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94화 (494/1,000)

495화 살인자들의 탑 (2)

<살인자들의 탑> -등급: ?

우리는 결국 이 불길한 던전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눈을 뜨자 주변의 풍경은 살벌하게 바뀌어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탑의 층을 안내하는 알림판이었다.

1층-‘PokePoke’

2층-‘CUBEmania’

3층-‘Pangaeapanga’

4층-‘Hussey’

5층-‘J’

6층-‘카르마(業報)’

7층-‘?’

살인자들의 탑은 통 7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각 층에는 플레이어들의 닉네임으로 보이는 것들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유다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려 준다고 딱히 손해날 것 없는 내용이었기에 나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살인자들의 탑은 ‘맵 메이킹’이 가능한 던전이야.”

그렇다.

살인자들의 탑은 정복한 플레이어가 자기 입맛대로 내부를 꾸밀 수 있는 ‘유일한’ 던전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안의 맵은 유저가 임의로 변경할 경우 24시간 뒤에 원래대로 재생되는 데 반해 이곳 살인자들의 탑 내부만은 그렇지 않다.

“이곳은 철저히 유저들이 만들어 나가는 공간이지. 예를 들자면 슈X마리오 메이커 같은 느낌이랄까?”

슈X마리오 메이커는 2015년에 나온 ‘편집툴’로 플레이어들이 스테이지를 직접 만들어 플레이할 수 있고 또 이를 공유할 수도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만든 스테이지를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너무 어려운 막장 맵 등록을 방지하기 위해 맵을 제작한 이는 자기 맵을 한번 클리어 함으로서 클리어가 아예 막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뒤 맵을 정식으로 등록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가장 어려운 맵을 만든 사람은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어 있다)

살인자들의 탑 역시도 이와 비슷하다.

총 7층으로 되어 있는 각 층은 유저들이 만든 괴랄한 난이도의 맵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발지-함정-도착지

간단한 구조이지만 중간중간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들은 이 던전의 난이도를 미친 듯이 올려놓는 것이다.

이 맵을 주파하는 것에 성공할 경우 플레이어는 둘 중 하나의 특전만을 선택할 수 있다.

해당 층을 자기 입맛대로 다시 디자인하거나 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가 새로운 맵에 도전하거나.

유다희는 작게 한숨 쉬었다.

“그럼 우리는 살인귀들이 지들 맘대로 만들어 놓은 정신 나간 맵들을 통과해서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거네. 다른 던전보다 훨씬 어렵겠어.”

그녀는 암담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벌써부터 얼마나 괴랄한 맵들을 만날지 걱정된다는 표정.

하지만.

“……!”

고개를 돌려 내 표정을 본 유다희는 슬쩍 뒤로 뒷걸음질쳤다.

“뭐, 뭐야. 야 너 표정이 왜 그래?”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반응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내 표정이 어때서?

나는 그저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피를 애써 다스리고 있을 뿐이다.

각 층의 주인들을 바라보자 왕년에 미쳐 날뛰던 나의 과거가 떠오른다.

“큭큭큭큭큭.”

웃음이 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회귀 전, 한때 살인자들의 탑에서 몇 개의 층을 통째로 차지하기도 했었을 만큼 나는 이 던전을 좋아한단 말이다.

*       *       *

<#1. 얼음샛길>

나는 두 손을 쓱쓱 비비며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얼음판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시커먼 바위로 막혀 있는 이 얼음판은 아이스링크를 연상케 할 정도로 판판하고 매끄럽다.

“뭐야? 여기는 쉬워 보이는데? 그냥 걸어서 통과하면 되는 것 아냐?”

유다희는 얼음판 위로 한 발을 내딛었다.

순간.

“으아아아아!?”

그녀는 앞으로 쭉 미끄러져 나가는 자신의 몸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쿵!

유다희는 결국 일직선으로 쭉 미끄러져 눈앞에 있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쳤다.

