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마르지 않는 돈 (2)
나는 피식 웃었다.
쥬딜로페는 핫세에게 연달아 패했지만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하기야 지 돈 잃는 것 아니니 당연할 수밖에.
그러나 돈을 잃은 내 입장에서도 그리 아쉬울 것은 없었다.
어차피 이 돈은 쥬딜로페가 번 돈이고 게다가…….
…차르르르륵!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인벤토리에 슬금슬금 쌓이고 있는 돈 때문이다.
‘탐욕의 악마성좌 마몬의 위상(특전: 수전노)’
내 상태창에 있는 호칭 중 하나.
고정 S+등급 몬스터인 마몬을 꺾은 뒤 얻은 특성이다.
‘수전노’
↳피해를 입거나 입힌 존재의 소지금을 최대 50%까지 강탈합니다.
나는 이 사기적인 특성을 이용해 눈앞에 있는 핫세의 소지금을 조금씩 조금씩 훔치고 있었다.
일억을 잃으면 오천만을 훔친다. 오천만을 잃으면 이천오백만을 훔친다. 이천오백만을 잃으면……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핫세의 돈을 빼앗아 다시 걸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들고 있는 돈이 워낙 많아서 그런가 잃은 돈보다 빼앗는 돈의 액수가 더 클 지경이다. 핫세 본인은 도박에 집중하고 있느라 자신의 인벤토리가 털리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지만.
……뭐, 원래대로라면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지양하겠으나.
‘상대방도 사기꾼인데 뭐.’
나는 핫세가 들고 있는 아이템의 정체를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타짜의 포커 카드> / 양손무기 / A+
전설의 도박마 ‘아귀’가 애용했다고 하던 카드.
대체로 사용자의 말로는 좋지 않은 편이다.
-특성 ‘너랑나랑은’ 사용 가능 (특수)
꽤나 사기적인 아이템.
서버 안에 몇 개 없는 초희귀 히든 피스이다.
핫세가 저 아이템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것이 있는 한 그녀는 카지노에서 계속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와 이 녀석만 아니었더라면 말이지.’
나는 손을 뻗어 쥬딜로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우우-]
쥬딜로페는 블랙잭이 재미있는 듯 히죽 웃는다.
그 천진난만한 미소를 앞둔 핫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도, 돈이 어디서 그렇게 샘솟는 거냐?”
어디긴, 네 주머니지.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만 띄우는 수밖에.
한편, 나와 쥬딜로페가 시종일관 태연하자 핫세 역시도 뭔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그녀는 불안에 떨며 쥬딜로페의 베팅을 받았다.
이윽고 서로 두 장의 카드를 나눠 가진 쥬딜로페와 핫세.
핫세는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집었다.
이번 판은 제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부담이 될 만한 거금이 걸려있기에 더욱 더 신중해질 수밖에.
‘……어디보자. 3이랑 A(1or11)인가.’
합치면 4혹은 14로 만들 수 있는 패.
21까지는 조금 더 여유가 있기에 카드를 더 뽑아도 상관없을 터였다.
핫세는 다른 카드 한 장을 더 뽑았다.
‘이런. Q(10)인가.’
이렇게 되면 A를 11로 카운트했을 경우 패의 총합은 24가 되어 죽게 된다.
핫세는 어쩔 수 없이 A를 1로 카운트한 뒤 패의 합을 14로 만들기로 했다.
그렇다면 21까지는 7만큼의 여유가 남았다.
‘죽을 것이냐, 아니면 한 장을 더 뽑을 것이냐.’
다음 카드에서 7이하의 패가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핫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총 54장의 카드 중 7이하의 패가 나올 확률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땡!
쥬딜로페가 스톱을 알리는 벨을 쳤다.
핫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이미 쥬딜로페는 게임을 멈췄다.
단 두 장의 카드로 말이다.
‘……미친.’
핫세의 이마에서 배어나온 땀이 이제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단 두 장의 카드로 멈췄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이 있다는 뜻, 아니면 저번과 같은 허장성세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핫세는 14의 패로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판돈을 잃지 않기 위해 카드 한 장을 더 드로우했다.
‘망할!’
핫세는 두 눈을 찡그렸다.
이번에 나온 패의 숫자는 놀랍게도 A, 이 경우에는 무조건 1로 계산해야 한다.
그렇다면 핫세의 패는 15가 된다. 21까지는 불과 6밖에는 남지 않았다.
“쫄리면 뒈지시던지.”
내 이죽거림을 들은 핫세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한 장 더.”
핫세는 나를, 아니 쥬딜로페를 따라오기로 작정한 듯싶다.
