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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26화 (526/1,000)
  • 527화 오염된 피 (9)

    저 멀리서 덜렁덜렁 달려오는 고인물.

    정황 상 그가 살점토막 구더기를 죽이고 오염된 피 디버프를 없애 버린 것이 분명하다.

    “어엇!? 저, 저 자식이 또!?”

    잭의 눈이 뒤집어졌다.

    동시에 랠프와 피기, 사이먼, 로저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난날 그레이 시티에서의 악몽이 스멀스멀 되살아나고 있었다.

    *       *       *

    고인물.

    그는 그레이 시티에 처음 오자마자 말썽을 일으켰다.

    그레이 시티에서 가장 질이 안 좋기로 소문난 범죄자 NPC들을 마구 구타한 것이다.

    “머~어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머~어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바아아알. 머리! 어깨! 바알~ 무릎, 발. 머~어리, 어깨, 무릎, 귀, 코, 귀.”

    [끄악! 끄어어억! 그, 그만, 제발!]

    “이곳이 목심. 근육막 사이에 지방이 적당히 박혀 있어 풍미가 좋지. 다음은 등심. 가장 연하고 지방이 적어 담백한 부위야. 계속해서 몸으로 알려 주지. 여기는 채끝, 치마, 부채, 우둔, 양지, 차돌박이……!”

    [주, 죽는다! 진짜 죽을 것 같다고!]

    “안심해.”

    [엇, 어어? 사, 살려 주시는…?]

    “육질이 부드럽고, 지방이 거의 없는데다가 수율이 적어 매우 귀한 안심으로 하겠다고.”

    고인물의 아무말 대잔치에 범죄자 NPC의 눈이 하얗게 까뒤집어졌다.

    보다 못한 그의 동료가 그 사이를 난입했다.

    [너 이 자식! 내 동료를!]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보군.”

    따-악

    “운동량이 많은 부위라 결이 거칠고 지방이 적어 주로 국거리로 이용되는 부위. 그곳이 사태다. 어때 이제 파악이 되나?”

    그에게 맞은 녀석의 사태가 팽팽히 부어올랐다.

    범죄자 NPC는 비명을 지르며 추하게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으아아아! 이 변태 새끼! 뭐 이렇게 변태적으로 세!?]

    “그만하지? 너희들 공격은 뻔히 다 보여.”

    [으윽…….]

    “말하자면, 전지적 정육 시점이랄까?”

    빠-악

    고인물의 등 뒤를 덮치던 NPC의 손이 뒤로 제껴졌다.

    [끄아아아악! 내 손!]

    “어때? 짙은 육색, 진한 육향, 풍부한 육즙으로 인해 고기의 식감을 즐기기 딱 좋은 부위. 그곳이 바로 전지다.”

    [으으으…전지…적……이란 말은……그런 뜻이…….]

    “어허!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고 기절해야지.”

    .

    .

    .

    그때 고인물에게 당한 NPC들은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그리고 놈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놈이 아끼는 듯한 꼬마 NPC에게 다가가 복수를 할 계획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한 꼬마를 발견했다.

    분명 놈이 매우 아끼는 듯한 꼬마 NPC였다.

    [좋아……. 저 녀석으로 하자고.]

    그들은 고인물이 자리를 비운 틈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놈이 자리를 비운 순간! 그들은 꼬마에게로 쇄도했다.

    [어서 유괴해!]

    [자루 준비됐다, 덮쳐!]

    [로스차일드(Lose child) 작전이다앗!]

    그러나.

    “쓰레기는 영어로 갈비지(Garbage)!”

    갈비뼈를 부수는 유다희의 주먹에 의해 그들의 야욕은 좌절되었다.

    [크학!?]

    [뭐해, 덮쳐! 적은 고작 한 명이다!]

    “우둔한 것들. 이거나 받아라! 우둔살!”

    [크학!? 어떻게 그런 후진 장비로 이런 힘이!?]

    “후지기 짝이 없는 장비라도 기본 스탯이 높으면 가능하지. 후지살!”

    [케헥! 아이고 나 죽네! 아파서 모, 못 살겠다.]

    “이얍! 목살!”

    [아니, 목이 아니라 못이라고 못!]

    이쯤 되자 NPC들은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쯤 해서.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 마피아들의 버스터 콜’>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그레이 시티 범죄자들의 호각 소리를 들을 것>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그레이 시티의 분탕종자 ‘YOUdie’ 제거>

    <※사람을 한 명 이상 죽여 본 자만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 시티의 범죄자들과 유대 관계가 일정 수치 이상이 되어야만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 시티 전체에 히든 퀘스트가 발부되었다.

