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최악의 빌런 (5)
조디악 번디베일.
그의 표정은 지금 잔뜩 일그러져 있다.
언제나 여유가 가득하던 미소는 간 곳이 없었다.
졸린 듯 반쯤 감겨 있던 두 눈은 부릅떠진 채 핏발이 곤두섰다.
그리고 그런 조디악의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은 작은 키의 어린아이 하나.
[One for All, All for One.]
조디악을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소년.
그는 바로 윌리엄 링트 윌슨(William Linked Wilson).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개발한 뎀 유니버스 사의 총수였다.
“으…… 으으…….”
조디악은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두려운 시선으로 눈앞에 있는 윌슨을 쳐다본다.
이윽고.
조디악을 발견한 윌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린다.
[Welcome to Closed Beta. The show will start soon.]
동시에.
조디악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손톱으로 자기 얼굴을 할퀴며 발버둥치는 조디악.
그리고 그를 따라 김정은 역시도 덜덜 떨며 주저앉았다.
이윽고, 윌슨의 주위로 흰 가면을 쓴 사람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도, 도깨비! 도깨비들이 온다!”
조디악은 덜덜 떨며 말했다.
김정은 역시도 HP가 깎여나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처리반 놈들, 모습이 완전히 그때 그대로네. 조디악 놈은 기억력도 좋아.”
김정은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흰 가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들 중에는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수많은 동료들 사이에서 살짝 벗어나 달려오는 여자.
그녀는 긴 머리를 광적으로 휘날리며 쇄도했다.
덜컥거리는 가면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김정은과 꼭 닮아 있었다.
…콰쾅! 콰콰콰쾅!
흰 가면들은 앞을 가로막는 고대화석 해골병들을 순두부처럼 박살냈다. 훈련이 잘 되어 있는지 해골병을 뚫고 들어오는 데 일말의 지체도 없었다.
흡사 해골병들을 유령처럼 통과하는 듯 한 움직임.
[30211273062190990265891806259103216976010135826214572116105222266589658477417896395175321152563115201695175……]
벨페골 역시도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몸을 꿈틀거리며 점점 층 아래로 번져오고 있었다.
“……좋아, 여기서 끝.”
김정은의 짧은 탄식이 신호가 되었다.
결국 조디악 일행은 백기를 들었다.
“네 판단이 그렇다면야. 다들 튀어! 빠지자고!”
조디악은 핏기가 싹 빠져나간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
비록 공포로 점철된 동공이긴 했으나 아직 기이한 열기가 어려 빛나고 있는 것이다.
쿠르륵! 쿠르르르륵!
지옥불 코어와 슬라임 젤리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벽처럼 높게 솟구쳐 올랐다.
조디악과 매드독 일당은 그 방화벽 뒤에 숨어 연신 후퇴했다.
“……비장의 패를 써야겠다. 탑 밖으로 나가자고!”
조디악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의 한 수가 있지 않으면 지을 수 없는 표정들이었다.
* * *
살인자들의 탑.
7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커다란 던전.
피와 업, 죄와 굴레로 쌓은, 인간이 만들어 낸 지옥도.
그 역사는 까마득하여 기원을 아는 이가 드물다.
존재하는 모든 범죄자들의 성전(聖殿)이나 다름없는 곳.
…콰콰콰쾅!
그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탑의 허리 부근, 1만 3천에 이르는 해골병 군단이 뿌연 골분으로 변해 자욱하게 솟아오른다.
“도망쳐!”
탑 밖으로 나온 조디악 일행은 잿빛으로 우거진 숲을 향해 도망친다.
[30211273062190990265891806259103216976010135826214572116105222266589658477417896395175321152563115201695175……]
벨페골.
탑 밖으로 나온 이 불길한 존재는 숲의 공기가 낯선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디악 일행이 도망친 방향을 향해서 말이다.
……한편.
나는 그 광경을 탑에서 멀리 떨어진 수풀 뒤에 숨어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이 아이템의 설명대로 됐네.”
나는 품 안에서 꺼낸 아이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피 묻은 열쇠> / 재료 / ?
관여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 열쇠.
문 저편에서 무언가 불길한 것을 끌어낼 것 같다.
과연 벨페골은 봉인에서 풀려난 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살인자들의 탑은 맵의 일부이니 24시간 뒤에 복구되겠지만…저 벨페골이 과연 여기로 다시 돌아올까?
……돌아올 수도 있고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벨페골은 고정 S+등급의 초고위 몬스터이고 밝혀진 것도 거의 없는 존재이니 어떻게 행동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
다만 세상이 많이 시끄러워지긴 할 것이다.
‘만약 조디악 놈에게 지옥불 코어가 하나만 더 있었다면, 혹은 슬라임 젤리를 대량 생산하기만 했다면…….’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다희가 조디악을 죽여 지옥불 코어의 반쪽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혹은 츄츄가 조디악에게 젤리 레시피를 빼앗기기라도 했다면.
그렇다면 조디악은 벨페골 레이드에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이란 것은 없다.
살인자들의 탑은 붕괴했고 결국 조디악은 벨페골 레이드에 실패했다.
단순히 실패만 한 것이 아니라 결국 모두 죽게 되겠지.
‘벨페골은 현 시점에서는 절대로 잡을 수 없는 몬스터, 헛수고하는 거야.’
나는 멀어져 가는 조디악 일행과 벨페골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풀밭에 드러누웠다.