이윽고 그녀가 패를 확인하는 순간.
‘제기랄!’
핫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이번에 나온 숫자는 2.
핫세의 패는 17이 된 것이다.
아까부터 자꾸 작은 숫자들이 자잘하게 나오는 바람에 손에 쥔 패는 벌써 다섯 장.
같은 수일 경우 적은 카드를 가진 쪽이 유리한 것을 감안하면 꽤나 불리하다.
심지어 패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니 더더욱 속이 탈 일이다.
‘한 번만 더 할까?’
여유 숫자는 4뿐이다.
총 48장의 카드 중 4이하의 카드가 나올 확률은 적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 핫세는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카드를 집었다.
그리고.
‘세상에!’
핫세는 자기의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이번에 나온 카드의 숫자는 3.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적은 숫자가 나와 주었다.
이로서 핫세가 가진 패의 수는 여섯 장, 숫자의 합은 20이다.
블랙잭을 제외하면 가장 좋은 패라고 볼 수 있는 숫자.
“스탑.”
핫세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이윽고, 두 호적수의 패가 개방되었다.
“난 20이다.”
핫세는 의기양양한 어조로 패를 깠다.
그러자 주변에서 탄성이 들린다.
20이라면 확실히 거의 확실하게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패니까.
……하지만.
[호에엥.]
쥬딜로페 역시 의기양양한 태도로 패를 뒤집는다.
A(1 or 11), Q(10)
에이스, 퀸. 두 장으로 딱 21.
블랙잭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패.
그것을 본 핫세는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결국 최후의 베팅 레이스 끝에 승자는 쥬딜로페가 되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갈퀴를 들어 카지노 위의 골드칩들을 싹 쓸어갔다.
인벤토리가 한 번 더 훅 채워진다.
카지노에서 번 돈과 핫세에게서 은근슬쩍 훔친 돈들이 어마어마했다.
이런 곳에서 뜻하지 않은 부수입을 올릴 줄이야.
그때.
“이, 인정 못 해!”
핫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예전 경매장에서 나에게 당했던 아픈 기억이 새삼 되살아나는 모양이다.
나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핫세를 보며 말했다.
“인정 못 한다는 것은 무슨 뜻? 돈을 안 주겠다는 건가?”
“그, 그건 아니지만.”
한동안 부들거리던 핫세는 이내 나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블랙잭 말고 다른 종목으로 해!”
“그러지 뭐.”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쿵!
이윽고, 핫세는 테이블 위에 묵직한 돈자루들을 올려놓았다.
나는 그 게임머니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오? 내가 환전해 줬던 게임머니들이네. 반가워라.’
예전에 고르딕사를 잡고 얻었던 황금들.
경매장에서 나에게 비싸게 환전을 받았던 핫세는 그 돈을 다시 여기에 올려놓은 것이다.
내가 팔았던 게임머니를 다시 강탈해 오게 되다니, 새삼 감개가 무량하다.
“…종목은?”
“카드 숫자 높은 쪽 고르기.”
핫세는 두 눈을 번뜩였다.
경기 방식은 간단하다.
테이블 위에 두 장의 카드가 엎어져 있고 양쪽 플레이어는 무작위로 카드 하나를 선택해 짚는다.
두 카드 중 높은 숫자를 가진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패 숫자를 확인한 뒤 승부를 하기 전에 경기를 포기할 수 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먼저 고르게 해 준다면 받아들이지.”
“좋아. 그쯤이야 딜러로서 양보할게.”
핫세는 짐짓 쿨한 척 핸디캡을 감수했다.
사실 핸디캡이라고 하기도 뭣한 것이었다.
카드 두 장은 무작위로 배치되고 먼저 짚는다고 딱히 좋은 점은 없으니까.
오히려 이 승부는 핫세에게만 압도적으로 이득이다.
핫세는 내 속마음을 읽고 내 패의 숫자를 확인한 뒤 크냐 작냐에 따라 죽을지 살지 선택할 수 있으니까.
‘후후후, 멍청한 놈. 이번에는 무조건 내가 이길 수밖에 없다.’
타짜의 포커 카드가 있는 이상 핫세의 승률은 100%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상대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말이지.
“먼저 짚지.”
나는 카드를 먼저 짚을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 먼저 패를 받는다.
동시에.
나는 호칭의 특전을 발동시켰다.
‘불사(不死)의 우군단장(특전: 선택)’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 법.
데스나이트 ‘사자심왕 리차드 2세’와 겨루고 얻은 특전 ‘선택’은 50%의 확률에서 언제나 나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르쳐 준다.
