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18화 (518/1,000)
  • 519화 오염된 피 (1)

    나는 차를 몰고 서울에 있는 한 호텔로 향했다.

    길가에 잠시 차를 대고 있는 동안 나는 핸드폰 문자함에 쌓여 있는 예전 문자들을 한번 슥 훑어보았다.

    아키사다 아야카와의 문자 내역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경기 시작 전에 한번 뵙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ッ>

    아시아 챔피언스 리틀리그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받았던 문자.

    그녀는 당시 면식 없던 나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차갑고 고고한 이미지와는 달리 사용하는 이모티콘들이 조금 의외였던 것이 기억난다.

    이에 대한 나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시합 전에는 일이 많아서 아마 힘들 것 같네요. 대회가 끝난 뒤에는 상관없습니다만.>

    그리고 이에 대한 그녀의 답장은 또한 다음과 같다.

    <좋습니다.

    /)_/)˚。

    ( . .)☆´˚。☆

    ( づ♡ ☆

    그때 꼭 시간 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참, 사람이 온라인이랑 오프라인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핸드폰을 덮었다.

    이윽고, 길가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검은 후드티에 검은 마스크, 얼굴을 가린 챙 넓은 야구모자까지.

    한때 니아의 박보연이 나를 만나러 올 때 저런 복장을 자주 했었다.

    때문에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안녕합니까? 나는 안녕합니다.”

    아키사다 아야카. 그녀는 내 차 조수석 문을 열며 나보다도 더 또렷한 한국어 발음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나 역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가면을 쓰고 있기에 내 표정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 한국어 잘하시네요?”

    “오래 전부터 한국에 관심. 한국어 배워 왔습니다. 비행기에서도 틈틈이 공부했다.”

    뎀 사에서 제공하는 번역기를 쓰지 않고 직접 하는 말이라서 내용은 조금 이상했지만.

    한편, 아키사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당신. 일상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늘 가면과 함께합니까?”

    “그럴 리가요. 밖으로 나올 때만 씁니다.”

    나는 대답을 마치고는 아키사다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키사다 역시도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본다.

    “……?”

    “……?”

    나는 아무런 말이 없는 아키사다에게 물었다.

    “아니, 밥 먹자면서요?”

    “네? 네에.”

    “어디로 갈 건데요?”

    내가 묻자 아키사다의 얼굴에 순간 곤혹스러운 빛이 어린다.

    “저, 저 한국 식당은 잘 알지 못합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지, 왜 민망한 것은 내 몫이지.

    내가 말이 없자 아키사다는 더욱 더 당황했다.

    “그, 그게. 일본이었으면은 맛있는 곳 많이 압니다. 다만 한국은 잘 몰라서. 오면서 조금 검색해 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 프렌차이즈?”

    “……그냥 제가 아는 곳으로 가시죠. 시간도 아낄 겸.”

    “아, 바쁘십니까?”

    “밤에 레이드요.”

    “레이드! 저 역시 그렇습니다. 북방, 바다, 심해로 레이드 갈 예정입니다.”

    계속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기에는 조금 어색하다.

    나는 대화가 길어지기 전에 바로 차를 몰고 호텔을 벗어났다.

    어색할 때는 그저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이 최고니까.

    *       *       *

    나는 여의도에 있는 한 한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은 반찬들이 정갈하고 맛있어서 진짜 가끔, 좋은 사람들과 기분 내고 싶을 때 오는 곳이다.

    특이한 점은 한의사 한 명이 항시 대기하며 손님들을 진맥하고 그날의 건강상태를 점검한 뒤 이에 맞는 약재와 식재료로 매번 새로운 반찬과 요리를 내준다는 것.

    아키사다는 내가 데려온 식당이 마음에 드는지 아까부터 요리들을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과즙과 미나리즙이 섞인 쥬스 한 컵. 한우 채끝살 육회와 약밥 부각. 11년 된 씨간장에 절인 독도새우로 새우장. 무화과 찜에 마, 우엉, 콩, 찹쌀을 갈아 만든 소스. 밤과 계피로 만든 죽. 잣즙과 배즙으로 버무린 대게 살 냉채. 전복 찜. 금태구이. 밤꿀이 뿌려진 약차묵. 자연산 송이와 제비추리 구이. 돌솥밥에 아욱토장국. 오과차 한 잔.

    1인당 35만 원짜리 한정식 코스, 여기에 이 가게만의 유명한 특산주인 레고주 한 병을 곁들이면 13만 원이 추가되어서 총 83만 원.

    ‘내가 아는 식당 중에 제일 고급이란 말이지.’

    나는 반찬들을 집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사다 아야카 역시 반찬들을 먹으며 빙긋 웃었다.

    “가격도 맛도 착한 곳. 이런 곳이 집 근처에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 가격이 착…해? 누가 들으면 시장 구석에 있는 통닭집 온 줄 알겠다.

