이라면 삼천오백만 골드야.]
어라? 예전보다 뱃삯이 좀 더 비싸진 것 같은데?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치 카이는 따개비 디글디글한 입가를 비틀며 씩 웃었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했지.]
세상에 어느 세계관 물가가 이렇게 빨리 오른다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바로 뱃삯을 지불했다.
“세 명분.”
[오케이. 시원시원하구만.]
치 카이와의 거래가 완료되었다.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바로 악마의 만찬 호에 탑승했다.
“아앗, 우리가 먼저 타려 했는데…….”
아키사다 아야카는 울상을 지으며 우리가 탄 난간을 올려다본다.
갑작스럽게 오른 뱃삯 때문에 팀원들끼리 회의를 하다가 나에게 배를 빼앗긴 모양.
그때.
“비켜! 비키라고 이 칭챙춍들아!”
잭을 비롯한 살인자 5인이 연안에 도착했다.
그들은 아키사다 아야카와 그녀의 길드원들을 무시하고는 바로 배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오? 빨리도 따라붙었네. 조금 서둘러야겠는데.”
나는 치 카이에게 말했다.
“지금 탑승수속 밟을게.”
[좋을 대로. 돈은 받았는데… 자리는 몇 등석으로 드릴까?]
“3등석으로.”
나는 바로 배에 타기로 했다.
우리가 줄사다리를 기어올라 배 위에 올랐을 때쯤 살인자 5인이 치 카이에게 도착했다.
놈들은 복수와 탐욕에 눈이 멀어 곧장 뱃삯을 지불했다.
범죄자들이라서 그런가 가지고 다니는 현금이 많은 모양이다.
치 카이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으로는 2등석까지야. 1등석에 타려면 필요한 물건이 따로 있는데…….]
치 카이는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그러자.
-띠링!
무리의 대장인 랠프의 머리 위에 느낌표 표시가 떴다.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심해의 악몽’ 002-해적들은 오랜 항해로 치아가 약해져 있습니다>
치 카이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내가 요즘 이가 시려서 당최 닻줄을 끊을 수가 없어. 괜찮다면 틀니로 쓸 만한 이빨을 좀 구해다 주겠어?]
정해진 대사. 정해진 퀘스트.
그때.
“아앗! 우리 퀘스트 아이템 있잖아!?”
잭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피기를 가리켰다.
피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벤토리에서 서리이빨 상어의 이빨을 꺼내들었다.
가죽자루에 담겨 있는 이빨의 수는 정확히 28개, 치 카이가 요구한 숫자와 딱 들어맞았다.
[…호오.]
치 카이는 기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피기의 손에서 서리이빨 28개를 받아들고는 그것을 하나하나 자신의 잇몸에 박아 넣었다.
…딱! …딱!
날카로운 칼이빨로 잇몸을 가득 채운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씩 웃어 보였다.
[좋다. 1등석을 내주지.]
“됐어!”
잭은 쾌재를 불렀다.
이내.
-띠링!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심해의 악몽’ 002-해적들은 오랜 항해로 치아가 약해져 있습니다. (틀니 1/1)>
히든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알림음과 함께.
드르르륵-
얼어서 딱딱한 줄사다리가 내려온다.
다섯 명의 살인자들은 배의 난간이 아니라 선채 중간 부분에 연결된 줄사다리로 올라갔다.
그곳은 갑판이 아니라 어창(魚艙)으로 연결된 부분이었다.
비린내 가득한 생선창고, 안에는 꽁꽁 얼어붙은 바다괴물들이 즐비하다.
십수미터가 넘어가는 바다뱀, 수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참치, 육중한 바다게 등이 창고 구석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딱딱하게 얼어 죽어 있었다.
랠프는 침착하게 말했다.
“유뷰튜에서 보니까 이 어창이 1등석인 이유가 있었어.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하더군. 갑판에 있으면 무시무시한 바다괴물이 나와서 제물을 요구한다고 하더라.”
“그, 그럼 고인물 그 자식들은 3등석인 갑판으로 갔으니 바다괴물들과 싸우게 되겠네?”
“아마도 그렇겠지. 우리는 앉아서 놈들이 고전하는 것을 보고만 있으면 돼.”
랠프는 피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하지만 사이먼의 의견은 회의적이었다.
