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508화 (508/1,000)
  • 509화 마지막에서 한 발자국 더 (3)

    [30211273062190990265891806259103216976010135826214572116105222266589658477417896395175321152563115201695175……]

    벨페골의 뜻 모를 중얼거림이 들려오는 가운데.

    …번쩍!

    악몽 세계가 무너진다.

    나는 허공에서 바닥으로 세차게 굴렀다.

    “…으헉!?”

    이렇게 대차게 굴러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꽤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에 낙하 데미지가 상당해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

    ‘휴, HP가 저질이다 보니 이런 걸로도 사망 위기네.’

    만약 죽었다면 위기탈출 넘버원 급의 사소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여기는?”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살인자들의 탑 5층, 조디악이 버리고 간 층이다.

    동물의 숲이었던 5층은 현재 흰색으로 텅 비어 있었다.

    이제 이 맵의 소유권은 내게 있으니 새롭게 디자인하라는 것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반투명한 알림창이 떠 있었다.

    <5층의 관리자가 되셨습니다.>

    <맵의 외형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기본 공간 확장: +3.305785제곱미터 당 -100,000G>

    <특정 공간 높이기: -1,000G>

    <특정 공간 낮추기: -1,000G>

    <나무 추가: -10G>

    <바위 추가: -10G>

    <울타리 추가: -10G>

    .

    .

    ‘뭐, 지금 당장은 맵을 디자인할 시간이 없긴 하지.’

    막 눈앞의 알림창을 끄려 할 때.

    [……호애엥.]

    나는 엉덩이 밑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쥬딜로페가 약간 납작해진 상태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깔린 것에 대한 아픔과 여왕으로서의 체면이 손상된 것 때문에 울먹이는 듯하다.

    하긴, 신하의 엉덩이 밑에 깔리는 여왕님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네 덕에 살았다야.”

    [후애애앵!]

    “……거 쪼끄만 게 체면 되게 신경 쓰네.”

    내가 쥬딜로페를 안아들고 슬라임 젤리로 달래고 있을 때.

    …쿵!

    내 옆으로 또 한 명의 사람이 떨어진다.

    바로 유다희였다.

    “으악! 나 죽어! 갑자기 스카이다희빙이라니…!”

    머리부터 떨어져서 그런가 유독 더 바동거리는 유다희.

    무의식중에 이상한 말장난까지 친 그녀는 이내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서로 마주본 우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한때나마 몸을 섞은 사이라서 그런가? 뭔가 낯 뜨겁네 이거.

    먼저 입을 연 쪽은 유다희였다.

    “야, 변태.”

    “왜.”

    “우리가 겪은 거, 그거 뭐냐?”

    자각흉몽아귀에 대해 묻는 것이리라.

    굳이 숨길 것도 없는 것이기에 나는 이 기분 나쁜 몬스터의 스펙과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해서, 입장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어둡고 불쾌한 기억을 소재로 인스턴트 던전을 만들어 내는 거지.”

    “와, 미친. 그런 게 있어?”

    내 설명을 들은 유다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야, 그런데 그러다가 진짜 정신에 심각한 데미지 입으면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훗날 민원이 참 많이 들어오게 되지.

    하지만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주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귀찮았기 때문이다.

    내가 입을 다물자 유다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중얼거린다.

    “아니, 과거는 그렇다고 쳐도. 미래는 뭐였지?”

    ……그것은 나도 궁금한 바이다.

    내가 미래 지식으로 알기로는 자각흉몽아귀는 과거부터 미래까지를 보여 준다고 했다.

    일반적인 악몽아귀처럼 과거의 찝찝한 기억을 뒤져 불쾌한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지금 이대로 살아갈 경우 현실적으로 가장 다가올 확률이 높은 미래를 빅 데이터를 이용해 보여 준다나?

    유다희의 경우는 중간에 초갈모드였던 몸이 분리되어 튕겨나가면서 미래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과거 기억과 맞물려서 자기가 미래를 보게 된 것이라 믿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분명 보았다.

    게임이 서비스 종료되는 그 최후의 순간을.

    ‘……물어볼 불똥정령 녀석도 없어졌고.’

    불똥정령과 얼음똥정령 역시 그새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자각흉몽아귀의 뱃속에서 꺼내 준 ‘올빼미’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하는데.

    그때.

    유다희가 내게 툭 물었다.

    “야. 근데 그건 또 뭐였냐?”

    “뭐, 자꾸. 왜?”

    “……아니, 내가 뭘 자꾸 물었다고 그래. 몇 번 안 물어봤구만.”

    유다희는 답지 않게 약간 소심해졌다.

    그러더니 어딘가 쭈뼛거리는 모양새로 질문했다.

    “너의 미래? 과거? 아무튼 네 환상에 왜 내가 나오는 거냐?”

    “…….”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내가 회귀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해 봤자 믿어 주지도 않을 거고.

    어찌 말해야 하나 내 두뇌가 풀가동하고 있을 때.

