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19화 (519/1,000)
  • 520화 오염된 피 (2)

    “접속.”

    [음성 인식으로 보안 해제]

    .

    .

    [동기화 중입니다……]

    .

    .

    [동기화 완료!]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차게 식는다.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나는 눈이 하얗게 덮인 설산에 떨어져 내렸다.

    “……흐음.”

    하지만 게임에 접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에서부터 계속 품고 있는 상념 하나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다희가 내게 건네줬던 한 아이템 때문이다.

    -<카르마의 일기장> / 마도서 / S

    한 사람의 ‘업보(業報)’가 기록된 마도서.

    제일 먼저 소유한 이의 업보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어 더 이상 무언가를 적어 넣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원 소유자: 조디악 번디베일

    유다희가 살인자들의 탑 5층에서 얻은 아이템.

    이것이 어떻게 해서 조디악을 거쳐 유다희에게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짐작이 가능했다.

    조디악이 높은 확률로 고정 S+급 몬스터인 벨페골 사냥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사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나는 이로 인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즈와 마몬을 잡은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겠어.’

    조디악 놈이 더 이상 고정 S+급 몬스터 사냥 특전을 소유하게 놔두면 안 된다.

    하지만 어디로 숨어 버린 지 알 수 없는 조디악을 잡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아는 미래 지식 속의 고정 S+급 몬스터를 잡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그래, 조디악이 잡기 전에 내가 먼저 다 잡아 버리면 그만이지.’

    이 때문에 나는 오늘 이곳 북방의 ‘가혹한 설산’을 넘고 있는 것이다.

    윤솔, 드레이크.

    나의 오랜 파트너들과 함께 말이다.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약속시간에 맞춰 환한 빛무리와 함께 접속한 두 친구들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드레이크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진.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뎀 본사 방문 이후 처음이지. 오랜만에 보는 것 맞네.”

    우리는 짧은 인사 후 설산을 넘으며 근황을 공유했다.

    나는 얼마 전 아키사다 아야카에게 들었던 사건 하나를 이야기했다.

    드레이크와 윤솔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염된 피 사건이라.”

    “으으, 사건 이름에서부터 뭔가 불길한 느낌이 난다.”

    이 둘은 꽤 촉이 좋다. 벌써 이번 레이드가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직감한 모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로 이 사건에는 거물급 악마성좌 하나가 관여되어 있어.”

    고정 S+등급 몬스터. 오즈와 마몬에 이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열일곱 절대자 중 하나.

    근 15년간의 미래를 겪어 본 나만이 놈의 위치를 알고 있다.

    “자, 어디 살펴보자고.”

    나는 오염된 피 사건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북방의 한 마을로 향했다.

    *       *       *

    예전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지만 이제는 꽤 고렙 여행자들로 붐비게 된 북방의 한 마을 ‘줄구룹(Zul'Gurub)’.

    환경도 몬스터도 가혹한 북대륙의 특성상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줄구룹 근처의 필드나 던전들은 위험한 모험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나름대로 인기가 꽤 있는 사냥터이다.

    특히나 가혹한 설산에서 쭉 이어진 평지와 구릉지대를 건너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줄구룹은 기본적인 소모품이나 장비 등을 사고 팔 수 있는 초반 마을이기에 유동인구가 꽤 많은 편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오염된 피 사건’은 바로 이곳 줄구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줄구룹에 있던 NPC나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이것이 가혹한 설산을 넘어 중부대륙까지 퍼졌던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미래 지식을 더듬었다.

    ‘……어디 보자. 예전에는 어땠더라?’

    이 병은 점진적으로 체력이 닳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병으로 인간, 오크, 리자드맨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확산되었다.

    심지어 몬스터들에게도 감염되어 전염병의 확산 경로는 엄청나게 넓고 복잡해졌고 이 때문에 한때 북대륙 전체가 여행금지구역으로 설정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이 병에 감염되게 된다면 피부에 녹색 반점이 생기고 입에서 썩은 피를 게워내다가 쓰러져 죽게 된다.

    그리고 그 시체에는 역한 냄새를 내뿜는 구더기가 들끓게 되는 것이다.

    어지간한 독 저항력이 있지 않고서야 이 전염병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꽤나 레벨이 높다 하는 중렙 이상의 유저들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깊게 쌓인 눈에서 발을 빼내던 드레이크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예전에 와우(Wow)라는 게임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 사례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예전에도 한 유명한 게임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지.”

    다음은 모 RPG게임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1. 독 데미지를 주는 보스 몬스터가 플레이어들의 펫을 감염시킴.

    2. 펫은 전투 종료 후 아공간에 들어가 있다가 훗날 마을이나 필드 등에 소환. 그때 감염되어 있던 독이 사방으로 퍼짐.

    3. 보스 몬스터의 독은 주변에도 강력한 독 데미지를 뿌리며 계속해서 서로를 전염시키는 특성이 있었기에 마을의 플레이어들이 전멸함.

    4. 하지만 이 게임의 NPC들은 죽지 않기에 이 독에 감염된 상태로 계속 살아 있었고 말 그대로 ‘보균자’가 되어 새로운 플레이어들을 계속해서 감염시킴.

    5. NPC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독 상태이상이 옮기 때문에 도시에 들어온 다른 플레이어들이 대거 감염, 도시 전체에 역병이 창궐하게 됨.

    6. 병에 걸린 몇몇 고렙 유저들은 자기가 병에 걸린 줄 모르고 계속해서 다른 필드와 마을로 이동했기 때문에 대륙 전체에 무시무시한 역병이 돌게 됨.