화산재가 풀썩거리자 눈이 조금 매웠지만 그래도 등은 푹신하다.
붕괴하는 던전을 빠져나오느라 HP가 말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리치왕의 심장이 더 이상 활력을 보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많던 포션도 결국 다 떨어진 모양.
‘어디 혈액포식 좀 할 데 없나?’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좋은 대상 하나를 발견했다.
내 옆에 드러누운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유다희였다.
“실례.”
나는 손가락을 뻗어 유다희의 몸에서 피를 뽑아냈다.
이내 자기의 HP바가 흔들리는 것을 느낀 유다희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내 쪽을 한번 돌아보더니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어억!? 미친놈아! 뭐 하는 거야!?”
“내가 체력이 다 떨어져서.”
“……근데 왜 내 피를 빨아먹냐고!? 너 진짜 변태냐!?”
유다희는 도끼를 들어 내게 빼앗기는 혈액의 흐름을 끊는다.
하지만 최대 체력이 얼마 되지 않는 나는 이미 풀피로 회복한 뒤였다.
“거 참, 매몰차구만. 헌혈 좀 한다 생각할 일이지.”
“어우, 밉살맞은 놈. 잠깐이라도 좋게 보려 한 내가 븅신이지!”
유다희는 나를 향해 도끼를 치켜들려다가 힘이 없는지 이내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때.
파삭-
유다희의 도끼가 결국 가루로 변해 부서졌다.
5층에서 조디악의 깎단을 연거푸 막아 낸 결과였다.
“……아앗!?”
유다희는 가루가 된 애병을 황급히 그러모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니 꽤나 정든 무기였던 모양.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나 역시도 아끼던 무기가 파괴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어 저 심경을 얼추 안다.
그나마 나는 강화를 하다가 깨트려 먹었기에 답도 없지만 유다희의 경우에는 강적과 싸우다 그런 것이니 더욱 심경이 복잡하리라.
‘……나중에 세희 통해서 쓸 만한 것 하나 전해 줘야겠군.’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바스락-
건너편의 수풀이 요란하게 울렸다.
“……!”
나와 유다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덤불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 너머에서 튀어나온 것은 꽤나 많은 수의 경비병들이었다.
칙칙한 회색의 미늘갑옷, 전부 다 그레이 시티 소속으로 보인다.
“……흐음.”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그레이 시티의 시장 시혼이 조디악을 비롯한 살인자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그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맨 앞에 있던 병사가 내게 창끝을 겨누며 물었다.
[시혼 시장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살인자들의 탑에 불법 침입한 범죄자들을 즉결 처분하라는 명령입니다.]
시혼은 내가 카르마를 사냥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안정적으로 범죄자들과 붙어먹으려면 카르마가 사라지면 안 되지.
하지만 이걸 어쩌나? 카르마는 이미 죽었는걸.
“NPC들과 싸우긴 싫지만 별 수 있나.”
나는 깎단을 빼들고 경비병들의 앞에 섰다.
그러자 뒤에서 유다희가 묻는다.
“야아, 변태. 자신 있어? 그레이 시티의 NPC들은 다 레벨이 높아. 나는 도끼도 없고…….”
확실히 나 하나라면 몰라도 유다희까지 보호하려면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이참에 생색이나 낼까 해서 어깨를 으쓱했다.
“빚졌지? 나중에 이자 쳐서 톡톡히 갚으라고.”
눈앞에 있는 병사 NPC들의 수는 언뜻 보기에도 수십 명, 레벨도 상당히 높은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험한 싸움이 예상된다.
수많은 사선들을 넘어온 터라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많으니 한 명씩 차례대로 덤벼 봐라.”
나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경비병들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죄송하지만 한 명씩 덤비라는 건 무슨……?]
[저희는 한꺼번에 덤빌 것입니다.]
……쳇.
자연스럽게 일대일 대결로 넘어가 볼까 했지만 그레이 시티의 경비병들은 모두 정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 금세 내 의도를 간파한 모양이다.
뒤에서 유다희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꽈악-
깎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래 다구리에 장사 없다고 저 인원이 한 번에 덤비면 나도 상처 없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이번만큼은 내 실력과 운에 기대 볼 수밖에 없는 노릇.
……한데?
파사사삭-
경비병들이 거리를 좁히기 바로 전, 주변의 풀숲들이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엇!?]
그레이 시티의 병사들이 적잖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이럴 줄 알았다, 배신자들!]
[꼼짝 마라! 우리 단장님에게서 떨어져!]
[거기 알몸 변태! 너부터 떨어지란 말이다!]
수풀 너머에서 또 다른 무리의 병사들이 튀어나와 먼저 튀어나온 병사들에게 창끝을 겨눈다.
그들은 바로 그레이 시티의 자경단원들, 유다희의 부하들이었다!
“…….”
깎단을 내리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유다희가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 보인다.
“상황이 바뀌었네?”
“…….”
으쓱대는 꼴이 뭔가 불쾌하다.
마치 아까의 나를 보는 듯한 광경…… 흡사 여자 고인물이 아닌가?
어째 얘는 큰 레이드를 하나 뛸 때마다 점점 나를 닮아 가는 것 같았다.
내가 대답할 힘도 없어 픽 웃자 유다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추가했다.
“빚졌지? 나중에 이자 쳐서 톡톡히 갚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