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23화 (523/1,000)
  • 524화 오염된 피 (6)

    랠프와 잭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잭이 날카롭게 빈정거렸다.

    “아까 레이드 뛸 때 제대로 딜 넣지도 않더만. 애꿎은 지형에만 불을 지르고, 너 하는 게 뭐냐? 리더라며?”

    그러자 랠프도 지지 않고 맞섰다.

    “내가 주변에 불을 피우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레이드고 뭐고 얼어 죽었을 거다. 이런 추운 곳에서는 불을 피워서 체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지. 설령 사냥 중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때.

    뚜우우우우-

    안경 쓴 뚱보 소환사 피기가 모두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모두 내 말을 들어줘!”

    피기가 불은 것은 소라껍데기로 만들어진 나팔, 함무라비 소라게를 잡고 얻은 잡 아이템이었다.

    “……?”

    랠프와 잭은 미간을 찡그린 채 피기를 바라보았다.

    “뭐냐 피기, 감히 리더의 말을 끊어?”

    “퉷! 이 돼지가 돌았나.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건방지게?”

    그 둘은 피기가 들고 있는 소라껍데기에 잠시 주목했지만 이내 관심을 꺼 버렸다.

    피기가 들고 있는 소라고둥은 예쁘기는 했지만 별다른 성능도 없는 잡템이었기 때문이다.

    랠프와 잭이 또다시 싸우려고 하자.

    뚜우우우우우-

    피기가 이전보다 더 길게 나팔을 불었다.

    “젠장! 시끄러워 죽겠네.”

    로저가 성큼성큼 걸어가 피기의 손에서 소라껍데기를 빼앗았다.

    그러자 피기가 황급히 말했다.

    “자, 로저! 그러면 이제 네 차례야!”

    “……?”

    로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피기가 재빨리 덧붙였다.

    “우리는 너무 제멋대로야! 그러니 간단한 규칙을 정하자고! 이 소라 껍데기를 불면 그 사람의 말에 전부 귀 기울이는 거야. 서로 말 끊지 말고 말이야.”

    “…합의를 해서 발언권을 얻자는 거군.”

    랠프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 격인 랠프의 지지를 얻은 피기는 밝아진 얼굴로 재잘거렸다.

    “우리도 정말 최소한의 규칙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오염된 피라는 꿀 특성을 사용해서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려면 우리끼리라도 협력해야지. 그리고 우리에겐 커다란 목표가 있잖아?”

    피기의 말에 모두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곳 북대륙을 그레이 시티처럼 무법천지로 만들고 싶어 했다.

    새로운 아지트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탁!

    잭이 로저의 손에서 소라껍데기를 넘겨받았다.

    소라껍데기는 짙은 크림색에 엷은 핑크색이 감돌고 있는 아주 예쁜 색이었다.

    입구에 뚫려 있는 구멍부터 껍데기 끝까지는 약 8인치, 끝으로 갈수록 나선형으로 빙빙 꼬아져 있었고 일부 볼록무늬가 우아하게 양각되어 있다.

    “흥!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걸 불지. 다들 들어보라구.”

    잭은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는 소라나팔을 뚜- 하고 불었다.

    묵직한 소 울음소리 같은 것이 텅 빈 설원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일순간 말을 멈추게끔 하는 기묘한 웅장함이 있어서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절로 잭을 쳐다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

    “…….”

    심지어 랠프까지도 잠자코 잭의 입을 바라본다.

    잭은 숨을 한번 고른 뒤 침착하게 말했다.

    “자, 우리는 그레이 시티에서 쫓겨났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처지야.”

    좌중은 침묵한 채 얌전히 잭의 말을 들었다.

    그것은 잭이 특별히 더 카리스마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손에 들린 저 예쁜 소라껍데기 때문이다.

    잭은 말을 계속했다.

    “그러던 차에 우리는 운 좋게도 ‘오염된 피’라는 무기를 얻었어. 이것을 잘만 이용하면 북대륙을 무법지대로 만들 수도 있겠지.”

    그는 눈을 빛내며 랠프와 피기, 로저, 사이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을 보고 있단 말이야.”

