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21화 (521/1,000)
  • 522화 오염된 피 (4)

    으아아아아-

    눈보라 소리에 비명 한 가닥이 섞여 아스러진다.

    완만한 경사의 비탈길을 허겁지겁 내려오는 몇 명인가의 플레이어가 있었다.

    하나같이들 얼굴이 눈밭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는 상태였다.

    “저, 저게 대체 뭐야!”

    “가혹한 설산에는 몇 번인가 와 봤는데 저런 건 처음 본다구!”

    “빌어먹을! 저렇게 소름끼치는 괴물이 있을 줄이야…….”

    “‘이히히히’라고? 이름부터가 미쳐 버렸구만 아주 그냥.”

    “진정해 친구들. 랜덤으로 출현하는 필드보스인가 보지.”

    그들은 설산을 굴러 떨어지듯 내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중 한 명이 흘끗 뒤를 돌아보자.

    이히히히-

    이내 또렷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그들의 등 뒤에는 이미 수십 구의 시체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설원에 우뚝 선 채로 죽은 플레이어들, 극도의 공포와 추위로 인해 하나같이 표정들이 일그러져 있다.

    얼마 전 그레이 시티에서 탈출해 온 살인자들이었다.

    그리고 꼿꼿하게 서서 얼어 죽은 강시(僵尸)들의 사이로 온몸의 관절을 비틀며 기어 나오는 한 명의 여자.

    이히히히히히-

    큰 키에 깡마른 몸을 가진 ‘그것’은 흐느적거리는 듯한, 어딘가 불쾌하게 느껴지는 움직임으로 비탈길을 꾸물꾸물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찌걱- 찌걱- 찌거덕-

    네 개의 팔다리 관절을 기괴한 각도로 뒤틀며 말이다!

    <기어오는 술래 ‘이히히히’> -등급: A / 특성: 얼음, 어둠, 언데드, 술래

    -서식지: 가혹한 설산

    -크기: 2m.

    -마을에서 마녀로 몰린 여자가 얼음 구덩이에 산 채로 던져졌다.

    머리 위로 연신 끼얹어지는 차가운 물을 맞으며, 그녀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으아아아! 튀어! 튀라고! 저년한테 잡히면 얼어붙는다!”

    빨간 머리 살인자 하나가 발목에 낀 서릿발을 보고는 깜짝 놀라 도끼로 자기 발을 내리쳤다.

    땅! 따앙!

    하지만.

    -띠링!

    <이 얼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 얼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 얼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

    .

    “아니! 제발! 깨져! 부서지라고! 이런 X발!”

    파괴불가를 알리는 알림음만이 뜰 뿐이다.

    까각- 까드득- 그그극-

    날카롭던 파열음은 그새 제법 둔한 소리로 바뀌었다.

    빨간 머리 살인자는 저린 손을 움켜쥐며 도끼를 떨어트렸다.

    “날, 날이…….”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이 빠진 도끼를 내려다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 자신의 전신을 뒤덮어 오는 얼음의 정체를 알아 버린 것이다.

    증식성 파괴 불가 오브젝트.

    지금껏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물(忌物)이다.

    뒤에 있던 녀석들이 왜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얼어 버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흐, 흐윽… 흐으으으윽! 여, 여기서 죽을 수는…….”

    그는 저 멀리서 기어오는 이히히히의 모습을 벌게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애꿎은 눈 더미를 낑낑 밀어내는 것뿐이다.

    그때.

    …파삭! …파사삭! …파삭!

    그 순간 멀어졌던 발소리 하나가 다시 가깝게 다가왔다.

    “…내, 내가 땡 해 줄게 잭!”

    앞서 도망쳤던 뚱뚱한 안경잡이 남자가 되돌아와 얼음에 뒤덮여 죽어 가던 붉은 머리의 몸을 툭 쳐 얼음에서 풀어 준 것이다.

    얼음에서 풀려난 빨간 머리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안경잡이를 확 밀치고는 비탈길을 허겁지겁 내달리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저적-

    그 뒤로 수많은 이들이 얼음 속에 파묻히고 있다.

    “으, 으어어어어! 나, 나도! 나도 땡 해 줘!”

    “꺄아아악! 안 돼! 나 여기서 죽으면 사망 패널티 너무 커진단 말이야! 사실상 영구정지라고!”

    “제발 땡 좀 해 줘! 돌아와!”

    살인자들은 아비규환 속에 천천히 얼어붙어 갔다.

    어둡고 춥고 아무도 없는 곳.

    그런 곳에서 얼음에 갇혀 천천히 홀로 죽어 간다는 것은 실로 끔찍한 일이다.

    “……꼬르륵.”

    이히히히의 얼음에 나포당한 한 여자 유저가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으스스하게 드리워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이히히히의 맨얼굴을 봐 버린 것이다.

    “으아아! 저 얼굴 좀 봐!”

    “게임 디자인 한 새끼 누구야!?”

    “모자이크 패치라도 좀 하라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이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냅다 산비탈을 달렸다.

    북대륙으로 넘어온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인 것인지 회의감을 가진 채로.

    *       *       *

    “…헉, 헉. 이쯤 도망쳤으면 안 따라오겠지?”

    살인자 하나가 얼어붙은 땀을 피부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그는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는 금발 남자로 이름은 랠프였다.

    클래스는 화염계열 마법사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 뚱뚱한 체구의 한 안경잡이가 풀썩 주저앉았다.

    게임 안에서 찾아보기 힘든 소환사 및 테이머였다. 이름은 피기.

    피기의 뒤를 이어 나머지 세 명의 생존자들도 눈밭 위에 쓰러져 숨을 돌렸다.

