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99화 (499/1,000)
  • 500화 몸을 섞다 (1)

    -띠링!

    <살인자들의 탑 4층 ‘카지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맵의 소유권을 이양 받거나 상위 층에 도전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나는 알림음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위이잉-

    위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되었다.

    “어이. 거 적당히 하고 넘어갑시다.”

    내가 뒤를 향해 외치자 유다희가 도끼질을 멈췄다.

    이미 카지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모두 리타이어 당하거나 재빨리 로그아웃했기 때문이다.

    유다희는 아미 아래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으며 포탈로 다가왔다.

    “…후우. 짜식들이. 결과에 승복할 줄을 알아야지.”

    결과에 제일 승복 못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뭔가 좀 아이러니하다.

    그때.

    “어?”

    유다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블랙잭 테이블이 박살나 있는 곳에 웬 아이템 하나가 떨어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타짜의 포커 카드> / 양손무기 / A+

    전설의 도박마 ‘아귀’가 애용했다고 하던 카드.

    대체로 사용자의 말로는 좋지 않은 편이다.

    -특성 ‘너랑나랑은’ 사용 가능 (특수)

    “흐음. 포커 카드네. 아까 그 예쁜이가 쓰던 건가?”

    유다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드를 집어 들었다.

    “뭐야 이거? 옵션도 없고 특성만 하나 있네? 뭐에 쓰는 거지?”

    유다희는 ‘너랑나랑은’ 특성을 사용해 보려 만지작거렸지만 포커를 칠 상대방이 없으니 효능을 알 수는 없다.

    ‘당최 뭐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겠네. 반질반질한 게 예쁘니 일단 챙겨 둘까?’

    유다희는 별 생각 없이 포커 카드를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       *       *

    우리는 포탈을 건너 5층으로 넘어왔다.

    <#5. 동물의 숲>

    “뭐야 이게?”

    유다희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5층의 풍경은 그야말로 목가적인 분위기 그 자체였다.

    초록색 동산에 맑은 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이 있다.

    햇살은 밝았고(인공태양이지만) 곳곳에서는 농작물이 자란다.

    귀엽게 커스터마이징된 동물들이 통나무로 집을 짓고 버섯을 따고 낚시를 하고 곤충 채집을 하고 과일을 따며 놀고 있었다.

    “이건 진짜 ‘동물X 숲’인데?”

    예전에 출시되었던 X텐도의 비디오 게임과 흡사한 분위기.

    주인공 캐릭터가 아기자기한 동물들이 살고 있는 숲속의 마을로 이사를 가서 화석을 캐고, 곤충채집을 하고, 산책을 하고, 낚시나 농사 활동을 통해 이웃들과 교류하는 등 평화로움을 추구하는 힐링 게임이다.

    ……하지만.

    “참고로 이 층의 주인은 ‘J’, 조디악 번디베일이야.”

    내 말을 들은 유다희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려다가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맵을 디자인한 사람의 정체를 알고 나니 이 동화적인 풍경이 새삼 오싹하게 보인다.

    한편.

    [하하하.]

    [호호호.]

    [헤헤헤.]

    곰과 토끼, 여우가 웃는 얼굴을 하고 열차를 탄다.

    조그만한 꼬마 열차는 레일을 따라 칙칙폭폭 마을을 한 바퀴 빙 돌고 있었다.

    “……악취미로군.”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동물의 숲 전체를 살폈다.

    조디악, 그놈이 이렇게 힐링되는 공간을 디자인 해 놓은 것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맵 자체는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었다.

    걸으면 가끔 도토리를 주울 수 있고 붉은 흙이 있는 곳에서는 암모나이트 화석을 얻을 수 있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과일은 달고 맛있었으며 물속에서는 통통한 물고기들이 노닌다.

    “흐음.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나는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함정을 기다리며 숲을 계속해서 횡단했다.

    그때.

    “아참. 야.”

    뒤에서 걸어오던 유다희가 나를 부른다.

    고개를 돌리자 시선을 피하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으음, 너 아까 좀 다시 보이더라.”

