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마지막에서 한 발자국 더 (4)
유다희는 아까부터 계속 어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야, 야야야야야야. 근데 나랑 되게 닮았다 그 여자. 나이는 좀 먹었어도.”
“…….”
“엇? 설마 나 같은 글래머 타입이 취향? 미안, 이 누나는 좀 듬직하고 힘 센 남자가 취향이라~”
그녀는 ‘예를 들면 마동왕 님처럼 말이지’라는 말을 뒤에 붙일까 하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왜 스스로 입을 다물었는지 본인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그나저나, 진짜 나랑 존똑…아니, 완전 똑같이 생긴 여자를 좋아했네? 진짜 나 같은 타입이 취향인가? 으음. 하긴, 나 같은 타입이 취향이 아닌 남자가 어딨겠어. 근데 무의식 속에까지 나올 정도면 진짜……. 흐음, 설득력 있어.’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유다희.
그녀의 낮아져 있던 자존감이 조금 높아지는 동시에.
빤-
유다희는 또다시 시선을 들어 앞서 걸어가는 어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상하이의 호텔 비상구에서 허무하게 죽을 뻔한 이후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자신을 업어 주었던 등.
이상하게도 그 등과 어진의 등이 자꾸만 겹친다.
‘아오! 내가 또 뭔 생각을……!’
유다희는 후끈거리는 두 뺨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이제 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근데 자꾸 등만 보게 되네.’
저 벗은 몸이 뭐가 좋다고 자꾸 보게 되는지 참.
기껏해야 남들보다 조금 더 넓고 탄탄하며 잔근육이 잡혀 있고, 두 기립근이 우뚝 솟아 있을 뿐인 저런 등 따위…….
유다희는 머리를 흔들어 상하이에서의 일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와, 근데 그때 악몽 속에서 본 그 여자. 되게 나쁜 년이던데. 쟤는 어쩌다 그런 여자한테 걸렸대? 나이도 한 열 살은 많아 보이더구만. 설마 연상 취향인가?’
유다희는 아직도 어진의 기억 속에 있는 30대의 여자가 다른 사람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처럼 대화가 통했던 것은 본인의 무의식도 반영된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남은 남이다.
아마 정말 비슷한 얼굴의 열 살 많은 다른 여자가 있긴 있었겠지.
또한 이것은 여자의 촉이기도 했다.
어진, 아니 고인물이 좋아했다던 여자.
아직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여자.
그 여자를 떠올리자 유다희는 미묘한 심경이었다.
‘대체 저 뻔뻔한 변태 놈이 이렇게까지 아파할 정도면…… 진짜 보통 여자가 아니었나 보네.’
유다희는 괜히 짜증이 났다.
‘얼굴 빼면 뭐 없는 뇬이더만. 기껏해야 나보다 좀 더 있는 완숙미 정도? 하지만 내가 몇 년 뒤면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고.’
자기랑 똑같이 생겼으니 얼굴을 깔 수는 없고 해서, 유다희는 얼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까기 시작했다.
‘진짜 나쁜 악녀 느낌이었는데. 피부도 처지고 눈매도 재수 없고 싸가지도 바가지에 목소리도 맘에 안 들고, 대체 어떻게 크면 그렇게 클 수 있지? 거기에 사기꾼 기질도 다분하던데. ……진짜 저세상 인성이잖아! 아오, 딱 한 대만 주먹으로 패 줄걸.’
의문의 자아성찰 시간이다.
뭐 아무튼.
그런 여자에게 걸려 아직까지 아파하고 있는 어진이 어쩐지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유다희였다.
그러다가 문득 안쓰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는 그녀.
‘으악! 지금 누가 누굴 동정해! 미쳤다, 미쳤어!’
혼자서 파닥파닥거리는 유다희.
그녀는 이내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필사적으로 정리했다.
‘진정하자, 이건 그거야. 그… 까도 내가 깐다는 그런 거 있잖아. 그래. 별 거 아냐. 일상적인 거잖아. 저놈 저격수는 나니까.’
애초에 그 일상적이라는 것도 별로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유다희는 지금 그런 것들을 냉정하게 따질 수가 없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그녀에게 있어서는 유일하게 수많은 변수들이 생기는 순간이다.
그때.
“……야, 이거 아이템 내가 갖는다?”
저 앞에서 몬스터 시체를 루팅하던 어진이 말했다.
그러자.
“크흠. 큼.”
유다희는 딴생각을 하던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어. 으으응. 맘대로 해.”
그러자 어진은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돌려 하던 작업을 계속한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역시 나야.’
동요한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유다희는 생각했다.
그때.
“……어?”
유다희는 저 멀리 나동그라져 있는 다른 아이템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시커먼 외형의 책 한 권이었다.
아무래도 자각흉몽아귀가 일으킨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튀어나온 아이템 같았다.
“야! 변태! 여기 아이템이 하나 더……”
막 입을 열려던 유다희.
하지만 그것보다 6층으로의 문이 열리는 것이 더 빨랐다.
콰콰콰콰콰쾅!
이윽고 조디악과 벨페골이 벌이는 거대한 싸움이 그 여파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에 보이는 드넓은 필드에서는 조디악이 벨페골을 향해 사정없이 공격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무수히 몰아치는 해골병 군단.