    ‘하긴, 엄청난 부잣집 아가씨라고 들었는데 이 정도야.’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뭐 하실 말씀 있어서 오신 것 아닙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아키사다 아야카는 젓가락질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는 그 큰 눈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이내,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뭘요?”

    “그때 했던 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아. 그때 그건가?’

    아시아 챔피언스 리틀리그, 한일전 당시 나와 아키사다는 경기 도중 잠시 대화를 주고받았던 적이 있었다.

    ‘왜 우리를 죽이지 않죠?’

    ‘……곧 알게 될 거야.’

    ‘저는 당신의 강함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

    ‘그리고 그 강함의 밑바탕이 되고 있을 당신의 올바른 성정도 믿었죠. 아니 믿었었어요. 그러나 지금 제가 느끼는 배신감은 말로 형언키가 어려울 정도네요.’

    ‘…….’

    ‘남의 굴욕을 자신의 명예로 삼는 이들은 높이 올라갈 자격이 없어요. 최선을 다하는 것은 프로의 본분, 일본 팀의 선수들은 그깟 사망 패널티를 피하자고 당신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당시 나는 조디악의 습격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일본과의 대결에 온 힘을 쏟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키사다는 그런 나의 행동을 오해했던 것이다.

    “그때 드렸던 무례한 말씀을 사과하러 왔습니다. 당신을 오해했습니다.”

    “기사 통해서 이미 들었어요. 괜찮습니다.”

    “……기사요?”

    아키사다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말없이 핸드폰을 열어 뉴스 기사들을 보여주었다.

    [기사] 일본 대표팀 리더이자 국민여동생 ‘아키사다 아야카’ 마동왕에게 호감 표시? “오해 풀린 것이 결정적”, 원래 팬이었는데 더욱 더 팬심 깊어져” 발언 화제.

    [사진] 아키사다의 무결점 외모, ‘쌩얼’로도 빛나요~

    [사진] 일본 팀 인터뷰에서 만난 충격적인 비주얼, 아키사다를 만나다~

    .

    .

    “아아앗!?”

    아키사다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는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그냥 한국의 팬클럽인 ‘마교’에 관심이 있었을 뿐인데 기사들이 이상하게 자극적으로……한국 언론 이상함을 느낍니다!”

    그 말에는 나도 꽤나 동의하는 바이다.

    이후 나는 그녀와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된 화제는 마교, 일명 ‘마동왕사랑교’에 가입하는 방법과 따로 마교의 일본지부를 만들 계획이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앞으로 열리게 될 아시아 챔피언스 빅리그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아키사다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일본. 리틀리그에서 2위 했습니다. 충분히 좋은 성과입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1위를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합니다. 감독님과 멤버들 역시도 시무룩해하고 있지만 상대가 한국이라서 결과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2위도 잘한 거죠. 상대가 나였잖아요.”

    좀 재수 없어 보이지만 지금의 나는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아키사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한국을 상대로 그 정도 분전했으면 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대회에서 싸우며 얻은 경험과 우정, 팀워크 등을 잘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슬픕니다. 마치 어린왕자의 한 구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약간은 이해할 것 같았다.

    어른들은 ‘창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앉아 있는 아주 멋진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하면 그것이 멋진 집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저는 오늘 1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 ‘야, 정말 멋진 집이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죠. 게이머들도 다 그렇잖아요?”

    게이머들 역시 ‘그래픽이 훌륭하고 몰입감도 좋은데다가 자유도까지 높고 오픈월드에 즐길 콘텐츠들도 많은 게임을 플레이했어요!’라고 하면 그것이 멋진 게임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메타크리틱 99점짜리 게임을 봤어요!’라고 말해야 ‘야, 그것 참 갓겜이구나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아키사다도 혹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듣고 보니 또 그런 것 같다고 여겨집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두 달쯤 뒤에 열릴 아시아 챔피언스 빅리그에 대한 내용을 찬찬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참.”

    아키사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북방 레이드를 뛰며 재미있는 정보 하나를 들었습니다.”

    “……?”

    나 역시도 젓가락질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키사다 아야카는 현 일본 최강의 고수다.

    그런 그녀가 흥미를 가질 만한 정보라면 분명 내 구미도 당길 만한 것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현재 북방 외곽에서 ‘오염된 피 사건’이라고 불리는 소동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마 작은 규모의 소란이라서 모르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현재 북방을 개척 중인 우리 길드 사람들도 얼마 전에 풍문으로 들은…….”

    그녀는 내 귀를 쫑긋하게 만들 만한 정보를 꺼내들었다.

    그냥 지나가듯 말하는 것이 아무래도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단순한 호기심 정도로 꺼낸 화제인 듯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 화제를 결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최대한 관심 없는 척 위장하여 물었다.

    ‘오염된 피 사건’!

    시작은 사소했지만 그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했던, 뎀 역사상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대참사.

    최소 하나 이상의 거물급 악마성좌가 개입되어 있는 이 재앙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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