    “……?”

    “카지노에서 말야.”

    아, 핫세를 돈으로 찍어 누를 때 말인가?

    내가 대답이 없자 유다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여전히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 채로.

    “아니, 사실 너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 금발 여자한테 완전 당하고만 있었거든. 도박 엄청 잘하더라. 어떻게 해야 될지 암담했었는데. ……암튼 고맙다. 이따가는 바쁠 것 같으니까 미리 말해 둘게.”

    “별말씀을.”

    내가 유다희의 새삼스러운 감사인사에 대답하는 순간.

    뾰롱!

    갑자기 숲에서 스핑크스 분장을 한 사자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말이 사자지 2등신 캐릭터이기 때문에 상당히 귀여워 보인다.

    “뭐지? 함정인가?”

    나는 자세를 낮게 숙이고 깎단 두 개를 단단히 쥐었다.

    하지만 사자는 특별한 공격을 해 오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에게 퀴즈를 냈을 뿐이다.

    Q. 하나가 들어가서 둘이 나오는 것은?

    뭔가 수상하다.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면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이 느낌.

    유다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쉽네. 정답은…….”

    동시에 나 역시 입을 열었다.

    “역시 항문……이려나?”

    그러자 유다희가 나를 돌아본다.

    “…….”

    “……뭐, 왜?”

    “아니, 미친놈아. 무슨 항문 타령이야 갑자기 왜.”

    “그야 입으로 음식물이 들어가면 대변과 소변으로 나오니, 아 이 경우에는 답을 ‘구강’이라고 말해야 하나?”

    “……너는 거기로 둘 다 배출하… 아, 아니다. 으.”

    “아니면 원펀치 투강냉이? 나이트클럽? 오X워치의 송하나 자폭궁?”

    “……보통은 ‘바지’라고 대답하지 않냐?”

    뭐 어쨌거나.

    스핑크스는 유다희가 말한 것을 정답으로 인정한 것 같다.

    이윽고.

    스핑크스는 다음 문제를 냈다.

    Q. 둘이 들어가서 하나만 나오는 것은?

    아까 문제의 반대 버전이다.

    나는 유다희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 층의 클리어 조건은 퀴즈를 푸는 것 같군.”

    어차피 살인자들의 탑에 등록할 수 있는 넌센스 퀴즈의 숫자는 두 개가 한계이다.

    방금 전 유다희가 하나를 풀었으니 이제 이번 퀴즈만 맞히면 우리는 이 층을 클리어하는 셈.

    ……문제는 이번 퀴즈의 정답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둘이 들어가서 하나만 나온다고?”

    유다희는 고심했다.

    하나가 들어가서 둘이 나오는 것을 맞히는 퀴즈는 꽤 유명한 넌센스 퀴즈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사실 잘 모르겠다.

    “으으음. 마…맛집?”

    “…….”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말도 있잖아.”

    휴, 이런 간단한 퀴즈의 답도 모른다니 안타깝군.

    나는 입을 열어 정답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타임 오버.]

    스핑크스는 갑자기 시간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우리에게 탈락을 선언했다.

    “무슨 논리야 그건. 나 답 알아. 단지 시간 제한이 있다는 걸 미리 말해 줘야 할 것……엇?”

    순간, 나와 유다희는 제자리에서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바닥이 푹 꺼지며 몸이 아래로 끌려가듯 떨어졌기 때문이다.

    푸른 잔디밭이 갈라지며 그 안으로 시커먼 어둠이 펼쳐진다.

    ……참으로 뜬금없는 전개였다.

    *       *       *

    “으으, 여긴 어디야?”

    유다희는 손을 뻗어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에 차가운 돌바닥이 만져진다.

    고개를 드니 이곳은 창살로 가득한 지하실 안.

    나와 유다희는 어두운 석실 안에 갇혀 있었다.

    “허억!?”

    유다희는 창살 너머로 보인 풍경에 기겁했다.

    온통 시뻘건 벽지.