“으음. 그런데 어창이 안전하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스트리머가 지금 저 바깥에 있는 고인물인 것으로 아는데. 저 녀석들은 왜 어창으로 안 오고 갑판으로 갔을까?”
“바보야, 그것도 모르냐? 저 자식들 우리에게서 도망치다가 퀘스트 아이템을 떨궜잖아!”
잭이 사이먼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눈을 빛냈다.
“분명 놈들은 어창에 타려고 했다가 그 멍청한 년이 퀘스트 아이템을 흘리는 바람에 못 탄 게 틀림없어. 윤솔이랬나? 큭큭큭, 어느 파티에나 고문관은 하나쯤 있는 법이니까. 바로 이 돼지새끼처럼.”
잭은 옆에 있는 피기를 흘겨보며 말했다.
랠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다. 놈들은 부상을 입었고 우리를 상대하기 부담스러워 이 배로 피신한 거야. 치 카이에게 퀘스트 아이템을 바쳐 안전한 곳을 확보하고 우리의 추격을 피할 계획이었겠지. 만약 우리가 끝까지 추격해 온다고 한다면 우리를 갑판으로 유인해 바다괴물들의 습격을 받게 해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거야. 하지만 퀘스트 아이템을 흘리는 바람에 급한 대로 갑판으로 튄 것이고.”
그럴듯한 추리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잭이 낄낄 웃었다.
“그렇다면 놈들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로군. 우리를 갑판에 고립시켜 바다괴물들의 밥을 만들려고 했다고? 어림없는 소리. 제놈들이 이제 바다괴물들의 밥이 될 거야. 가뜩이나 살점토막 구더기를 상대하며 부상당한 놈들이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 광경을 즐겁게 구경하면 되는 일이지.”
아니나 다를까.
배가 출항하고 난 뒤 바다괴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차 웨이브 시작이다!]
키를 쥐고 있는 치 카이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쿵-
거대한 충격과 함께.
끼-기기기기긱!
배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부서지는 파도 속.
촤아아아아아악!
기울어진 배의 난간을 잡고 수많은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한편.
나는 갑판 위에서 바다괴물들과 열심히 싸웠다.
“으아아앗! 너무 쎄다! 못 이기겠어!”
당장 죽을 것처럼 엄살을 부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드레이크와 윤솔 역시도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었다.
“드레이크 씨, 어디 다친 데 없어요?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으으. 아까 그 구더기에게 입은 피해가 너무 컸어!”
하지만 사실 악마의 만찬 호를 습격해 오는 바다괴물들의 난이도는 너무 낮아서 하품이 나올 정도다.
<악마손 오징어> -등급: B / 특성: 물, 심해, 무한성장, 고생물
-크기: 18~?m.
-서식지: 바다 전역
-‘가혹한 바다’에 온 당신은 바다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심해라. 그 잔잔한 수면 바로 아래에는 당신을 깊은 심해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괴물들이 득실거린다.
이 악마손 오징어가 바로 그렇다.
<둔클레테> -등급: A / 특성: 물, 심해, 무한성장, 고생물
-크기: 20~?m.
-서식지: 바다 전역
-5억 년 전부터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은 고대의 판피어(板皮魚).
원래는 심해 깊숙한 곳에 살고 있었는데 어떤 영문인지 수면 근처로 올라와 오가는 상선이나 해적선을 습격하곤 한다.
단단한 외피에는 물리적 충격이 먹혀들지 않으며 무시무시한 턱은 배도 통째로 깨물어 부순다.
크고 흉악하게 생긴데다가 동급 몬스터에 비해 강력한 스탯을 보유하고 있는 북대륙의 바다괴물들.
그러나 그동안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나와 동료들에게는 그저 잡몹에 불과하다.
지금 이런 잡몹들에게 고전하는 척을 하고 있는 이유는 어창에서 우리들을 훔쳐보고 있을 살인자 다섯 명을 방심시켜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퍼-엉!
배의 난간을 부수며 거대한 파도 한 자락이 밀려들었다.
…철썩! 촤아아아악-
스산하게 끼는 물안개와 한층 더 거칠어진 바다.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느낌의 페이즈가 왔다.
“조심해. 저 녀석만큼은 조금 위험하거든.”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경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하게 부풀어 오르던 물무리가 걷히고 그 안에서 이 구역의 필드보스가 튀어나왔다.