    7. 해독제라고 속이고 일반 포션을 파는 사기범, 병을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자경단, 일부러 병을 퍼트리기 위해 난동을 부리는 이들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타남.

    8. 결국 서버 리셋.

    이 사건은 BBC 뉴스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전염병의 실제적인 확산경로의 예’로서 의학 저널이나 각종 논문들에 실릴 정도로 학계의 관심도 높았다.

    심지어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의 부서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 정식으로 연구 대상으로 삼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뎀에서도 비슷한 사건으로 번졌지. 그 규모가 훨씬 더 막대하긴 했지만.’

    나 역시도 오염된 피에 감염되어 몇 번 죽었던 적이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감염되어 죽은 뒤 부활하면 또 죽고, 부활하면 또 죽고… 진짜 열 받았지. 오로지 해독제를 파는 물약상점이나 신관이 있는 신전만이 안전지대였어.’

    보균자 플레이어들이 인근 마을을 습격하거나 감염 구역으로 미감염 플레이어들을 안내해 감염시키는 등 미친 짓만 하지 않았더라도 피해가 훨씬 덜했을 것이다.

    당시 이 오염된 피로 인한 역병 때문에 대륙 인구의 1/3이 사멸했을 정도이니 말 다한 셈.

    나는 이 사건이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번지기 전에 미리 싹을 자르러 온 것이다.

    다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보다 먼저 행동하지 못했던 것은 ‘줄구룹’ 마을에서 대규모 감염 사태가 발생하기 전, 최초 감염자가 어디에서부터 생겨났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아키사다 아야카의 증언으로 확실해졌다.

    나는 줄구룹에서도 동북쪽으로 한참 더 내려가면 나오는 설원지대에 주목했다.

    가혹한 설산을 살짝 빗겨가 동대륙 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진 분지 지형.

    아키사다의 제보에 의하면 아무래도 역병은 그쪽에서부터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끔찍한 역병이 동북부 설원지대를 넘어 줄구룹까지 번지기 전에 막는 것이 좋겠다.

    촤악-

    나는 북대륙의 지도를 펼쳤다.

    동북부 설원지대에서 줄구룹까지는 줄곧 평탄한 길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 거리가 상당한지라 역병이 번지기는 힘들다.

    거기에 몬스터들의 개체수도 적고 대부분은 거의 자기 활동반경 안에서 벗어나는 성향이 아니기에 역병의 매개체가 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의도적인 냄새가 난다는 말이지.’

    그때 옆에 있던 윤솔이 나의 추측을 뒷받침했다.

    “어진아. 우리 전에 비슷한 일을 한번 겪어 본 적이 있지 않아?”

    그녀의 말대로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역병을 전에 이미 한번 겪어 본 적이 있었다.

    ‘데린쿠유 역병 사태’

    마몬을 처치하기 위해 들린 드워프들의 마을에서 이미 한번 겪어 봤던 일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유저들이 실제로 죽어 나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죽어 나갈 것이라는 것 정도?

    “아키사다 덕에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었어. 정확한 역병 포인트를 바로 찾았으니 말이야.”

    지금쯤 해저도시 아틀란둠을 탐험하고 있을 그녀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나는 제보를 해 준 아키사다에게 다시 한번 감사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문제는 이 역병을 퍼트리려는 놈이 몬스터냐, NPC냐, 플레이어냐 하는 점인데…….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플레이어들이 관여되어 있을 것 같다.”

    내 기억 속 최초 오염지인 줄구룹은 아직 오염되지 않았다.

    그리고 슬슬 역병이 퍼지고 있다는 동북부 설원지대에는 별다른 NPC나 몬스터가 존재하지 아니한다.

    물론 역병의 근원 자체는 몬스터이겠지만 그것을 옮기는 매개체는 아무래도…….

    그때.

    “어진.”

    혼자서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고 있던 드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 오염된 피 사건을 재현하려는 놈들이 있다는 건가?”

    “그렇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몬스터의 짓이라기보다는 플레이어들의 짓일 것 같아. 정황 상 그렇기도 하고 느낌도 그래.”

    “흐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뭐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지?”

    드레이크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들을 우르르 죽여서 대체 얻는 것이 뭐가 있다고?

    나는 합리적으로 추측했다.

    “다른 사람들을 죽여서 카르마를 쌓으려는 것이겠지. 아마 히든 퀘스트나 업적 보상 같은 것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정말 남의 고통에 즐거워하는 사이코거나.”

    그러자 드레이크가 내 추리를 한 몫 거들었다.

    “……혹시 ‘백섭’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백섭.

    롤백(Roll Back)을 뜻하며 시스템 고장 이후 주행 프로그램을 재개하는 것을 말한다.

    데이터의 스냅 샷 및 프로그램은 항상 주기적인 간격으로 기억되어 있으니 시스템은 고장 직전의 스냅 샷으로 되돌아가서 그곳부터 재개된다.

    한마디로 서버를 일정 시간 앞으로 리셋시키는 것이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오염된 피를 퍼트리고 다니는 놈들이 백섭을 노리고 있다고? 그놈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아?”

    “그냥 추측이다.”

    내 물음에 드레이크는 인터넷 창을 열어 스크린 하나를 띄워 주었다.

    “백섭을 원한다는 것은 최근에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겠지?”

    그곳에는 인터넷 뉴스 기사 몇 개가 떠 있었다.

    <범죄자들의 도시 ‘그레이 시티’ 범죄율 급감!>

    <새로이 시장이 된 플레이어 덕에 어린이 NPC들이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탈바꿈한 그레이 시티!>

    <그레이 시티에 상주하던 카르마 유저들 대거 추방 명령!>

    <……그 많던 살인자들은 다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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