    힐러 사이먼, 전사 잭, 무투가 로저 등, 모두 그레이 시티에서 종종 파티 사냥을 하던 사이들이다.

    그들은 함께하던 수많은 이들이 모두 죽고 자신들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공포와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피기는 볼 살을 파들파들 떨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는 이 무리의 대장 격인 랠프를 향해 울상을 지어 보였다.

    “모리스, 빌, 로버트, 헨리, 해롤드, 퍼시발, 그리고 쌍둥이 샘과 에릭… 다 죽었어! 다 죽었다구! 아아, 이제 어쩌지!?”

    “그 냄새나는 입 좀 닥쳐, 이 겁쟁이 돼지 새끼야.”

    그러자 랠프 대신 옆에 있던 사내가 툭 대답했다.

    키가 크고 깡마른 체구에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

    은십자 뱃지가 달린 검은 망토에 성가대원을 연상케 하는 사각모를 쓴 남자.

    잭 메리듀.

    클래스는 야만전사로 주 무기는 창이다.

    아까 이히히히의 얼음에 뒤덮여 죽을 뻔했던 남자였다.

    잭이 피기에게 으르렁거리자 랠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봐 잭. 피기한테 너무한 것 아냐? 아까 피기 아니었으면 넌 이미 죽었어.”

    그러자 잭이 일순간 표정을 구기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랠프와 시선이 마주치자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제기랄.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저 돼지한테 고맙다고 절이라고 할까?”

    “…….”

    “그보다, 계속 이 산 넘어갈 거야? 이쯤 해서 그냥 서로 찢어지는 게 낫지 않아? 북대륙 점령은 무슨, 꼴랑 다섯이서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

    랠프는 잭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바로 그때.

    “잠깐! 친구들, 어디서 이상한 소리 안 들려?”

    안경잡이 뚱땡이 피기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잭이 피식 웃으며 피기에게 면박을 준다.

    “이 겁쟁이 돼지야. 너는 소리를 만들어 듣냐? 네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잖아.”

    “아, 아니! 그거 말고! 어디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린단 말야!”

    그러자 랠프가 피기의 편을 들어주었다.

    “맞아. 아까 이히히히의 웃음소리를 처음으로 들은 것도 피기잖아.”

    “으음, 사실 나도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바람소리에 섞여 드문드문.”

    언제나 침착한 힐러 사이먼도 랠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잭 역시도 끙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친구인 로저 역시도 말없이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자 비로소 피기를 불안하게 만든 소리가 모두의 귀에 또렷해진다.

    윙윙윙윙-

    그것은 꽤나 불쾌한 소리.

    마치 통통하게 살찐 파리가 날개를 비벼 빚어내는 듯한, 음식물 쓰레기 썩는 악취가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공기의 파동.

    “파리 날갯짓 소리잖아?”

    피기는 겁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눈 덮인 설원에 파리가 있을 리가 없으니 더욱 더 이상한 일이었다.

    윙윙윙윙윙-

    하지만 이 불길한 소음은 계속되는 것을 넘어 점점 더 크고 또렷해지고 있었다.

    급기야.

    […내게로 오라.]

    그들의 귓가에 후끈하고 역한 숨결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히이익!”

    다섯 명의 살인자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귀를 털어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이는 것 같은 더운 입김과 메시지는 더욱 더 끈적하게 따라붙고 있었다.

    […너희들은 내가 필요하다.]

    […그 알몸 변태에게 복수하고 싶지?]

    […내 말을 들어.]

    그와 동시에 파리 날갯짓 소리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악취 역시도 점점 진해져 간다.

    윙윙윙윙윙윙-

    살인자들 내면의 욕구를 동하게 만드는 냄새.

    그것은 그레이 시티에서 지독하게도 맡아 이미 익숙해진 냄새.

    바로 피 냄새였다.

    동시에 다섯 명의 살인자는 눈 덮인 벌판에 방울져 있는 몇 개의 핏방울을 발견했다.

    피가 썩은 듯한 시커먼 자국. 악취는 그곳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과 차가운 눈에도 지워지지 않는 피.

    그 더러운 피는 살인자들을 유혹하듯 저 앞으로 점점이 떨어져 있다.

    ● …● ……● ………●

    마치 따라오라고 속삭이듯.

    “…….”

    “…….”

    “…….”

    “…….”

    “…….”

    다섯 명의 살인자들은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오염된 핏방울들이 만들고 있는 길을 따라 흐느적흐느적 움직였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핏방울의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북동쪽에 있는 한 설원지대, 그곳에서도 가장 외곽에 위치해 있는 한 동굴이었다.

    <으슥한 굴> -등급: A

    살인자 5인이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히익!?”

    가장 앞에 있던 랠프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본다.

    동굴 안은 온통 오염된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미 썩어 버린 것으로 보이는 피는 굳지 않고 벽과 천장에서 뚝뚝 떨어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지독한 악취가 스멀스멀 풍겨나고 있었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북동쪽 설원지대 ‘으슥한 굴’ 입장>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

    <※사람을 한 명 이상 죽여 본 자만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 퀘스트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모두의 귓가에 요란한 알림음이 떴다.

    거부를 거부하는 히든 퀘스트.

    받는 장소도, 주는 대상도, 그 내용도 심히 불길한 냄새가 난다.

    이윽고.

    겁에 질린 다섯 살인자들의 앞으로 무언가가 거대한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윙윙윙윙윙윙윙-

    피칠갑이 된 동굴 안쪽. 파리 날갯짓 소리.

    [……‘고인물’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아?]

    살인자들을 보고 활짝 웃는 존재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