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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16화 (516/1,000)

517화 반격 준비 (1)

…쾅! 땅그랑!

단단한 재떨이가 마호가니 원목 테이블에 기스를 내고는 저 멀리 대리석 바닥에 내리 찍혔다.

차규엽.

지금 그는 몇 장의 보고서를 찢어 버린 직후였다.

“으아아아아아!”

차규엽은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고함쳤다.

화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

여러 보고서에는 각종 치명적인 키워드들이 가득하다.

<#한국 뎀 협회>, <#직무유기>, <#근무태만>, <#월권>, <#부당개입>, <#재무감사>, <#채용비리>, <#부정청탁>, <#승부조작>, <#내부자거래>, <#소환명령>, <#레드문 대표이사>, <#차규엽>……

예전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당시 한국 대표팀인 닳고닳은 뉴비 구단에 대해 협회의 서포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뎀 협회는 엄청난 비난여론에 직면해야 했다.

하루에도 수십만 개의 악플이 달렸고 여러 명의 거물 스폰서들이 등을 돌렸다.

정부 차원에서도 경고가 내려왔으며 대대적인 감시가 이루어질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젠장! 국가대표 선발전 때부터 되는 게 없잖아. 그 밉상 새끼들이 대회에서 성적 부진을 겪을 때를 대비해 일부러 ‘악플러 군단’까지 키워 놨는데…….”

닳고닳은 뉴비.

협회에 기부금은커녕 수수료 한번 내지 않는 건방진 놈들.

세상을 자기 실력 하나만 믿고 사는 이 철모르는 애송이들을 혼내주기 위해 다방면으로 준비했지만… 그 노력은 모두 헛된 것이 되었다.

놈들은 정말로 세상 혼자 살아도 될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성과로 당당히 입증해 낸 것이다.

마치 협회의 도움 따위는 있어봐야 방해만 된다는 태도로!

부들부들부들……

한참 동안이나 몸을 떨던 차규엽은 옆에 서 있던 비서관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요즘도 ‘우리’ 많이 욕먹고 있나?”

비서는 ‘우리’라는 단어에 순간 멈칫했다.

‘우리라니. 욕먹는 건 너 하나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수야 있나.

비서는 반백발의 머리를 침착하게 정리한 뒤 차규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대표님. 여론이 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심각해?”

“많이요. 지금도 하루에 민원들이 수백 통씩 빗발치고 있답니다. 얼마 전에는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청원 한 개가 무려 50만 명의 동의를 받아서…….”

“청원? 뭔 청원?”

“‘한국 국가 대표팀을 밀어 주기는커녕 방해나 하고 앉아 있는 썩은 협회 놈들 옷을 벗겨 달라!’ 라는 내용이더군요.”

그러자.

…빡!

차규엽은 참지 못하고 그만 비서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비서는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듯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곧 첫째가 결혼도 해야 하고 둘째가 대학교도 가야 하니 더러워도 참아야 한다.

차규엽은 그런 비서를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개, 돼지 같은 것들이 감히…….”

하지만 개, 돼지도 50만이나 되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아니 벌이나 개미 같은 곤충도 50만 정도가 되면 살벌할 것이다.

사안이 절대 만만하지 않음을 새삼 깨달은 차규엽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사회에서는 뭐래?”

“부,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젠장. 신형 캡슐도 많이 팔아 줬잖아! 내가 추진한 ‘LINKED3021’버전 신모델이 요즘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데… 내가 회사에 해 준 게 얼만데… 이 새끼들이 은혜도 모르고…….”

“아무래도 연구, 개발 실적과는 별개의 부분인지라 그런 것 같습니다.”

비서의 말에 차규엽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결국. 최후의 수를 쓰는 수밖에 없나.”

차규엽은 혼자서 중얼중얼거리던 끝에 비서를 향해 말했다.