이윽고, 내 눈에 빛나는 실선이 보인다.
그것은 테이블에 놓인 두 장의 카드 중 왼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왼쪽의 카드를 집어 들었다.
까보기 전까지는 나도 내 패의 숫자를 모른다.
다만 100%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뿐.
‘2네?’
나는 의외의 숫자에 조금 놀랐다.
내가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
“푸훗!”
아직 패를 집어들지 않은 핫세가 나를 비웃는다.
아마 내가 2를 뽑은 사실을 ‘너랑나랑’ 특성으로 알아낸 것이겠지.
하지만 내 카드는 데스나이트가 골라 준 것이다.
내 카드의 숫자가 2라면 핫세가 뽑은 카드의 숫자는…….
“헉!?”
패를 뒤집어 숫자를 확인한 핫세의 표정이 미약하게 굳는다.
그녀의 숫자는 1임에 분명하다.
“고(GO).”
나는 2를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베팅을 걸었다.
시작부터 막대한 금액이다.
……하지만, 내 패의 숫자를 알고 있는 핫세로서는 이 승부에 응할 수가 없다.
“주, 죽겠다.”
핫세는 끙 소리와 함께 카드를 덮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카드를 공개했다.
2.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와 미친 배짱이다! 2로 베팅을 하네?”
“심리전으로 핫세 씨를 완전 발라 버리고 있어!”
“진짜 고인물스럽다.”
핫세는 주변인들의 말을 들으며 속만 부글부글 끓이고 있을 뿐이다.
이내 다음 턴.
또 두 장의 카드가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나는 이번에도 먼저 손을 뻗었다.
오른쪽 카드. 숫자는 4.
별로 높은 숫자는 아니다.
“…….”
하지만 이번에도 핫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당연히 내 패보다 낮은 숫자를 가졌겠지.
“주, 죽겠다.”
내 패를 알 테니 베팅 레이스를 걸 수가 있나?
핫세는 이번에도 베팅 판돈만 날렸다.
그리고 이후 계속된 모든 경기에서.
“주, 죽겠어.”
“죽을래.”
“죽는다.”
“죽어.”
“……죽.”
“끄흑!”
그녀는 계속해서 시작도 해 보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다.
‘이 정도쯤 되면 죽 가게에서 뭔가 협찬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피식 웃으며 판돈을 계속 쓸어갔다.
“죽 집 딸래미인줄 알았네.”
핫세의 소지금 50%는 수전노 특성으로 이미 모두 훔쳤다.
그리고 남은 돈은 방금의 카드 숫자 겨루기로 거의 다 털었다.
부들부들부들부들부들……
카지노 바닥의 지진이 계속 심해지고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핫세 때문이다.
“이건 무효야!”
결국 핫세가 폭발했다.
전 재산을 다 털린 이의 분노는 무섭다.
그리고 그런 핫세의 기분을 눈치챈 몇몇 이들은 진작부터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도끼를 든 오크, 클로를 낀 리자드맨, 마법서를 든 인간들이 나를 에워쌌다.
카지노에서 돈을 계속 딸 경우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이다.
아무튼 그 흔한 일이 일어나자.
“……어쭈? 요것들 봐라?”
그동안 내 뒤에서 잠자코 있던 유다희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을 본 이들은 모두 흠칫 놀란다.
아마 유다희의 예쁜 얼굴만 보고 걸어 다니는 간판 정도로만 인식했었던 듯싶다.
하지만, 유다희가 자기 몸보다도 더 큰 도끼를 집어 들자 그런 분위기는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누구는 호구라서 돈 잃고 그냥 있었냐? 엉?”
유다희는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 일침을 가하기 전에 일단 도끼로 테이블부터 때려 부쉈다.
…콰쾅!
폭음을 시작으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든다.
대부분은 PK에 이골이 난 숙련된 살인귀들.
그러나 나와 나쁜 인연으로 얽히며 무수히 단련된 유다희를 이기기란 어렵다.
…우직! …우지지직! …퍼퍼펑!
오크고 리자드맨이고 모두 유다희의 도끼에 맞아 박살이 난다.
카지노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휴우. 돈 잃은 스트레스가 좀 풀리네.”
슬롯머신이고 당구대고 뭐고 다 때려 부순 유다희는 땀을 훔치며 생긋 웃었다.
그때.
“어? 뭐야? 근데 왜 내 인벤토리에 돈이 절반이나 사라졌지?”
소란 이후에야 상태창을 점검하며 의아해하는 유다희였다.
나는 그녀를 보며 주먹으로 내 머리를 꽁 쳤다.
……아차. 쟤 것까지 털었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