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96화 (496/1,000)
  • 497화 살인자들의 탑 (4)

    <#4. 카지노>

    맵 이름부터가 4층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창문 하나 없는 광대한 홀, 거울도 시계도 찾아볼 수 없는 벽면은 온통 붉은색과 금색으로 번쩍번쩍 빛난다.

    레드카펫 위 사치스럽고 화려한 인테리어와 아라비안나이트에나 나올 법한 크고 웅장한 조각상들은 입장객들을 절로 주눅 들게 만들고 있었다.

    4층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도박을 즐기고 있는 분위기였다.

    대부분은 오크나 리자드맨이었지만 간간히 인간도 눈에 띈다.

    유다희는 북적이는 인파를 바라보며 두 눈을 끔뻑였다.

    “세상에! 이 많은 사람들이 3층을 돌파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럴 리가. 층의 주인이 되면 게스트를 초대할 수 있어. 층주의 소환에 응한 이들은 바로 이 층으로 텔레포트된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해 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카지노의 클리어 및 통과 조건은 간단하다.

    이 안에 있는 모든 도박 종목을 한 번씩 즐겨 볼 것.

    (돈을 땄는지 잃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뭐, 사실상 이곳에 온 이들은 대부분 층주의 소환에 응해서 온 이들이고 딱히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있으나마나한 룰.

    하지만 나처럼 위층을 공략하려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편한 조건이긴 하다.

    ‘무조건 카지노 측이 돈을 딸 수 있다는 그 자신감은 마음에 안 들지만.’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때.

    “야, 여기서는 각자 돌자.”

    유다희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난이도에서야 함께했지만 이런 쉬운 맵에서까지 행동을 같이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무슨 데이트도 아니고 말이지.

    “다 잃고 울지만 마.”

    “너 개그맨이냐?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네. 복장만 보면 가진 것 다 잃은 쪽은 너 같은데 말야.”

    유다희는 나를 향해 주먹을 들어 보이고는 홱 돌아서 반대편으로 향했다.

    나 역시도 발걸음을 옮긴다.

    오크와 리자드맨들로 북적이는 카지노 안, 여기 모여든 이들이 전부 다 범죄자는 아닐 것이다.

    그냥 도박을 즐기러 온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

    나는 주위를 한번 슥 살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도박판.

    그 종류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포커, 슬롯머신, 파친코, 마작, 블랙잭, 고스톱, 룰렛, 스크린 경마, 랭커 토토, 당구, 다트, 바카라, 심지어 해적술통과 루미큐브, 할리갈리까지!

    정말로 없는 게임이 없다.

    나는 슬롯머신 앞에 앉아서 동전을 투입했다.

    이윽고 숫자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차르르르륵! 띵!

    숫자는 6과 9, 그리고 체리 모양이 나왔다. 뭐 하나 맞는 게 없네.

    “쳇. 역시 안 되잖아.”

    나는 도박 운도 재능도 모두 그럭저럭이고 게임 속 가챠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취미도 없는지라 금세 질려 버렸다.

    ……하지만.

    [호에에에엥!]

    내 품속에서 고개를 빼낸 쥬딜로페 여왕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쥬딜로페는 슬롯머신에 꽤나 흥미를 보이는 기색, 자꾸만 눈앞에 있는 레버를 만지려 한다.

    “어허, 애들은 이런 데 손대는 거 아니에요.”

    내가 쥬딜로페를 만류하는 순간.

    -띠링!

    <여왕의 호감도가 큰 폭으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여왕은 지금 게임이 하고 싶습니다>

    <지금! 지금!>

    이건 뭐, 진짜 깡패가 따로 없네.

    나는 애써 쌓아둔 호감도를 떨구기 싫어 어쩔 수 없이 슬롯머신의 레버를 쥐여 줄 수밖에 없었다.

    따르르르릉!

    이윽고 쥬딜로페는 방실방실 웃으며 레버를 당긴다.

    그 결과는.

    “어휴. 그것 봐. 돈만 잃는 구조라니까 슬롯머신은. 무조건 잃게 되어있다고. 이 숫자들 좀 봐라 이거, 이게 맞겠……응? 777?”

    7 ∥ 7 ∥ 7

    …777 쓰리 세븐.

    초대형 잭팟이 떴다.

    ……차르르르르르륵!

    사출구에서 골드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쌓인 골드의 산을 바라보았다.

    [웅앵! 우애앵!]

    쥬딜로페는 나를 바라보며 빵긋빵긋 웃는다.

    빨리 칭찬해달라는 표정이다.

    “자, 잘했어. 역시 인생은 한 방이지.”

    나는 쥬딜로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안아들었다.

    이윽고.

    나는 쥬딜로페를 앞세워 카지노를 한 바퀴 빙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녀의 의사에 의해 게임에 참여했다.

    “CO. 스틸! BTN에서 TsTd 으로 3벳이요”

    “죽습니다.”

    “9, 6, 4, 2h 보드에 SB 첵.”

    “따라갑니다.”

    “2h 떨어지고 또 첵. 41 팟에 25로 베팅.”

    “더블.”

    “5점 비하인드. SB 리레이즈 올인.”

    “폴드.”

    “빨간색 10을 가져가서 파란색 10과 검은색 10에 붙인 뒤 남은 한 패를 조커에 붙이지. 게임 끝.”

    “순정구련보동.”

    “엑조디아를 패에 다 모은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승리한다.”

    “모에, 모에, 걸. 잡고 한 번 더, 모, 윷, 모, 윷, 윷, 윷, 개. 좋아 전부 업혀서 골인.”

    “원 카드.”

    “여기 블랙 모터 달아도 되죠?”

    “황금 마티즈! 또 황금 마티즈!”