“마동왕, 그놈보다 강한 선수를 키워서 협회의 간판으로 삼는 수밖에 없어. 대중은 결국 실력, 퍼포먼스에 약하니까. 그래, 보여 주면 되는 거야. 협회가 정말 제대로 인재를 발굴해서 키우게 되면 얼마나 대단한 선수를 배출할 수 있는지.”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래. 보여 주겠어. 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선수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말야. 큭큭큭큭. 내 모든 걸 다 바쳐서 마동왕, 그놈을 뛰어넘을 초엘리트를 키워 내 보이겠단 말이다. 이 우매한 대중 새끼들아…….”

지금 프로리그는 마동왕 원탑 체제로 흘러가고 있다.

차규엽은 협회의 모든 역량을 죄다 쏟아 부어 마동왕에게 대항할 수 있는 엘리트 선수를 키워내 프로리그를 투탑 체제로 양분하고자 하고 있었다.

그만큼 현제 뎀의 스타 선수가 가진 위상과 이미지 파급 효과는 어마무시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비서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한 충언에 차규엽의 표정은 또다시 와락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표님. 저번에도 비슷한 프로젝트가 한번 고배를 마시지 않았습니까? 그 왜 ‘마동섭 육성 건’ 때……”

곧 죽어도 바른 소리를 하는 비서.

지도자의 입장에서 사실 이보다 더 고마운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차규엽은 그런 비서의 쓴 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한 번 더 발길질을 했다.

…빡!

비서가 또다시 비명을 참으며 고개를 숙이자 차규엽이 그 위로 으르렁거렸다.

“그 빌어먹을 놈 얘기는 하지 말랬지?”

마동섭.

마동왕과 이름이 같아서 개명까지 시켰던 선수.

한때 국가대표팀을 노렸던 ‘바스터즈’의 에이스.

마동왕을 잡기 위해 본격적으로 투자, 육성했던 히트맨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마태강에게 패배한 뒤로 게임을 접고 은퇴했다.

마동왕은커녕 그의 제자뻘인 마태강에게 굴욕적인 역전패를 당한 것이 충격이 컸던 모양.

거기에 지금 검찰,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면서 마동섭이 관여되었던 불법 리그나 승부조작 등 각종 비리들이 터져 나올 낌새를 보이고 있기에 마동섭은 완전히 나락으로 추락해 버린 셈이다.

재기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았다.

“그리고 어차피 그놈은 일회용까지는 아니더라도 길게 쓸 놈이 아니었어. 인성도 기량도 모두 마동왕을 못 당하지.”

차규엽은 혀를 뱀처럼 낼름거리며 눈을 빛냈다.

“협회의 총력을 다한 투자를 감당해낼 수 있는 인재여야만 해.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서포트할 놈이니 당연히 그만한 그릇을 갖추고 있어야지.”

“그, 그런 선수가 현 한국에 있을까요? 마동왕을 제외하면…….”

비서가 의문을 표하자 차규엽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음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나 눈여겨봐둔 인재가 있지. 그놈이라면 마동왕을 능히 죽여 버릴 수 있을 거야.”

차규엽은 핸드폰을 슥 들어 올렸다.

이내 그의 핸드폰 속에서 마동왕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는 최후의 비밀병기가 정체를 드러냈다.

마동왕   고인물

벗었는가?        X        O

덜렁이는가?      X        O

섹시한가?        X        O

변태인가?        X        O

흥분되는가?      X       O

결론            패       승

어지간한 프로게이머들을 압살할 수준의 피지컬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꿋꿋하게 아마추어 리그에서만 활약하고 있는 절대강자.

프로 리그와 아마추어 리그를 마동왕과 함께 양분하고 있는 또 하나의 규격 외 절대고수.

바로 ‘고인물’이었다.

바로 그때.

“어!?”

차규엽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벌어졌다.

그의 핸드폰 메일함에 붉은 알림 표시 하나가 ‘1’이라는 숫자를 알리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메일함을 열었다.

예전에 고인물에게 보냈던 컨택 쪽지에 답장이 와 있는 것이 보인다.