    잭의 말에 랠프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북대륙에 역병을 일으켜서 무법지대로 만드는 것 말고 또 뭐?”

    “쯧쯧, 랠프. 이래도 네가 리더냐? 너는 도무지 큰 그림을 그리질 못해.”

    잭은 얼어붙은 입술을 핥으며 교활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한껏 뻐기듯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내가 노리고 있는 것은 바로 ‘백섭’이야.”

    잭의 말에 랠프를 비롯한 모두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로저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과연. 역병이 북대륙을 넘어 중앙대륙까지 번지면 제아무리 GM이라고 해도 방법이 없지. 서버 자체를 일정 기간 리셋시키는 수밖에는 말이야.”

    사이몬 역시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예전에 모 온라인 게임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잖아. 전염병이 너무 확산되어서 서버를 리셋시켰던 유명한 사건이.”

    잭은 로저와 사이몬의 동조가 기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큭큭큭. 맞았어. 이 역병으로 북대륙을 오염시킨 뒤 그 기세를 몰아 전 대륙을 다 역병 천지로 만들어 버리자고. 그러면 백섭이 일어나 그레이 시티에 있던 ‘카르마’가 리젠될 거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소중한 그레이 시티를 되찾을 수 있지. 뭐, 백섭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냥 지금 이대로 살면 되는 것이고.”

    말을 마친 잭은 두 팔로 자기 몸을 끌어안은 채 환희에 젖어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레이 시티에서 만났던 ‘그분’이 나를 바라봐 주실지도 몰라! 나를 수하로 받아 주실지도 모른다구!”

    잭 메리듀가 그토록 갈망하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노릇이다.

    잭의 친구인 로저조차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으니까.

    한편.

    잭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지 이내 소라껍데기를 중앙에 던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랠프가 소라껍데기를 주웠다.

    뚜-

    소라를 짧게 한번 분 랠프는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나는 죄 없는 사람들까지 역병에 말려들게 하는 것은 반대지만…… 잭이 원하는 것이 ‘백섭’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어차피 살아나게 될 목숨들이라면 우리가 잠시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야.”

    그러자 잭이 박수를 쳤다.

    “크, 좋았어! 드디어 네놈과도 말이 통하는군. 다 이 소라껍데기의 힘인가?”

    “비꼬지 마라, 죽고 싶지 않으면. 여전히 이 무리의 대장은 나야.”

    랠프는 눈을 부라리고 잭을 노려보았다.

    “…….”

    잭은 잠시 울컥하여 창을 쥐었지만 이내 내려놓았다.

    사실 솔직한 말로 랠프와 1:1로 싸워 이길 자신은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뚜우우-

    또다시 소라나팔이 울렸다.

    이번에는 피기가 발언권을 획득했다.

    모두가 말없이 자신을 주목하자 피기는 빨개진 얼굴로 씩 웃었다.

    “헤헤, 다들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입 닥쳐 돼지. 네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소라껍데기의 권위를 존중하는 거니까.”

    “아무튼. 내 말을 기다려 줘서 고마워, 잭.”

    피기는 잭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찌 되었건 이 북대륙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해. 그동안 잘해 보자.”

    “……뭐야, 그게 끝이야?”

    “응. 나는 더 바라는 것 없어.”

    다소 싱거운 말이었지만 모두들 피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랠프가 피기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빨리 다음 몬스터를 잡으러 가자고. 펫은 아직 무사하지?”

    랠프의 질문에 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아공간에 들어간 펫은 HP가 닳지 않는다.

    따라서 다음 몬스터를 잡을 때 펫을 소환하기만 하면 해당 펫은 오염된 피를 뿌려 그 몬스터를 감염시킬 것이고 그때 재빨리 다시 역소환하면 된다.

    그 뒤에 마을을 돌며 구한 해독제와 포션을 빨면서 레이드를 뛰면 되는 것이다.

    “자, 좋았어! 빨리 다음 레이드 뜁시다. 어이, 돼지! 빨리 네 돼지나 다시 소환해 봐!”