    “13번마 절름발이로 할게요.”

    쥬딜로페와 함께 카지노를 한 바퀴 쭉 돌았다.

    슬롯머신에서 잭팟을 터트리고 얻은 돈은 한 게임을 거칠 때마다 몇 배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거 내 도움 없이도 알아서 와두두 종족을 재건할 수도 있겠는데?’

    카지노에 가만히 풀어 놓다 보면 언젠가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한편.

    “아니, 저 변태는 뭐야? 카지노 고인물인가.”

    “어? 저 사람 그 유명한 스트리머 아냐?”

    “알몸으로 돈 다 쓸어가네.”

    “저 귀여운 꼬맹이 좀 봐!”

    당연히 카지노 안의 모든 이목은 이쪽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호에엥. 포에엥.]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쥬딜로페는 실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내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한껏 꼬고 머리를 치켜들었다.

    손에 든 샴페인 잔 속의 우유, 눈에는 경품으로 받은 황금색 번쩍번쩍한 선글라스를 끼고 두터운 금목걸이를 목에 건 모습.

    심지어 입에는 두툼한 어린이용 시가까지 한 대 물고 뻐끔거리고 있는 상태였다.

    “흐음. 이 꼬맹이 녀석… 거만해진 것 좀 보소.”

    돈 좀 땄다고 한껏 뻐기는 것을 보니 뭔가 살짝 얄밉다.

    바로 그때.

    “……크으윽.”

    저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자 하나가 보였다.

    유다희. 그녀는 한 코너 앞에 서서 울분을 삼키고 있었다.

    <블랙잭>

    딜러와 플레이어가 서로 2장 이상의 카드를 뽑아 그 수의 합을 21에 가깝게 맞추어 승부하는 카드게임.

    룰은 단순해 보이지만 의외로 고도의 계산과 심리전이 필요하다.

    “하, 한 장 더.”

    유다희는 이미 손에 네 장의 카드를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한 장을 뽑는다.

    그러자 딜러가 씩 웃으며 패 한 장을 날린다.

    팔랑-

    그것을 받은 유다희의 표정이 떨렸다.

    사망.

    수의 합이 21을 넘어서 자동으로 탈락한 것이다.

    “나는 20이네. 수고~”

    딜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판돈을 가져간다.

    그리고 나는 그 딜러의 얼굴을 안다.

    “어? 저 여자…….”

    예전에 본 적이 있다.

    경매장에서 옷을 살 때였나?

    핫세 하티슨 다닐로바.

    리치왕 공략 전 따듯한 옷을 사기 위해 노르딕 페이스의 패션쇼 경매에 참여했다가 만났던 여자.

    당시 나와 그녀는 경매로 팽팽하게 겨뤘던 적이 있었다.

    ‘……물론 끝에는 내가 압도적으로 발라 버렸지만.’

    그때의 그 여자를 여기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문득 살인자들의 탑 안으로 들어오기 전 봤던 알림판이 떠올랐다.

    4층-‘Hussey’

    과연, 4층의 주인은 이 여자였군.

    나는 마지막 코너인 블랙잭 판으로 향했다. 그리고 허탈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유다희에게 물었다.

    “얼마 잃었냐?”

    그러자 유다희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니, 니가 알아서 뭐하게.”

    보아하니 얼마를 잃었는지 따져 볼 필요도 없겠다.

    ‘다 잃었구만.’

    회귀 전의 유다희는 도박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잘하기는 귀신같이 잘해서 어쩌다 하게 되면 늘 남겨먹곤 했었는데… 지금은 어려서 그런가 영 아니다.

    나는 혀를 차며 블랙잭 판 앞에 앉았다.

    “있어 봐.”

    유다희를 대신해 앉은 의자.

    딱히 그녀의 돈을 되찾아 줄 생각은 없다.

    따면 내 돈이지 뭐.

    단지 돈을 잃은 분노를 조금이라도 앙갚음해 주는 것이지.

    그리고 어차피 위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블랙잭을 한 번 이상 플레이해야 하지 않던가.

    바로 그때.

    “어!? 너는 그때 그 여장 변태!?”

    딜러 자리에 앉아있던 핫세가 판을 쾅 치고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여장 변태라는 말에 어떻게든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추워서 입은 거예요.’

    ……라는 대답으로는 아마 조금 궁색하게 들리지 않을까 싶다.

    ‘근데 진짜 추워서 입은 건데.’

    조금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인(join).”

    내가 자리에 앉자 핫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뿜어냈다.

    “오호. 나를 상대로 블랙잭을 하겠다고?”

    “종목은 뭐든 상관없어.”

    “호오?”

    핫세는 매우 자신 있는 태도로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나 역시도 이길 자신이 있어서 여기에 앉은 것이다.

    블랙잭 판 위에는 포커 말고도 주사위, 마작패 등이 굴러다닌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뭘로 할래? 하고 싶은 종목을 말해.”

    “굳이 그렇다면 블랙잭.”

    핫세는 피식 웃었다.

    “너무 어렵다 싶으면 주사위나 동전 던지기로 해도 돼.”

    나는 그 비아냥에 대답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바짝 숙였다.

    그러나 그 순간.

    [호엥-]

    내 앞을 가로막는 등 하나가 있었다.

    쥬딜로페, 그녀가 선글라스 너머로 나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에 경매장에서 미운 털이 박혀서 그런가 쥬딜로페는 핫세를 꽤나 싫어하는 눈치다.

    [나아…여아앙.]

    입에 시가를 물고 있어서 그런가 당최 뭐라고 웅얼거리는 건지 모르겠네.

    그때.

    “‘너의 여왕을 믿어라’ 라는데?”

    유다희가 쥬딜로페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얘는 어떻게 알아들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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