    그리고 돌 벽의 선반 위에는 잘려나간 머리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5. 동물의 숲(Head Hunter VER.)>

    나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쩐지 맵을 얌전하게 꾸며뒀다 했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로 초대손님을 방심하게 한 뒤 억지 퀴즈를 내어 이곳 지하실로 끌어들이는 수법.

    아마 저기 선반 위의 머리통들은 대부분 동물의 숲에서 놀려고 찾아왔던 게스트들일 것이다.

    ‘……뭐, 그래 봐야 그레이 시티의 주민들일 테니 제정신인 놈들은 아니었겠지만.’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라? 낯익은 얼굴인데. 당신도 잡힌 거야?”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 셋이 반대편 철창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금비, 이은비, 이동비.

    금은동 자매도 여기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은비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의외네. 당신이 이런 함정에도 걸리고.”

    “뭐가 의외야?”

    “아니, 이런 함정을 파 놨으면 파 놨지 걸릴 사람 같지는 않아서.”

    평소에 나를 뭘로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뭐, 금은동 시스터즈와 내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니 이 정도 적개심은 당연한가?

    한편, 내 뒤에 있던 유다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곳곳에 아주 여자가 많으시구만?”

    “…….”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철창을 만지작거렸다.

    틈 특성으로 비벼 볼까 싶었지만 철창 사이에는 투명한 강화유리 벽이 덧대어져 있어 탈출은 불가능했다.

    내가 감옥 안을 살펴보는 동안 금은동 자매는 빈정거림에 가까운 충고를 날린다.

    “천하의 사이코도 이런 함정에 걸리나?”

    “쯧쯧, 그렇게 해서 나갈 수 있었으면 우리가 벌써 나갔지. 멍청하네.”

    “다른 사람들 삥 뜯고 다니더니 꼴좋게 됐다. 변태 양아치 자식.”

    물론 나는 그녀들의 빈정거림을 털끝만치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한데?

    화를 낸 것은 전혀 의외의 쪽이었다.

    “뭐야? 니년들이 뭘 안다고 그따위로 씨부려?”

    유다희.

    방금 전까지 금은동 자매의 빈정거림이나 욕설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녀가 별안간 화를 내고 있었다.

    “……?”

    금은동 자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들어오는 태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유다희는 화를 내려다가 멈칫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거 피차 갇힌 처지에 너무 날 세우지 말자는 거지. ……그리고 얘는 변태긴 해도 양아치는 아니거든?”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조금 뜨끔했다.

    아래층에서 유다희에게 훔친 돈을 아직 돌려주지 않은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금은동 자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저기요. 우리는 저 변태한테 피해 입은 게 엄청 많거든요? 충분히 욕할 자격 있다고 보는데?”

    그러자 유다희가 말 한번 잘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도 이 변태한테 피해 입은 거 무지 많거든? 나보다 많은 사람 본 적 없는데, 한번 대 볼래?”

    “…….”

    “쯧, 나도 가만히 있는데 어디서 별 피해도 안 당해 본 것들이…….”

    유다희는 나에게 입은 피해들을 쭉 열거하고는 가소롭다는 듯 금은동 자매를 흘겨본다.

    누가 더 나에게 피해를 많이 입었나 시합인가?

    이윽고, 유다희는 조용해진 금은동 자매를 등지고 내게 다가와 소곤소곤 말했다.

    “야. 너는 나한테만 욕먹어라. 어디 가서 너절한 년들한테 욕먹고 다니지 말고.”

    ???

    얘는 가끔 보면 정말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바로 그때.

    끼기기긱…

    지하실의 석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건너편 철창에 있는 금은동 시스터즈의 표정들이 딱딱하게 굳는다.

    나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새롭게 등장한 뉴페이스를 살폈다.

    푸른 빛이 감돌 정도로 하얀 피부, 졸린 듯 쳐진 눈, 시커먼 올백머리와 그것보다 더 검은 다크서클.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보고 환희에 젖는 저 표정까지!

    조디악 번디베일.

    또 한 명의 내 단골(?) 피해자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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