    잭 메리듀 역시 이 히든 퀘스트를 발견한 카르마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헤헤, 돌발 퀘스트인가? 이 동네는 나쁜 짓만 해도 경험치가 올라서 좋아.”

    NPC, 플레이어 가릴 것 없이 온갖 껄렁한 놈들은 죄다 모여든다.

    “‘YOUdie’? 이거 그 게임 스트리머 아이디 아냐?”

    “이름이 유다희랬나? 킥킥킥, 예뻐서 언제 한번 같이 놀아 보고 싶긴 했는데.”

    “감히 겁도 없이 우리를 상대로 PK라니.”

    “고이다 못해 썩은물이 된 우리를 상대로 말이야. 큭큭큭.”

    과연, 잭을 위시한 다른 살인자들이 모여들자 유다희는 조금 부담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많은 카르마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잭은 낄낄 웃으며 유다희에게 경고했다.

    “이봐. 우리는 하도 범죄를 많이 저질러서 모든 마을에서 추방된 존재들이야. 감당할 수 있겠어? 네년이 게임 접을 때까지 스토킹하면서 죽이고 또 죽여 버리는 수가 있다고. 보복이 두렵지 않……?”

    그러나.

    잭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킁킁. 어, 뭐야 이 귀요미들은?”

    고인물. 이 미친놈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헉!?”

    놈의 등장에 모든 살인자들이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났다.

    미친놈이 피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미친놈.

    미친놈은 미친놈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 중에서 더욱 더 심하게 미친놈은 미친놈도 피하는 법이다.

    “뉴비 냄새. 파릇파릇한 뎀린이들이잖아? 헤헤…에헤헤헤헤헤.”

    그 와중에 대사도 미쳤다.

    세상 누가 감히 자신들을 어린이 꼬꼬마 취급한단 말인가?

    하지만 고인물, 저 놈의 눈을 보면 정말로 자신들을 귀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나 귀여워 미쳐 버리겠다는 듯한, 저 맛이 가 버린 눈알!

    그 시선 앞에 잭을 포함한 모든 살인자들은 제 자리에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잭은 창날을 핥던 것을 멈추고 슬그머니 열중쉬엇 자세를 취했다.

    이유 없이 킥킥 웃던 이는 급정색을 하고 시선을 45도 아래로 떨궜다.

    왼손에 흑염룡을 불러내던 이는 슬며시 왼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휘파람을 분다.

    짝다리를 짚고 있던 이는 바르게 섰다.

    소매를 말아올려 민소매를 만들었던 이는 다시 소매를 내려 긴팔을 만든다.

    옷깃 카라를 한껏 풀어헤치고 있던 이는 단추를 조신하게 여몄다.

    그 외 불량배, 정신병자, 망나니, 살인귀 코스프레를 하던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허둥지둥 정상인으로 돌아왔다.

    제일 미친놈 하나가 등판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고인물은 그들을 쉽게 놓아 주지 않았다.

    “못 가. 히히. 형아랑 깎단 놀이 하자. 나는 찌르고, 너는 도망가고.”

    순간, 고인물의 시선과 마주한 모든 살인자들의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타올랐다.

    푹! 푸푹! 뿍! 뿌욱!

    이윽고 시작된 대학살 쇼!

    잭은 기겁을 하며 도망쳤지만 고인물이 휘두르는 투박한 송곳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시궁창에 처박힌 잭은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오물을 맛보며 천천히 죽어갔다.

    그리고 그 위로 고인물, 저 미친놈의 공포스러운 시선이 떨어져 내린다.

    “……부디 또 봐. 나도 이 도시에 한동안 머무를 생각이니까.”

    놈은 웃고 있었다.

    *       *       *

    부들부들부들……

    잭은 사시나무 떨 듯 바들거리고 있었다.

    뭉개진 자존심. 그래도 나름 그레이 시티에서는 알아 주는 고렙이었던 그다.

    자그마치 세 개의 골목을 관리하며 관리비를 받고 주변 상권 NPC들의 접대를 받으며 왕처럼 군림하던 몸.

    그러나 그날 잭은 철저한 한 마리 초식동물, 가젤이나 토끼만도 못한 피식자였다.

