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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22화 (522/1,000)
  • 523화 오염된 피 (5)

    휘이이잉-

    눈발이 날리는 폐허.

    통나무와 거죽떼기로 만들어진 오두막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마치 임시로 건설된 숙소 같은 모양새.

    하지만 불이 켜져 있는 집은 한 곳도 없었다.

    -띠링!

    <‘얼어붙은 마을’에 입장하셨습니다>

    북대륙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씩 볼 수 있는, 수많은 ‘버려진 마을’ 중 하나다.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낡아빠진 울타리를 넘어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을씨년스럽게 뻥 뚫린 벽, 금방이라도 귀신이 울부짖을 것 같은 창문, 반쯤 허물어진 굴뚝…….

    “으음. 포션도 좀 사고, 불도 쬐고 하려고 했는데…….”

    윤솔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니지. 여기만큼 풍요로운 마을이 또 없다.”

    드레이크가 윤솔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윤솔, 드레이크는 그런 윤솔 데리고 가까운 오두막의 문을 벌컥 열었다.

    <잡화점>

    깨진 창문과 부서진 문.

    그러나 그 안쪽에는 아직 손대지 않은 식량과 소모품들이 가득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포션 네 병, 잘게 자른 슬라이스 햄 여섯 조각, 소금에 절인 연어 세 마리, 고래 기름 한 덩어리, 말라비틀어진 순무와 당근 몇 뿌리, 정체불명의 통조림 스물두 통, 낚싯줄과 바늘, 지혈제, 화살촉, 마름쇠, 단검 몇 자루, 그리고 동상과 잠수병 치료제까지.

    비록 먼지와 눈, 얼음에 덮여 있기는 했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도 무려 공짜로!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예전에 드레이크도 이런 거 몰라서 당황하고 놀라고 그랬었는데. 추억이네.”

    “크흠. 으흠. 어진. 왜 뉴비 때 얘기를 하고 그러나.”

    드레이크는 얼굴을 수줍게 붉히며 선반 위에 있는 물건들을 훔쳤다.

    윤솔은 인벤토리에 햄과 절인 생선 등을 넣으며 약간 불안해했다.

    “그런데 이렇게 맘대로 가져가도 될까?”

    “이야, 어떻게 뉴비 시절 드레이크랑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할까.”

    내가 옆에 있던 드레이크의 어깨를 팡팡 치며 감탄하자 그의 얼굴이 또다시 수줍게 물들었다.

    “커흠. 여기 있는 잡화들은 첫 발견자에 대한 보상 같은 거다. 일반적인 상점의 아이템들과는 다르게 리젠이 안 되지. 그러니 Help yourself다.”

    드레이크의 추가 설명을 들은 윤솔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소모품들을 수거했다.

    예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마구 뒤지는 것은 역시 모든 RPG의 기본이다.

    마치 젤… 아니 링크처럼 말이다.

    한편.

    나는 바람에 실려 오는 미세한 악취의 방향을 따라가고 있었다.

    -띠링!

    <상태이상 ‘중독’에 걸렸습니다>

    악취를 맡자마자 나는 바로 중독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어진>

    LV: 91

    호칭: 바실리스크 사냥꾼(특전: 맹독)

    내 몸속에는 이미 바실리스크의 맹독 혈액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독쯤은 우습게 씹어 버릴 수 있는 몸이기에 중독 상태는 바로 풀려 버렸다.

    나는 폐허가 된 잡화점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설원을 바라보았다.

    “저 언덕 너머 설원에 이 악취의 근원이 있을 것이란 말이지.”

    사실 나는 이미 역병의 진원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예전에 데린쿠유에 갔을 때 마주쳤던 몬스터.

    <벨제붑의 아들 ‘구더기 살점토막’> -등급: A+ / 특성: 맹독, 하수인, 어둠, 과식, 하찮음, 앙버팀, 질긴목숨, 오염된 피, 혈족전생

    -서식지: 데린쿠유 식량창고, 설원 북동지대, 구더기 언덕

    -크기: 10m.

    -모든 욕망과 본능이 거세된 채, 오로지 폭식(暴食)에 대한 갈망으로만 움직이는 살덩어리.

    먹고 싸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때 죽이지 않고 풀어줬던 이 구역질나는 괴물이 아마 모든 것의 원흉일 것이다.

    ‘그때는 두 마리의 고정 S+급 몬스터를 한 번에 적으로 돌릴 수 없어서 그냥 놔뒀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미 마몬을 잡은 뒤이니 말이다.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마 역병의 원인은 살점토막 구더기이겠지만 병을 옮기고 다니는 것들은 플레이어들일 거야.”

    뻔하다.

    다른 마을을 오염시키고, 일반 포션을 해독제인 척 속여 비싸게 팔고, 있지도 않은 가공의 퀘스트를 만들어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렇게 무고한 사람들을 이용해 자기 배를 불리거나 추악하고 더러운 쾌감을 얻으려 하겠지.

    나는 눈을 빛냈다.

    “…남을 이용하려는 놈들은 남에게 이용당할 각오도 하고 있어야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곧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피 한 방울, 살점 한 토막, 해골 한 조각까지 아주 남김없이 쪽쪽 빨아먹어 주리라.

    *       *       *

    한편.

    랠프, 피기, 사이먼, 잭, 로저.

    그레이 시티에서 탈출한 살인자 5인은 현재 설원에서 몬스터를 잡고 있었다.

    …쿵!

    등딱지 지름이 4미터도 넘는 거대한 소라게 한 마리가 빙판 위로 쓰러졌다.

