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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20화 (520/1,000)
  • 521화 오염된 피 (3)

    며칠 전, 살인자들의 탑 레이드 이후.

    “뭐, 너, 이번에, 크흠! 약간은, 공을 인정한달까, 기여도가 있달까, 노력이 유의미했달까, 음, 오, 아, 예, 저거 뭐냐…… 나로서는 고마움을 약간 느껴야 하는 상황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너한테 에헴, 큼! 약간 정도는 뭐, 빚졌달까? 앞으로는 좀, 음, 믿어 볼 만하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그 뭐냐…….”

    유다희가 유체이탈 화법으로 횡설수설 하고 있을 당시.

    “아니, 근데, 그리고 있잖냐, 그, 자각흉몽아귀, 뱃속에서, 저기, 아무리 내가 너 취향……이라도, 그렇게 막, 괴롭히고, 틱틱 거리면 좀, 곤란하지 않나…… 우리가 초딩도 아니고…… 할 말 있으면, 제대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뭐, 대답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음에도 뭐 또, 저 뭐냐, 그, 특별한 일 없거나 특별한 일 있으면, 레이드 같이 뛰는 것 정도야 뭐…….”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겨우겨우 속마음을 조금 표현했나 싶었는데 그 속마음을 들을 상대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야아아아! 사람이 말을 하는데…… 아오, 꺼져 걍!”

    유다희는 빽 소리치고는 창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다가.

    끼익-

    “…….”

    창문을 슬쩍 밀어 조금 정도는 열어 놓은 뒤 노을 너머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신임 시장님. 업무를 보셔야 합니다.]

    비서관 NPC 몇몇이 다가와 유다희에게 각종 결재 서류들을 내밀었다.

    세금, 무역, 토벌 등등에 관한 시장 업무.

    전임 시장이었던 시혼이 내통 혐의로 지하감옥에 투옥되는 바람에 잔뜩 밀려 있는 일들이다.

    유다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들을 내려다보았다.

    “……흐음. 일단 최우선적으로 결재할 것은 ‘토벌’ 관련 서류들입니다. 우선 결재할 테니 전부 가져오세요.”

    마교를 운영하던 행정 실력으로 순식간에 서류들을 분류, 파악한 유다희다.

    그녀는 그레이 시티 발전을 위한 최우선순위로 ‘토벌’을 손꼽았다.

    비서관 NPC들은 고개를 숙였다.

    [토벌이라. 알겠습니다. 그럼 도시 외곽에 배치한 경비대 인력을 가용해 숲지대의 마물들을…….]

    하지만, 유다희는 비서관들의 말을 막았다.

    “도시 바깥 토벌은 나중입니다.”

    그러자 비서관들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떴다.

    딥러닝으로 유다희의 전적을 파악해 그녀의 의도를 추론해 낸 것이다.

    유다희는 자경단장으로 복무하며 도시 내의 각종 범죄자들과 대립해 왔다.

    그런 그녀가 말한 ‘토벌’이라 함은…….

    [그렇다면 도시 내 범죄 잔당들부터 최우선적으로 소탕하겠습니다. 도시 외곽에 배치되어 있는 경비대 인력을 전부 중심가 쪽으로 이동하시지요.]

    “맞아요. 그레이 시티가 ‘살인자들의 도시’라는 오명을 벗고 선량한 여행자들을 맞이하려면 필수적인 과정이죠. 그동안 마음껏 설치고 다녔던 도시 내부의 범죄자들부터 뿌리 뽑아야 합니다.”

    카르마 유저들과 내통하고 있던 시혼 시장이 사라졌으니 이제 그레이 시티는 관광객들로 붐빌 일만 남았다.

    이는 곧 세수 증가로도 이어져 도시를 한층 더 부강하게 만들 것이다.

    유다희는 부푼 가슴을 안고 첫 번째 도시정화 프로젝트를 발족했다.

    그것은 바로 ‘범죄와의 전쟁’이었다.

    *       *       *

    “X발, 빌어먹을 년!”

    한 떼의 플레이어들이 야음을 틈타 그레이 시티의 성벽을 넘고 있다.

    하나같이 다 머리 위로 강제공개된 아이디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들은 바로 각종 악행으로 인해 몬스터와 같은 위치에 놓인 ‘카르마 유저’들.