“히익?”

그녀는 자기 옆에 빼곡하게 솟구쳐 있는 뾰족뾰족한 바위들을 보고 자신이 부딪친 바위가 뭉툭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나는 유다희가 빙판 위에 털썩 쓰러지는 것을 보고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방향전환이 불가능한 특수 얼음판이로군. 전면에 뾰족한 바위들도 많아서 자칫하다가는 몸이 꿰뚫려 죽을 수도 있겠어.”

“야! 알면 빨리 말해 줘야 할 것 아냐!”

유다희는 씩씩거리며 다시 얼음판 위로 미끄러져 출발지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멍든 이마를 문지르며 눈앞의 드넓은 빙판길을 바라보았다.

“아니, 여기를 주파하는 사람이 있긴 있어? 이렇게 미끄러워서야 어떻게 지나가라고.”

“주파한 사람이 있으니까 정식 맵으로 등록되었겠지. 살인자들의 탑은 맵을 제작한 사람이 자기가 만든 맵을 한번 클리어 해야만 정식으로 맵 등록을 할 수 있는 구조이다. 클리어 불가능한 맵 등록을 방지하기 위해서지. 물론……”

나는 허리를 굽혀 얼음판을 톡톡 두드려 보았다.

“얍삽하게도 비밀통로를 몰래 숨겨 놓는 얌체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자기가 만들어 놓고도 자기가 클리어를 못 하니 뒷구멍을 만들어 놓는 치사한 맵 제작자들도 가끔 있기 마련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음판 위를 살폈다.

과연 자세히 보니 얼음판 위에는 극도로 미묘한 자국들이 나 있었다.

누군가가 특정 루트로만 움직인 흔적들이다.

“감식 가능해?”

“어? 아, 이 얼음판 위 말야?”

내가 묻자 유다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들었다.

-<눈 기러기의 눈> / 마스크 / C+

설산에 사는 기러기의 눈을 뽑아서 만든 안대.

눈 위에 난 흔적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도 감지해 낼 수 있다.

-민첩 +50

-얼음지대 시야 +200%

아주 오래 전 북방에서 나를 추격할 때 썼던 아이템.

이 아이템이 다시 쓰이게 될 줄이야.

“눈의 기러기의 눈을 거꾸로 하면 눈의 기러기의 눈이지.”

나는 습관적으로 개그를 쳤다.

그러자 내 개그를 들은 유다희가 몸을 살짝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예전처럼 도끼를 뽑아 휘두르려나?

“……재미없거든?”

하지만 유다희는 짤막한 핀잔으로 내 개그를 일축할 뿐이다.

이윽고, 유다희는 눈 기러기의 눈을 쓰고 빙판길을 살폈다.

“확실히, 누군가 지나간 흔적이 있어. 그것도 반복적으로 한 루트만. 얼음이 그 부분만 미묘하게 녹아 있다고.”

“그쪽으로 가면 될 거야.”

그것은 아마도 맵 제작자의 비밀통로일 것이다.

나는 유다희와 함께 빙판길 위를 걸었다.

첫 번째 작은 빙판은 →↓→↓, 두 번째 큰 빙판은 ↑←↑→↑→↓←↑←↓→↓→↑→, 세 번째 작은 빙판은 →↑←↓←↑→.

예상대로 우리는 손쉽게 얼음샛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1층의 주인이 ‘PokePoke’라는 유저였나? 확실히 샛길을 빠져나가는 방법이 친숙한데.”

“맞아. 포x몬스터 골드버전의 황토마을 옆 얼음샛길에서 영감을 얻은 모양이지. 네 눈의 기러기의 눈 아이템이 아니었으면 조금 어려울 뻔했겠어.”

나와 유다희는 얼음샛길을 통과해 위로 올라가는 포탈 앞에 섰다.

이윽고 선택지가 떴다.

-띠링!

