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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515화 (515/1,000)
  • 516화 최악의 빌런 (6)

    살인자들의 탑 붕괴로부터 얼마 뒤.

    우리는 그레이 시티에 도착했다.

    [허, 허허허허허. 자네들 결국 해냈군.]

    그레이 시티의 시장 시혼은 도시 입구에 서서 우리를 두 팔 벌려 맞이했다.

    그는 가식적인 미소를 띤 채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자네들이 해낼 줄 알고 있었다네. 정말 훌륭하게도 이 도시의 적폐들을 몰아내 주었……]

    그 뒤로 뭐라뭐라 형식적인 멘트들이 이어진다.

    나는 귀찮은 마음에 [SKIP]버튼을 연타했다.

    그러자 시혼 시장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네놈들 덕분에 범죄자들에게서 들어오던 상납금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 이래서는 다음 시장 선거 때 쓸 정치자금이 없어진다고!]

    태세 전환하는 것 좀 보소, 거 참 속도감 있는 전개로군.

    동시에 시혼 시장 뒤에 있던 경비병들이 창끝을 이쪽으로 겨눈다.

    나와 유다희의 뒤에 있던 자경단원들 역시 창을 들었다.

    차차착-

    양편의 병사들이 서로에게 창을 겨눈다.

    아무래도 내전은 불가피할 모양.

    유다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앞에 있는 병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상태창을 열어 일부 페이지를 신분증처럼 제시했다.

    -<이어진>

    LV: 91

    호칭: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의 명예 백작(특전: 귀족)

    “거, 한낱 소도시의 시장 주제에 너무 오만하군.”

    나는 시혼 시장을 깔아 보며 말했다.

    ‘귀족’이라는 특성은 특별히 전투력에 보탬이 되지는 않지만 NPC들에게 있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금껏 안 써먹고 뭐했냐고 물어보면 할 말 없지만.’

    뭐, 아무튼 내가 신분을 증명하자 눈앞에 있던 적대 경비병들의 몸이 전부 얼어붙었다.

    간혹 속세에 초연한 NPC의 경우에는 먹히지 않을 때도 있지만, 권세나 이점에 특히나 예민한 그레이 시티의 NPC들에게는 그 효과가 두 배, 아니 몇 배로 들어가는 모양.

    [마, 말도 안 돼. 대도시 유토러스의 백작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곳에…….]

    시혼 시장은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NPC와 말다툼을 벌일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짤막하게 내 의사를 표출했다.

    “꿇어라.”

    […….]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그러자 시혼 시장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직감한 자 특유의 눈물을 짜낸다.

    [빌어먹을……핵이나 맞고 뒤져 버려라.]

    그것이 시혼 시장의 마지막 대사였다.

    이내 그는 돌변한 경비병들에게 체포되어 지하 감옥 깊숙한 곳으로 끌려갔다.

    나는 고개를 굽실굽실 숙이는 경비병들을 이끌고 그레이 시티로 귀환했다.

    *       *       *

    그 뒤로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유다희는 퀘스트에 대한 보상으로 특별한 호칭 하나를 받았다.

    ‘그레이 시티의 초임 시장(특전:귀족)’이라는 호칭이 바로 그것이다.

    설정 상 시혼 시장의 하야 이후 새로운 시장을 선출하는 투표가 열렸고 자경단장으로서 꾸준히 명성과 호감도를 쌓아 왔던 유다희가 선출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동안 카르마 수치가 높았던 이들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이들의 투표권이 모두 박탈되었기에 그레이 시티의 유권자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었다는 것도 한 몫 했다.

    “플레이어 사상 최초로 성주가 된 느낌이 어때?”

    내가 묻자 유다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런 것도 가능한 줄 몰랐어. 성주는 NPC들만 할 수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니 상관없는 일이지. 다만 나중에 세금 관리하고 도시 평판 관리하려면 꽤나 힘들 거야. 레이드 뛸 시간도 잘 안 날걸?”

    “으아, 나는 서류작업은 질색인데.”

    유다희가 혀를 내밀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성주라는 직업이 얼마나 꿀인 줄 모르니 하는 말이리라.

    성주는 성 안에서 들어오는 세금만으로도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다.

    그레이 시티의 지하경제가 완전히 뿌리 뽑혔으니 한동안은 적자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곳은 분명 살기 좋은 도시로 바뀌겠지.

    “나중에 성 안 뺏기게 조심하라고. 아직은 아무도 이용하지 않지만, 이 게임에는 길드 간의 공성전 기능도 엄연히 존재하니까.”