    살인, 방화, 절도, 사기 등으로 현상수배 된 범죄자들이었다.

    살인자들의 탑이 공략되고 보스 몬스터 중 하나인 ‘카르마’가 잡히게 되며 그레이 시티에 있던 카르마 은폐 장막이 걷혀 버렸다.

    그동안 자신의 업보를 숨기고 살아가던 이들은 일순간 훤히 드러난 카르마 수치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단 범죄자로 확인된 이상 몬스터와 같은 취급을 당하게 된다.

    모든 아이템이나 금전 거래가 막히는 것도 모자라 경비병 NPC들에게 추격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현상금이나 경험치, 아이템을 노리고 덤벼드는 플레이어들, 방금 전까지 같은 처지였던 동료들의 배신 역시 두려워해야 했다.

    평소 죄가 무거웠던 이들은 일찌감치 성벽을 넘어 도망치며 연신 투덜거렸다.

    “아, 우리가 왜 이렇게 쫓겨나야 하냐고!”

    “망할! 그깟 NPC 몇 마리 죽였다고 카르마 유저라니, 이게 말이 돼?”

    “유다희 년 두고 보자. 반드시 암살하고 만다 내가.”

    “고인물, 그 새끼도 꼭 죽여 버릴 거야.”

    살인자들.

    그들은 유일하게 발붙일 수 있던 마을 ‘그레이 시티’를 잃어버린 것에 분노와 통탄을 감추지 못했다.

    예쁘고 잘생겼거나 어린 인간형 NPC들을 합법적으로 추행하고 괴롭힐 수 있는 지상낙원이 사라졌으니 이런 흉악한 범죄자들 입장에서는 괴로울 만하다.

    거기에 금전 거래나 소모품 조달을 할 수 있는 아지트를 잃은 셈이니 게임 플레이 전반에 커다란 애로사항이 생긴 셈이다.

    어쩌면 캐릭터를 삭제하거나 게임을 접어야 할지도 모를 커다란 애로사항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렇게 멀리 볼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퍼억!

    어둠을 꿰뚫고 날아든 창 한 자루가 살인자 하나의 목을 뚫고 바닥에 꽂혔다.

    “히익!? 경비병들이다!”

    맨 앞에 있던 살인자 하나가 외쳤다.

    그레이 시티의 경비병들이 성벽을 넘어 도망치는 살인자들을 추격해 온 것이다!

    [네놈들에게 내 딸이 죽었어. 그래서 이 나이에 입대를 했지. 너흰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내 동생의 원수, 지옥까지 따라가 죽여주마.]

    [지금껏 이 도시에서 꿀 빨아 놓고 그냥 가려고? 그동안 빨았던 꿀 만큼 피를 흘리고 가거라.]

    경비병으로 전직한 그레이 시티의 주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살인자들을 쫓는다.

    …퍽! …퍼억! …퍽!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투창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경비병들이 휘두르는 아틀라틀에 적중당한 살인자들은 성벽 중앙에 못 박히거나 그대로 거꾸러져 까마득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끄아아아! 안 돼! 나는 죽으면 떨굴 아이템들이 많단 말야!”

    “캐릭터 안 지우고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지금 죽을 순 없어!”

    “으아아! 나는 히든 퀘스트 깨는 중이라고! 한 번이라도 죽으면 보상 몰수야! 제발 봐줘!”

    “X발! 저 경비병 NPC들 레벨 왜 이렇게 높아!? 어디서 훈련이라도 받고 왔나!?”

    살인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성벽을 탔지만 경비병들의 억센 투창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레이 시티에서 닳고 닳은 경비병들의 창은 그만큼 매섭고 노련했다.

    더군다나 유다희와 함께 자경단 활동을 하며 경험치를 쌓았던 이들은 유독 레벨이 높다.

    …푹! …사뿍! …쩌억!

    성문을 열고 성벽 밖까지 추격에 나선 경비병들은 철퇴나 칼, 도끼 등으로 성벽을 넘느라 기진맥진해진 살인자들을 도륙했다.

    일방적인 학살.

    살육은 새벽동이 트도록 이어졌다.

    그레이 시티의 3중 성벽을 빠져나간 살인자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너덜너덜한 시체가 되어 화산재 풀썩이는 바닥에 파묻혔다.