<살인자들의 탑 1층 ‘얼음샛길’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맵의 소유권을 이양 받거나 상위 층에 도전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나는 주저 없이 상위 층으로의 도전을 선택했다.

*       *       *

<#2. 큐브>

우리가 2층으로 올라오자마자 만난 맵은 거대한 큐브 상자들의 군락이었다.

유다희는 맵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오, 이거 영화에서 베껴 온 것 맞지?”

어허, 베끼다니.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해야지.

나는 맵의 내부를 천천히 살폈다.

큐브는 다음 큐브와 연결되어 있었고 큐브 중에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

정말 유다희의 말마따나 동명의 영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 명확해 보였다.

“이 경우에는 영화를 시청하면서 가면 되겠네. 지금 바로 결제해야지.”

유다희는 곧장 인터넷 창을 켜고 영화를 다운받았다.

1997년에 나온 공포영화 ‘큐브’의 러닝 타임은 91분.

나와 유다희는 게임 창 한 구석에 영화 창을 띄워 놓고는 영화 속 캐릭터들의 행적을 천천히 그대로 따라해 나갔다.

“……호옥시 영화랑 다르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겠지?”

“이 거대한 맵을 똑같이 재현해 놓았을 정도면 진성 마니아일 텐데, 설마. 원작 고증을 그대로 해 놨을 거야. 그리고 뭐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영화 속 캐릭터들처럼 함정 한 방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내 말대로였다.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26의 세제곱, 즉 17,576개의 큐브 속에서 방들과 방 벽에 적힌 숫자들 사이의 소수의 다중 함수와 병렬식을 풀어내 탈출구를 찾는 과정을 똑같이 따라하며 맵을 클리어 해 나갔다.

한데?

“으, 으아아아…….”

의외의 장애물이 있었다.

그것은 유다희가 공포영화를 잘 못 본다는 것이었다.

영화 초반부, 함정들이 발동해 희생자가 나올 때마다 유다희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비명을 꾹꾹 참는다.

“어떻게 해, 진짜 아프겠다, 무서워……. 아아아, 야 이 사람 죽어? 안 죽지? 살았으면 좋겠는…아앗! 죽네…… 아아아…….”

철창, 화염방사기, 염산, 와이어, 가시밭 등등 함정들이 나올 때마다 영화 속 캐릭터는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그럴 때마다 유다희의 떨림도 더욱 커진다.

묘한 것은, 유다희는 정작 자기가 그런 함정들을 겪을 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냥 슥슥 지나간다는 것이다.

‘츄츄 때도 그렇고, 얘는 지 고통보다 남의 고통에 오히려 더 예민하네.’

나는 묘한 신기함을 느꼈다.

확실히 회귀 전보다 회귀 후에 유다희에 대해 알게 된 점이 더 많은 것 같다.

이윽고.

91분 동안의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우리도 살인자의 탑 2층을 통과할 수 있었다.

“실제로 큐브의 개수가 17,576개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네. 진짜로 우리가 되짚어 간 큐브만 따지면 백 개가 채 되지 않으니, 함정까지 포함하면 전체 큐브의 수는 한 오천 개 정도 되려나.”

나는 2층을 무난하게 클리어한 뒤 짧은 소감을 밝혔다.

“……으으, 잔인한 거 싫어.”

유다희는 맵의 난이도와는 별개로 공포 영화를 다 본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띠링!

<살인자들의 탑 2층 ‘큐브’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맵의 소유권을 이양 받거나 상위 층에 도전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또다시 선택지가 떴다.

나는 이번에도 주저 없이 상위 층으로의 도전을 선택했다.

그러자.

이윽고 내 눈앞에 익숙한 글귀가 뜨기 시작했다.

<#3. U Break>

낯익은 이름의 맵.

나는 살인자들의 탑 3층의 주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3층-‘Pangaeapanga’

일명 ‘미친맵 제작자’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훗날 최악의 난이도로 기네스북에 오르게 되는 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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