도려내어진 눈꺼풀 밑으로 드러난 탁하고 퀭한 눈알.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한 시선.
뚝- 뚝- 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놈이 갑판 위로 올라오자 생선 썩는 냄새와 비린내가 바다 전체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심해마귀(深海魔鬼) ‘씨어데블’> -등급: A+ / 특성: 물, 심해, 마찰계수, 도장 깨기, 풍랑(風浪)
-서식지: 가혹한 바다, 블루홀
-크기: 2.5m.
-원념을 가진 익사체가 심해의 저주를 받아 두 번째 목숨을 얻었다.
심해에 서식하는 강력한 몬스터들을 찾아가 싸우며 더욱 강한 육체로 진화해 왔다.
놈이 심해에 둥지를 튼 이후 많은 심해 괴물들이 수면 위로 도망쳐 온다고 한다.
“오랜만이야.”
나는 씨어데블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놈을 쓰러트리고 얻은 심해 특성과 신발 아이템은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주세요.]
씨어데블은 여전히 프로그래밍대로의 대사를 읊는다.
예전에는 저 대사가 참 섬뜩하다고 생각했지만…….
[제물 주섹……억!?]
지금은 아니다.
짜-악!
나는 잿가루를 잔뜩 묻힌 손으로 성큼성큼 나아가 씨어데블의 뺨싸대기를 후려갈겼다.
“추억이네. 예전에는 도트 하나처럼 작은 암초 위에 올라가서 겨우겨우 잡았던 몬스터인데…….”
지금은 그냥 깡딜로도 충분하다.
가뜩이나 물리방어력이 약한 씨어데블은 마몬의 근력이 깃든 내 오른팔에 맞아 금세 격침되었다.
“여기 몹들이 잡기 어려워서 그렇지 은근 경험치랑 아이템 보상이 쏠쏠하단 말이지?”
나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내며 얻은 잡템들을 전부 경매장에 올려 즉석으로 팔아 버렸다.
민첩 옵션이 붙은 것들은 따로 빼 놓고 말이다.
이윽고.
-띠링!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에 도착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기다리던 메시지가 떴다.
배의 난간 너머로 수정같이 투명한 얼음산이 보인다.
눈 수북이 덮인 꼭대기들마다 별빛이 기이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작은 섬나라로 보일 만큼 거대한 한 조각의 유빙(遊氷)!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에 도착한 것이다.
“자, 들어가자고.”
항해가 끝나는 즉시 나는 배를 벗어나 거대한 유빙의 위로 착지했다.
드레이크와 윤솔이 그런 내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동시에, 나는 이제 막 어창에서 뽈뽈뽈 기어 나오는 살인자 5인을 도발했다.
“카르마 밑에서 굽실거리던 멍청이들이라 그런가 구더기에게도 굽실거리는군. 세상에 몬스터 밑에서 따까리 짓하는 플레이어는 처음 봤다, 등신들아!”
그 말이 살인자 다섯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다.
“저, 저, 저, 개새끼 저거!”
잭을 비롯한 모두가 눈이 뒤집어진 채로 나를 따라 달려왔다.
늘 수줍게 맨 뒤로 처져 있던 안경 뚱땡이 역시도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뒤로 잽싸게 물러나는 나를 보며 드레이크가 엄지손가락을 척 세웠다.
“역시. 개빡치게 깐족거리는 것은 네가 제일이다 어진.”
“뭐, 다 생계형 깐족이지. 자 얼음굴 안으로 들어가자고.”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를 데리고 마트료시카의 심장부로 향하는 깊은 얼음굴로 다이브했다.
그때, 윤솔이 나에게 물었다.
“저, 근데 어진아. 우리는 그렇다 치고, 저 범죄자들은 왜 이쪽으로 유인하는 거야?”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저놈들은 제물이 될 테니까.”
“……제물?”
“주세요?”
윤솔도 드레이크도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만났던 몬스터 ‘대망자’ 기억하지?”
드레이크는 직접 겪어 봤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윤솔 역시도 내가 몇 번인가 유튜뷰 영상을 보여 줬기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짧게 말했다.
“그 대망자들의 특성 중에 ‘하수인’이 있었던 것 기억해?”
‘하수인’ 특성.
그것은 이 특성을 가진 몬스터가 더욱 더 강한 상위종 몬스터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그 대망자들의 ‘주인’을 만날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