    유다희가 알아서 착 답을 제시했다.

    “……너 혹시 언제. ……나랑 비슷하게 생긴 여자한테 돈 뜯긴 적 있냐?”

    그렇지. 비슷한 사람이라 이거군.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가?

    뭐 자각흉몽아귀의 환상 속이었으니 대충 둘러대도 알 게 뭐냐.

    유다희의 개인정보야 뭐 그녀의 무의식도 반영된 결과 때문이라고 대충 우기면 그만, 애초에 이 자각흉몽아귀는 제대로 알려진 데이터도 얼마 없는 초희귀종 몬스터 아닌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다희는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그렇게 나에게.”

    그동안의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그녀, 아무래도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바로잡아 주지는 않았다.

    이윽고, 유다희는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래.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래 오케이, 어느 정도 감안은 해 줄게. 나 같아도 화는 나지, 그래그래 누나가 다 알아 임마! 어?”

    “…….”

    “그나저나 나랑 진짜 닮긴 했더라.”

    말을 마친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어깨를 한번 팡 쳤다.

    “야 씨, 그래도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그렇게 화풀이를 하면 안 되지. 다음부터 그러지 마. 그런 게 다 나중에 업보가 되어서 돌아오는 거야. 카르마 알지?”

    “…….”

    내가 한참 말이 없자 유다희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됐다, 너 같은 겜창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냐. …근데 꽤 많이 좋아했었나 보다? 가진 거 다 내줄 정도면. 씁~ 거 다음 여자친구가 알면 무지하게 슬프겠는데?”

    ……자꾸 옆에서 뭐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나는 귀를 한번 후비적거린 뒤 고개를 돌렸다.

    사실 지금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걸어가는 나를 유다희가 쫄랑쫄랑 따라온다.

    “야, 야야야야야야. 근데 나랑 되게 닮았다 그 여자. 나이는 좀 먹었어도.”

    “…….”

    “엇? 설마 나 같은 글래머 타입이 취향? 미안, 이 누나는 좀 듬직하고 힘 센 남자가 취향이라~”

    나는 그녀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끄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악몽아귀를 잡고 나온 보상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살인자들의 탑 6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디악의 벨페골 레이드다.

    나는 6층으로 가는 문 앞에 있는 커다란 시체를 살폈다.

    자각흉몽아귀의 시체는 절반은 불타고 절반은 얼어붙은 채 방치되어 있다.

    아마도 불똥정령과 얼음똥정령의 소행 같았다.

    ‘……두 정령은 모두 A+등급이라서 자각흉몽아귀를 처치할 힘이 없었을 텐데. 역시 그 올빼미라는 존재가 개입한 건가.’

    내가 사냥한 것이 아니라서 호칭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반짝!

    아귀의 시체가 놓인 곳에서 아이템 하나가 빛을 뿌리고 있는 게 보였다.

    “…….”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유다희를 바라보자.

    “크흠. 큼.”

    유다희는 혼자 뭔 생각을 하는지 이쪽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신발코로 바닥만 문지르고 있을 뿐.

    “……야, 이거 아이템 내가 갖는다?”

    내가 소리치자.

    “어? 어어. 으으응. 맘대로 해.”

    화들짝 놀라 퍼뜩 대답하는 유다희.

    그녀가 S급 몬스터가 떨군 아이템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이템을 확인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주문서처럼 생긴 한 장의 종이다.

    -<‘오무아무아’의 악몽 증명서> / 주문서 / S

    57159610251136525112357159369871477485698566222250161127541262853101067961230195260819856209909126037211203

    -당신이 겪은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증명합니다.

    혹은 당신이 겪은 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임을 증명합니다.

    당최 용도를 알 수 없는 요상한 아이템이 떨어졌다.

    시커먼 아우라가 피어오르는 주문서.

    압도적인 불길함이 엄습해오는 외형이다.

    가지고 있으면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지.’

    나름대로 S급 아이템이 아니던가!

    나는 일단 이 주문서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카르마가 떨어트린 아이템도 회수해야 할 텐데.’

    마음이 급해진다.

    나는 서둘러 달려가 5층의 문을 열어젖혔다.

    5층의 관리자가 되었기에 6층으로 갈 수는 없지만 싸움을 관전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기 때문.

    또한 마음만 먹으면 위층의 싸움에 간섭할 꼼수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콰쾅!

    굳이 내가 개입할 것도 없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먼저 개입해 왔다.

    “푸스스스스! 죽어라!”

    조디악이 벨페골에게 미친 듯이 딜을 넣고 있었다.

    무수히 몰아치는 해골병 군단.

    그리고 열심히 분전하고 있는 매드독 일당.

    그리고 그 모든 혼돈의 중심에서.

    [30211273062190990265891806259103216976010135826214572116105222266589658477417896395175321152563115201695175……]

    고정 S+등급 몬스터인 벨페골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거의 다 깎여 나간 HP바를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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