    “헉!? 공선전도 돼?”

    유다희는 깜짝 놀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유다희가 앉아 있는 시장실의 창문으로는 저 아래 그레이 시티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나는 중앙 광장에 크게 솟아있는 조형물 하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저것 좀 어떻게 안 되냐?”

    그것은 바로 나의 모습을 본뜬 동상이었다.

    높이 482㎝, 너비 140㎝의 고인물 동상.

    그것은 그레이 시티를 구한 영웅을 기념하기 위해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모금해 세웠다는 모양이다.

    ‘……황당하네. 이게 히든 퀘스트의 보상이라니.’

    심지어 주민들이 얼마나 동상을 만지고 쓰다듬었는지 한 군데만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유다희는 그것을 보며 깔깔 웃었다.

    “시혼 시장이 전 시장 로드리고의 동상을 파괴해도 죄를 묻지 않는다는 설정 기억해?”

    아! 기억난다.

    아주 오래 전, 유다희와 함께 게임 퀴즈대회에 나갔을 때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Q: 이곳 ‘그레이 시티’는 전부 시장 명령으로 인해 기물 파손을 엄금하고 있습니다. 도시 안에 있는 조형물을 파괴했다가는 상당한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를 당하게 되는데요. 놀랍게도 이 도시에 있는 조형물 중 파괴해도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 기물이 있다고 합니다. 과연 어떤 것일까요?

    A: 정답은 전 시장 ‘로드리고’의 흉상입니다. 현 시장 시혼은 전 시장 로드리고와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오로지 그의 흉상만큼은 파괴해도 죄를 묻지 않습니다.

    당시 유다희는 이 어려운 문제의 답을 맞혔었다.

    나는 옛날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 그때 퀴즈대회 끝나고 얼음물 속에 처박혔었잖아.”

    “어… 뭐?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참. 콱 씨.”

    유다희는 이마에 핏줄을 세운 채로 옆에 있는 비서관에게 말했다.

    “비서관님. 저기 있는 고인물 동상은 파손해도 기물파손 죄 묻지 마세요.”

    ……속 좁은 것은 그레이 시티 시장들의 공통 특징인가 싶다.

    뭐 아무튼.

    나는 동상에게서 시선을 뗐다.

    히든 퀘스트의 보상으로 게임 안에 나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남은 것은 어떻게 보면 참 명예로운 일이다.

    뭐 실질적인 보상은 다른 것으로 받았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살인자들의 탑에서 얻은 아이템을 떠올렸다.

    -<‘오무아무아’의 악몽 증명서> / 주문서 / S

    57159610251136525112357159369871477485698566222250161127541262853101067961230195260819856209909126037211203

    -당신이 겪은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증명합니다.

    혹은 당신이 겪은 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임을 증명합니다.

    기분 나쁜 아이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뭣에 쓰는 물건인고?’

    나름 S급 아이템이니만큼 나중에 무언가 역할이 있겠지 싶다.

    그리고 사실 얻은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어진>

    LV: 91

    호칭: 살인자들의 탑 5층의 주인(특전: 맵 디자인) /

    ‘살인자들의 탑 5층의 주인’이라는 호칭, 나는 한 던전을 소유할 권리를 얻었다.

    거의 모든 맵이 24시간마다 초기화되는 가운데 변치 않는 부동산 하나를 분양받은 셈이니 이 얼마나 귀중한 기회인가. 심지어 이곳에는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들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나의 천하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보다도 더욱 더 큰 수확이 있었다.

    -<지옥불 코어 반쪽> / 재료 / S

    반으로 쪼개진 빨간 구슬 조각.

    너무나도 뜨거워 악마조차도 열상(熱傷)을 입고 만다는 지옥 동쪽의 불길이 담겨 있다.

    -<츄츄의 슬라임 젤리> / 재료 / D

    그레이 시티의 명물 슬라임 젤리.

    슬라임으로 만든 젤리답게 주변 환경의 영향을 잘 받는다.

    그것은 바로 ‘지옥불 코어’와 ‘슬라임 젤리’의 연계방식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슬라임 젤리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잘 받지. 따라서 지옥불 코어와 함께 숙성시킨다면 어느 정도 지옥불 코어의 위력을 품게 할 수 있다.’

    조디악은 내가 이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줄 알고 거리낌 없이 공략을 사용했지만…… 내가 누군가? 언뜻 보기만 해도 어떤 매커니즘으로 이루어진 공략인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다.