그리고 열심히 분전하고 있는 조디악 패거리.
그리고 그 모든 혼돈의 중심에서.
[30211273062190990265891806259103216976010135826214572116105222266589658477417896395175321152563115201695175……]
고정 S+등급 몬스터인 벨페골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HP바가 시뻘건 것이 잡히기 일보직전인 것 같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나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벨페골은 아무리 딜을 넣어도 데미지가 박히지 않기로 유명한 보스 몬스터.
하지만 조디악은 막대한 버스트 딜로 그런 벨페골을 사정없이 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두 가지의 아이템 덕분이었다.
-<지옥불 코어 반쪽> / 재료 / S
반으로 쪼개진 빨간 구슬 조각.
너무나도 뜨거워 악마조차도 열상(熱傷)을 입고 만다는 지옥 동쪽의 불길이 담겨 있다.
발록과 데모고르곤에게서 얻은 아이템.
그것은 벨페골조차도 화상을 입을 정도로 강력한 불기둥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옥불 코어의 화력을 수십 배로 증폭시켜 주는 아이템이 존재한다.
-<츄츄의 슬라임 젤리> / 재료 / D
그레이 시티의 명물 슬라임 젤리.
슬라임으로 만든 젤리답게 주변 환경의 영향을 잘 받는다.
그것은 바로 그레이 시티의 명물인 슬라임 젤리였다!
예전에도 언급했듯, 슬라임은 기본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잘 받는 몬스터이다.
얼음지대에서 사는 슬라임은 얼음 속성을 가지게 되고 용암지대에서 사는 슬라임은 불 속성을, 숲에 사는 슬라임은 풀 속성을, 독지대에서 사는 슬라임은 독 속성을 띄게 된다.
이 경우에도 비슷했다.
지옥불 코어의 옆에 방치해 두고 오랜 시간 숙성시킨 슬라임 젤리에는 자연스럽게 지옥불 코어의 뜨거움이 배어들었고 이는 악마성좌 벨페골에게도 뜨거움을 전달할 정도로 강력한 무구가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보급형 지옥불 코어랄까?
“핫하! 받아라!”
김정은을 위시한 매드독 일당 역시 지옥불 속성을 띄게 된 슬라임 젤리들을 벨페골에게 마구 집어던지고 있었다.
조디악 일당이 구비해둔 젤리의 물량은 상당해서 아무리 던져도 줄지 않을 정도.
한편, 조디악은 그것을 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빌어먹을. 지옥불 코어가 하나 더 있었더라면 젤리 하나의 데미지를 두 배로 늘릴 수 있는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지옥불 코어의 용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조디악 놈이 츄츄의 오빠인 츄첸을 죽이고 젤리들을 빼앗아간 것이었군.’
뜻하지 않게 꽤나 커다란 비밀을 알아 버렸다.
지옥불 코어의 반쪽은 현재 내 인벤토리에 있다.
그리고 나는 츄츄를 통해 슬라임 젤리의 레시피를 습득한 상태
조디악에게 팁 하나를 얻었으니 이제 이것을 어떻게 적용, 응용할지 고민할 때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이를 악물고 6층을 바라보았다.
벨페골.
나태와 악몽을 지배하는 일곱 악마성좌 중 하나.
놈은 HP가 상당히 깎인 상태로 몸을 비트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현 시점’에서 벨페골을 잡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벨페골은 은근히 수하들이 많은 악마성좌란 말이야.’
일단 휘하에 ‘카르마’를 중간 보스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수없이 많은 카오 유저들을 부릴 수 있다.
지금이 게임이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서 그렇지 몇 년만 더 있었으면 카오 유저들의 수준도 엄청나게 높아져서 벨페골은 아예 공략 자체가 불가능한 급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또한 ‘자각흉몽아귀’의 존재도 엄청난 부담이다.
사람이 상처 한번 받지 않고 살아왔을 수는 없는데 자각흉몽아귀는 그 상처들 중 가장 깊은 것, 아물지 않은 것을 골라내어 헤집어 놓는다.
그리고 마지막.
벨페골을 최악의 난이도로 만들어놓은 세 번째 공격패턴.
꾸물꾸물꾸물꾸물……
나태의 악마성좌 벨페골은 자기가 직접 싸우는 것이 귀찮은 모양인지 몸을 뒤로 물린다.
동시에 놈은 입을 쩍 벌려 안에서 커다란 거울 하나를 꺼내들었다.
“오잉? 이건 또 뭐야.”
조디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껏 벨페골의 기상천외한 공격패턴에 호되게 당해 왔기에 경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윽고.
벨페골이 만들어 내는 흉악한 기적이 현세에 구현된다.
츠츠츠츠츠츠츠……
벨페골의 손에 들린 거울 속에서 몬스터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한테까지 영향이 오겠군. 아니, 이 탑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까지.”
“무슨 영향?”
내 말을 들은 유다희가 불안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쩌적- 쩌저적- 쩌적-
벨페골의 거울에 균열이 간다.
그것은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 버렸다.
…와장창!
동시에, 거울 안에서 무엇인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와 유다희도 잘 아는, 아주 익숙한 얼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