    잭은 피기의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며 설원 저편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마침 그곳에는 얼어붙은 호수 빙판에 구멍을 내고 튀어 오르는 상어 한 마리가 보였다.

    <얼음귀기울임 상어 ‘서리이빨’> -등급: A+ / 특성: 얼음, 물, 고생물, 싸움광, 뺑소니, 백전노장

    -서식지: 가혹한 설산, 상해(上海) ‘블루홀’, 하해(下海) ‘악의의 저변’

    -크기: 8m.

    -깊은 심해에 살지만 때때로 뭍으로 올라와 먹잇감을 찾는다.

    사납기로 유명하며 자기보다 크고 강한 적을 만나도 거침없이 덤벼든다.

    A+급 몬스터!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만큼 강력한 필드 보스이다.

    하지만 잭은 평소와 달리 용기백배하여 창을 꼬나쥐었다.

    “이봐, 돼지! 빨리 네 돼지를 저리로 보내!”

    잭의 채근에 피기는 서둘러 앞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퍼엉!

    피기가 소환한 펫이 상어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랠프와 잭, 로저, 사이먼은 긴장한 표정으로 눈앞의 대상을 노려보았다.

    피기의 돼지가 상어를 감염시키는 즉시 레이드를 벌일 생각이었다.

    …한데?

    콰지직!

    피기가 소환한 돼지는 너무나도 어이없게 상어의 아가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어는 전혀 역병에 걸리지 않았다.

    피기가 소환한 돼지는 병에 걸리지 않은 멀쩡한 돼지였기 때문이다!

    “어어!?”

    피기는 당황해했다.

    소환수가 죽어 데미지가 역류하고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왜 네 펫이 역병에 걸린 상태가 아닌 거야!?”

    잭이 피기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피기는 울상을 지은 채 말했다.

    “나, 나도 몰라! 저번에 돼지를 역소환시켰을 때는 분명 역병에 걸린 상태였다고! 그 구더기가 걸어 준 그 역병 말이야!”

    오염된 피의 확산 경로에는 펫이 필수적이다.

    역병에 걸린 펫이 아공간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옴으로서 역병을 광범위하게 퍼트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역병에 걸려 있던 피기의 돼지가 말끔한 상태로 소환되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뚜우우우-

    모두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랠프가 침착하게 소라껍데기 나팔을 불어 발언권을 획득했다.

    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염된 피 디버프가 사라졌어. 이것은 둘 중 하나야. 피기가 우리 몰래 자기 펫을 치료했던가…….”

    “아냐! 맹세코 나는 정말 아니야!”

    피기는 울상을 지으며 다급하게 고개를 젓는다.

    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그럴 만큼 대범하지도 못하지. 두 번째는 이거야. 우리에게 오염된 피 디버프를 줬던 그 구더기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었거나.”

    그러자 모든 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특히나 잭의 동요가 가장 심했다.

    “아, 안 돼! 그 구더기 놈이 죽으면 ‘오염된 피’도 사라지잖아! 그러면 북대륙을 먹을 수 없어. 그레이 시티를 되찾을 수도 없어. 그, 그리고 ‘그분’의 눈에 들 수도 없게 된다고!”

    하지만 다른 네 명은 잭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동요하고 있었다.

    “그 구더기 자식, 뒷배가 상당했잖아. 그렇지? 분명 믿는 구석이 있었다고.”

    “맞아. 분명 자기가 뭔가의 ‘아들’이라고 했어.”

    “자기가 죽었다간 아버지가 찾아올 것이라고도 했었지. 아주 무서운 아버지가.”

    “……으으음.”

    랠프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안 되겠네. 그 구더기가 있던 동굴로 다시 돌아가 봐야겠다. 누가 구더기를 건드렸는지 알아야겠어.”

    오염된 피 사태를 재현하기 위해서도, 백섭을 일으켜 그레이 시티를 되찾기 위해서도 이번 일은 중요했다.

    다섯 명의 살인자들은 공포와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윙윙윙윙윙-

    그들의 귓가에 파리 날갯짓 소리가 미약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주 불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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