    그 굴욕, 그리고 공포! 그리고 굴욕을 겪어 놓고도 공포를 느낀다는 것에서 오는 2차 굴욕!

    “으아아아아아!”

    결국 잭은 떨리는 손으로 창을 쥐었다.

    그날의 복수를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잭의 분노가 전해졌음일까?

    고인물은 잭의 얼굴을 한번 흘끗 보더니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잭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저놈이 왜 나를 보고 도망가지?

    이내, 잭은 직감했다.

    ‘뭔가가 있다!’

    분명 저놈들은 살점토막 구더기를 사냥하면서 뭔가 약점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도망치는 것이겠지.

    사자나 상어 등의 최상위 포식자는 등을 보이는 적을 무조건 추격하는 습성이 있다.

    잭 메리듀 역시도 이와 비슷했다.

    “하핫! 서라! 이 자식, 내가 무섭냐!?”

    잭은 전에 겪었던 굴욕감을 씻어 버리기 위해 평소보다 더욱 더 오버했다.

    그는 마치 돼지를 쫒는 야만전사처럼 창을 쥐고 고인물을 향해 뛰쳐나갔다.

    …아니, 뛰쳐나가려 했다.

    뚜우우우-

    그를 막아 세운 것은 소라껍데기 나팔 소리였다.

    “잠깐만 잭! 뭔가 이상해!”

    잭을 만류한 이는 바로 피기였다.

    피기는 겁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상해. 그레이 시티에서 봤잖아. 저 알몸 변태는 진짜 쎄다고. 근데 왜 우리를 보고 도망가지?”

    “뭐라는 거야 이 돼지 새끼야! 구더기를 상대하다가 뭔가 상처를 입었나 보지!”

    “하,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더 북쪽 외곽으로 도망가는걸? 만약 상처를 입었다면 마을이 있는 남쪽으로 갔을 텐데.”

    “아, 어디다가 소모품 숨겨 놨나 보지! 그리고 우리가 쪽수가 있으니 겁먹었을 수도 있고. 아무튼 비켜 이 새꺄!”

    “아, 안 돼! 아무래도 불안한 점이 너무 많…….”

    하지만 피기의 말은 랠프에 의해 끊겼다.

    “일단 추격해 보자고. 우리가 북대륙을 접수할 때 방해가 될 인물이니 이참에 치워 버리는 게 좋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동의.”

    랠프에 이어 사이먼과 로저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피기만이 고개를 푹 숙이고 소라껍데기를 만지작거릴 뿐이다.

    “내, 내가 소라 불었는데. 내 말을 들어줘야 하는데…….”

    하지만 이미 그를 제외한 4인은 고인물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피기는 이쯤에서 그들과 갈라설지 아니면 따라갈지를 고민했다.

    “…….”

    한참을 고민하던 피기는 결국 동료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되뇌면서.

    *       *       *

    한편. 나는 북쪽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솔아.”

    “응.”

    내가 뒤에 있는 윤솔을 부르자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나는 오더를 내렸다.

    “지금 떨구자.”

    “알았어.”

    내 말을 들은 윤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흘렸다.

    그것은 가죽 자루에 담겨져 있는 ‘상어의 이빨’이었다.

    -<상어 이빨> / D

    냉기가 서려 있는 바다맹수의 이빨.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불행을 막아 줄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상어 이빨이 든 가죽자루를 바닥에 떨군 채 잽싸게 달렸다.

    그러자 한참 뒤.

    “어, 이것 봐! 저놈들이 뭔가를 흘렸어!”

    “퀘스트 아이템 같은데? 이거 나름 귀한 거 아냐?”

    “하하하하! 정말 X빠지게 달리는 중인가 보네!”

    “우리가 무섭긴 무서운가 봐.”

    뒤에서 추격자들이 낄낄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고소를 머금었다.

    그때.

    “어진.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드레이크가 묻는다.

    나는 친구의 의문에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마트료시카.”

    저 먼 바다에 홀로 둥둥 떠 있는 저주받은 유빙.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곳.

    그곳이 다시 한번 나의 무대가 될 것이다.

    이윽고 저 먼 설원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가혹한 바다.

    그리고 안으로 좁게 파고든 만 귀퉁이에 낯익은 형체가 드러났다.

    시커먼 해골이 말뚝에 박혀 있는 뱃머리.

    찢어진 돛과 이 빠진 용골,

    ‘Devil's banquet’

    얼어붙은 유령선 ‘악마의 만찬’ 호가 음울한 모습을 한 채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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