    <함무라비 소라게> -등급: A / 특성: 얼음, 땅, 물, 뺑소니, 나약한 갑각, 지진, 고생물, 백전노장

    -서식지: 가혹한 설산 ‘금지된 구역’, 상해(上海) 블루홀, 하해(下海) ‘네 자매 사육장’

    -크기: 8m.

    -언뜻 보기에는 가재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게의 한 종류이다.

    깊은 심해에 주로 서식하는 종이지만 어째서인지 눈이 잔뜩 쌓인 고산지대에서도 드물게 발견된다고 한다.

    등에 짊어지고 있는 소라는 상당히 약해서 강한 충격을 받으면 금세 깨져버린다.

    상당히 집요한 성격이어서 자기를 공격한 적은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똑같이 되갚아 주는 모양.

    커다란 소라게는 빙판에 넘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것을 본 잭은 환호성을 질렀다.

    “크하하하! 봤어? 봤냐고! 내가 A급 몬스터를 잡았어! 이 창! 이 창으로 말야!”

    잭은 시커멓게 물든 자신의 창끝을 들여다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랠프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잡은 게 아니야. ‘우리’가 잡은 거지.”

    “…….”

    잭은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그런 랠프를 돌아본다.

    랠프는 잭의 시선을 무시한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들 고생 많았어. 이것은 모두가 힘을 합친 결과야.”

    랠프의 치하를 받은 세 명은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피기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사이먼은 뿌듯하다는 듯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잭의 친구인 로저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그때 사이먼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 스킬 정말 굉장하다. 우리가 A급 몬스터를 잡을 수 있게 되다니.”

    사이먼은 말을 마치고는 자신의 철퇴를 내려다보았다.

    원래 은은한 흰 빛을 띄고 있었던 그의 철퇴는 지금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오염된 피’ 특성.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초당 250~300 HP의 고정 피해를 입히는 동시에 주변의 모든 생물들에게 그의 2배나 되는 독 데미지를 입히는 특성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특성이 ‘중첩’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모인 살인자 5인 파티는 몬스터를 상대로 초당 최대 1500의 고정 데미지를 입힐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강력한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었다.

    “……휴우.”

    피기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따르고 있는 충실한 펫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소환한 펫은 한 마리의 작은 돼지였다.

    돼지는 오염된 피를 뒤집어쓴 채 꿀꿀 신음하고 있었다.

    피기는 재빨리 돼지를 아공간 속으로 역소환 시켰다.

    그러자 여기 모인 모두는 서둘러 포션과 해독제를 삼켜 자신들에게 묻은 ‘오염된 피’를 제거했다.

    그들은 피기의 펫을 오염된 피에 중독시킨 뒤 아공간 속으로 돌려보내 필요한 순간에만 돼지를 꺼내 오염된 피를 주변에 뿌리는 식으로 사냥을 해 왔다.

    특히나 피기가 펫을 많이 소환하면 많이 소환할수록 중첩 데미지는 더욱 커졌기에 사냥이 훨씬 수월했던 것이다.

    사냥은 효울이 꽤 좋은 편이었다.

    아이템 드랍도 쏠쏠했고 경험치도 짭짤했다.

    소모품이야 버려진 마을을 뒤져 조달하면 되니 아껴 쓰기만 하면 조금 아쉽긴 해도 딱히 모자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잭 메리듀만은 지금의 이 상황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뭘 고민해! 당장 길을 되돌아가서 그레이 시티에 이 오염된 피를 뿌려 버리자고! 그래야 더 많은 생물들을 죽일 수 있지! 플레이어든 몬스터든 NPC든 다 죽여 버리고 폭렙을 하는 거야! 아이템들도 다 뺐고!”

    그러나 랠프는 잭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잭,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거야. 나와 대등하거나 더 강한 놈들을 죽이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뉴비들까지 죽이는 것은 좀 아니지.”

    “뭐? 뭔 상관이야! 그렇게 정의로운 놈이 왜 카르마 유저가 됐냐?”

    “나는 나보다 센 놈 아니면 PK 안 해. 그게 내 규칙이야.”

    “허어, 어이없는 놈일세 이거. 카르마 유저가 되었는데도 일반 유저처럼 행동하는 거냐? 정신 차려. 우리는 그나마 최소한의 법규가 있던 그레이 시티에서 쫓겨났고 더 이상 예전의 룰 따위는 필요 없어. 카르마 유저답게 굴라고!”

    랠프와 잭이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파티의 리더다. 오더에 따라라 잭.”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네깟 놈이 무슨 리더냐? 차라리 내가 리더를 맡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화염 마법사 랠프는 두 손에 불을 피워 올렸다.

    야만전사 잭은 양손에 시커멓게 물든 창을 꽉 말아 쥐었다.

    자칫하면 서로를 향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사이먼과 로저는 안절부절 못하며 그들 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규칙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카르마 유저들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팀 킬(TEAM KILL)’

    같은 팀의 동료를 죽이는 것만은 살인자들 사이에서도 엄격하게 금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레이 시티의 몰락 후 남아 있던 일말의 규칙까지도 모두 사라져 버린 지금 이 둘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해 볼 테냐?”

    “얼마든지.”

    랠프와 잭은 기어이 PVP를 벌일 기세였다.

    바로 그때!

    뚜우우우우-

    무언가가 둘의 시선을, 아니 모두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모두 내 말을 들어줘!”

    안경 쓴 뚱보 소환사 피기.

    그가 손에 커다란 나팔을 들고 불고 있었다.

    -<나약한 자의 나팔고둥> / 재료 / C

    힘껏 불면 트럼펫 소리가 나는 커다란 소라껍데기.

    보기보다 물러서 힘껏 누르면 부서질 것 같다.

    -방어력 -50

    -특성 ‘나약한 갑각’ 사용 가능

    함무라비 소라게를 잡고 얻은 잡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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