    괜히 고인물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이번 히든 퀘스트 클리어를 통해 츄츄와 나의 호감도는 MAX가 되었지.’

    츄츄는 그레이 시티 안에서 슬라임 젤리 제조법을 알고 있는 유일한 NPC이다.

    그녀는 내가 부탁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슬라임 젤리를 대량생산 해 주겠지.

    나는 츄츄를 위해 살인자들의 탑 5층을 기꺼이 내주었다.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최강 난이도의 메이즈로 입구를 틀어막은 뒤 후방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게끔 모든 편의시설을 제공했다.

    당연히 츄츄가 원한다면 언제든 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텔레포트 장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츄츄가 원하는 손님만을 특정해 초대하는 기능 역시 활성화 되어 있다.

    [고마워요 아저씨.]

    츄츄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씩 웃었다.

    “여기서 젤리나 많이 만들어 놓으렴. 만드는 대로 내가 다 살 테니까.”

    [네! 오직 아저씨에게만 드릴게요!]

    “그래, 그래. 급료는 매달 입금될 거야.”

    슬라임 젤리의 레시피는 들었지만 만드는 과정이 어려워 전문가가 아니면 생산이 힘들 것 같았기에 츄츄를 아예 고용한 것이다.

    츄츄는 도시 안에서 자기와 친한 아이들을 모아 열심히 젤리를 만든다.

    자연스럽게 일자리들이 생겼고 아이들은 앵벌이를 그만둘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발록과 데모고르곤을 쌩까고 간 건 지옥불 코어의 사용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알겠군. 조디악에게 큰 선물을 받았어.’

    놈이 지옥불 코어와 슬라임 젤리를 이용해 벨페골을 빈사상태까지 몰고 갔던 것이 떠오른다.

    놈이 했다면 나 역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야, 변태.”

    유다희가 뒤에서 날 부른다.

    그녀는 내 시선을 슬쩍 피하며 콧등을 긁적이고 있었다.

    “그……이번 레이드 말인데.”

    “?”

    “아니, 내가 아이템 하나를 주웠거든. 그거 너한테도 권리가 있으니까…….”

    유다희가 잡은 몬스터가 있었던가? 있어 봐야 잡몹이었을 텐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손짓했다.

    “너 써.”

    “……엉?”

    “나도 주문서 얻었잖아. 네가 얻은 건 네가 쓰라고. 도끼도 부서졌는데.”

    물론 내가 얻은 주문서가 S급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다희는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는다.

    “그,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가 쓰고.”

    “어어. 그래. 그럼 난 간다.”

    이제 그레이 시티에 볼일은 끝이다.

    나는 다음 계획을 위해 재빨리 몸을 움직여 시장실을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 했다.

    그때.

    “야아! 야! 잠깐만!”

    뒤에서 유다희가 소리쳐 부른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석양빛을 받아 새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게.”

    뭐야 아까부터?

    내가 빤히 바라보자 유다희는 우물우물거리다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입을 연다.

    “뭐, 너, 이번에, 크흠! 약간은, 공을 인정한달까, 기여도가 있달까, 노력이 유의미했달까, 음, 오, 아, 예, 저거 뭐냐…… 나로서는 고마움을 약간 느껴야 하는 상황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너한테 에헴, 큼! 약간 정도는 뭐, 빚졌달까? 앞으로는 좀, 음, 믿어 볼 만하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그 뭐냐…….”

    태어나서 처음 듣는 유체이탈 화법이었다.

    나는 한쪽 눈살을 찌푸렸지만 내 발끝을 보고 있는 유다희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

    “아니, 근데, 그리고 있잖냐, 그, 자각흉몽아귀, 뱃속에서, 저기, 아무리 내가 너 취향……이라도, 그렇게 막, 괴롭히고, 틱틱거리면 좀, 곤란하지 않나…… 우리가 초딩도 아니고…… 할 말 있으면, 제대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뭐, 대답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음에도 뭐 또, 저 뭐냐, 그, 특별한 일 없거나 특별한 일 있으면, 레이드 같이 뛰는 것 정도야 뭐…….”

    하지만.

    유다희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아, 다음 레이드 시간 늦었네.”

    바람 같은 몸놀림으로 그레이 시티의 성벽을 뛰어넘는 나.

    “야아아아! 사람이 말을 하는데…… 아오, 꺼져 걍!”

    그 뒤로 유다희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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