-----Original Message-----

From: “바스터즈”

To: <[email protected]>;

Cc:

Sent: 2023-12-01 (월) 11:18:09

Subject: 안녕하세요, 스트리머 ‘고인물’ 님. 귀하의 플레이는 늘 감명 깊게 시청하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희 ‘바스터즈’에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고인물 님을 모셔가고자……저희 바스터즈는 국내 우량 기업인 ‘레드문’의 전폭적인 스폰을 받고 있는 탄탄한 프로팀으로……내년 목표는 국내 1위 프로팀 타이틀의 탈환이며……최종적으로는 마동왕 선수를 잡아내어……고인물 님이 국내 NO.1으로서 군림하실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서포트를……꼭 회신 주시기를 간절히 희망……

답장은 간결했다.

-----Original Message-----

From: “고인물”

To:

;

Cc:

Sent: 2024-03-21 (목) 12:30:19

Subject: 얼마 줄 건데?

*       *       *

한편.

나는 핸드폰에 뜬 메일을 보고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차규엽. 기껏 생각한다는 게 나를 섭외하는 거였냐?’

나를 죽이기 위해 나를 섭외하다니. 이거 꽤 낯익은 구도다.

그리고 과거 그 낯익은 구도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던 여자가 지금 내 옆에 있었다.

유다희. 그녀는 지금 마교 팬미팅 건으로 나와 카페에서 토의 중이었다.

“이번에 홍대에 마동왕 스토어 오픈 계획이고요, 피규어와 굿즈, 애장품뿐만 아니라 이모티콘 사업까지 진행 중이에요. 마동왕 테마 OST 작업도 순조롭고요. 이건 제가 직접 참여했답니다! 의외로 제가 또 음악에 조예가 깊거든요. 그리고 음, 이와는 별개로 봉사활동 성과가…….”

유다희는 마교 운영을 놀랍도록 잘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새삼스러운 행정력에 감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사실 차규엽의 메일을 받기 전까지는 머릿속으로 얼마 전 유다희가 가져온 한 S급 아이템에 대한 것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카르마의 일기장> / 주문서 / S

한 사람의 ‘업보(業報)’가 기록된 주문서.

제일 먼저 소유한 이의 업보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어 더 이상 무언가를 적어 넣을 여백은 없을 것 같다.

※원 소유자: 조디악 번디베일

-특성 ‘싸움 나락’ 사용 가능

유다희가 살인자들의 탑 5층에서 카르마를 죽이고 얻은 아이템.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디악을 한번 거쳐서 유다희에게 떨어졌다.

나는 이 점을 통해 기분 나쁜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었다.

‘조디악이 벨페골 사냥에 성공했군.’

믿어지지 않지만 이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마의 상위종이자 보스가 벨페골이니 이 아이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는 그뿐이다.

‘다소 억지인 것 같지만… 벨페골의 존재 자체가 규격 외이고 억지이니. 어쩔 수 없지. 이 아이템이라도 가로챈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아마 조디악 역시도 꽤나 열불이 터질 것이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카르마의 일기장’ 아이템에 대해 생각했다.

낡고 불길한 종이.

검은 배경에는 흰 초승달이 그려져 있고 해골과 흰 도마뱀 장식이 음각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설정 상 벨페골과 흰 용이 적대 관계이긴 했지. 설마 이 아이템의 용도가……?’

내가 속으로 게임 설정과 아이템의 성능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을 때.

쾅!

카페의 문이 힘차게 열렸다.

조용한 카페인지라 더 크게 들리는 소리.

“형님!”

유창이 내 쪽으로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녀석은 오늘 캡슐방 운영 성과를 보고하러 왔다.

나는 약간의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어때, 운영은 잘 돼? 흑자야?”

그러자.

유창의 표정이 순간 미묘해진다.

“저… 형님. 흑자이긴 흑자인데.”

이내 녀석이 내게 내민 보고서의 그래프와 다이어그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상당히 놀라운 결과를 말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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