    죽은 이들 대부분은 카르마 수치가 너무 높아서 사망 패널티가 일반 유저들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을 것이다.

    …….

    ……그러나.

    모든 살인자들이 심판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몇몇 살아남은 이가 있어 그레이 시티의 엄중한 경계를 뚫고 도주에 성공했다.

    온몸이 재와 피로 범벅된 살인자들.

    그들은 약 15명 남짓이었다.

    랠프, 피기, 잭, 사이먼, 로저, 모리스, 빌, 로버트, 헨리, 해롤드, 퍼시발, 샘, 에릭 등등…….

    그들은 게임에서 만난 친구 사이로 늘 우르르 몰려다니며 파티 사냥을 즐기던 카르마 유저들이다.

    새로 부임한 시장 유다희의 서슬에 눌려 정든 아지트를 탈출해 이곳 북방의 경계 ‘가혹한 설산’ 기슭까지 쫓겨난 처지.

    때문에 당연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이들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다.

    “유다희 그 XX 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시의 뜨내기였던 주제에 어떻게 시장이 됐지?”

    “분명 고인물, 그 알몸 변태 놈에게 쩔 받았을 거야.”

    “흥! 쩔 받는 대가로 뭘 바쳤을지 상상이 가는구만. XX 같은 년!”

    한참 동안이나 투덜거리던 그들은 이내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레이 시티 같은 곳은 또 찾기 힘들어. 차라리 어디 한적한 마을을 골라서 그레이 시티 같은 곳으로 만드는 게 빠르겠다.”

    “그렇다면 살기 좋아서 사람이 많은 남대륙은 힘들 것이고, 서쪽은 몬스터들이 너무 빽빽하게 젠 된단 말이지. 동대륙이야 얼마 전에 대격변 이후 골드러시 때문에 제일 붐비고…….”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인데?”

    답은 정해졌다.

    북대륙.

    몬스터들도 별로 없고 사람들의 왕래도 적은 지역이다.

    물론 기후와 지형, 생태계가 지나치게 척박하고 가혹하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NPC들도 고립되어 있고 남들의 시선도 피할 수 있어 오히려 수배자들이 몸을 숨기는 데에는 장점이 된다.

    “동북쪽으로 가면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마을도 많지. 일단 그런 곳을 거점으로 삼아 보자고.”

    “맞아. 그런 곳이라면 NPC 몇 마리 좀 죽인다고 해서 경비병이 오지도 않을 테니까.”

    “어쩌면 소모품을 조달하거나 잡템을 처리할 거래처를 구할 수도 있지. 우리 같은 수배자들이 또 있다면 말야.”

    열다섯 살인자들의 의견은 만장일치로 통일되었다.

    그들은 이대로 북대륙의 경계 ‘가혹한 설산’의 완만한 자락을 에둘러 동북쪽 설원지대로 갈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아까보다는 밝아진 안색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레이 시티의 사선을 넘으니 한결 후련해진 모양.

    “좋았어.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군.”

    “하긴, 이 넓은 맵에 우리 갈 데 하나 없겠어?”

    “가자고, 희망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잖나?”

    살인자들은 희기한 태도로 낄낄 웃으며 눈 쌓인 비탈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응?”

    맨 앞서 걷던 살인자 하나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어어,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그 말에 모두가 멈춰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휘이이이잉…

    산비탈 위에서는 싸락눈 섞인 바람만이 매섭게 불어오고 있었다.

    “뭐 말이야? 바람소리?”

    “……아니. 방금 뭐 다른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는데?”

    그러자 다른 이들이 왁자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끼 겁먹었구만?”

    “바람 소리 가지고도 쫄면 어떡하냐.”

    “너는 그냥 맨 뒤에 따라와라. 이 쫄보 돼지야.”

    맨 처음 의문을 제기한 이는 면박을 받으며 일행의 최후미로 밀려났다.

    “그런가? 잘못 들었나?”

    자기의 귀를 계속 의심하면서.

    …….

    이윽고.

    15인의 살인자들은 눈 엎인 언덕을 넘어 얼음계곡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휘이이이잉…

    매서운 눈보라만이 텅 빈 산기슭에 휘몰아친다.

    …….

    ……그리고 여기 바람소리와는 조금 다른 소리가 하나 있었다.

    이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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