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93화 (493/1,000)
  • 494화 살인자들의 탑 (1)

    [……정말로? 진짜 그 마약 공장을 소탕했나?]

    시혼 시장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무실 남쪽의 창문을 열었다.

    늘 자색 매연을 펑펑 내뿜던 공장이 오늘은 안 보인다.

    휘이잉-

    대신 똥냄새가 나는 바람 한 줄기가 휭 불어올 뿐이었다.

    지평선 너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시혼 시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정말로 그 골칫덩이들을 깔끔하게 소탕했군.]

    깔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혼 시장은 나름대로 만족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는 나와 유다희를 향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좋아. 그레이 시티의 큰 똥을 하나 치웠어. 물론 똥을 치웠다기보다는 똥을 엎지른 것이지만. 뭐, 아무튼 간에 더 이상 약쟁이들이 활개치고 다니지는 못할 거야.]

    약을 파는 놈, 사는 놈들이 없어졌으니 이제 그들에게 피해를 입을 사람들도 사라졌다.

    시혼 시장은 고개를 들어 나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사실 말이야. 마약 공장은 자네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설정한 목표에 지나지 않는다네.]

    그럴 줄 알았다.

    시혼 시장은 예상했던 대로 내 진짜 목적지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우리 그레이 시티를 어지럽히고 있는 ‘진짜’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나?]

    이윽고 테이블 위로 녹슨 열쇠 하나가 놓인다.

    -<피 묻은 열쇠> / 재료 / ?

    관여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 열쇠.

    문 저편에서 무언가 불길한 것을 끌어낼 것 같다.

    나는 그 열쇠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당연히 이번 히든 퀘스트의 보상, ‘살인자들의 탑’의 문을 여는 열쇠이리라.

    머릿속에 살인자들의 탑에 관련된 정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어떤 설정을 가지고 있는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안의 구조가 어떤지.

    난이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는지.

    .

    .

    나는 내가 살았던 회귀 전 15년간의 기억을 모조리 총동원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혼 시장은 무거운 목소리로 탑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탑 안에는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다네. 그것이 뿜어내는 사악한 기운은 사람으로 하여금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지. 그레이 시티의 주민들은 탑의 영향을 받아 ‘나태’해졌고,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익명’ 뒤에 숨어 나쁜 짓을 일삼기 시작했어.]

    살인자의 탑을 수식하는 세 개의 키워드가 모두 나왔다.

    ‘나태(懶怠)’, ‘악몽(惡夢)’, ‘익명(匿名)’.

    이 중 익명을 관장하는 존재는 이미 츄츄에 의해 밝혀졌다.

    ‘카르마’라는 이름의 오래 묵은 리치.

    이 마법사형 몬스터의 사악한 특수능력 때문에 그레이 시티의 범죄자들은 자신의 죄를 은폐할 수 있다나?

    놈을 중심으로 반경 수백 킬로미터 안의 범죄자들은 전부 카르마 수치가 블라인드 처리된다.

    그래서 NPC들을 상대로 아이템 판매나 구매가 불가능한 이들, 퀘스트 수행이 금지된 이들, GM 처리반의 단속을 피하고 싶은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카르마라는 몬스터를 지켜야 하는 처지.

    그래서 카르마는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을 자신의 호위병으로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해관계의 일치가 만들어 낸, 그레이 시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기묘한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어디 보자. 살인자들의 탑이 어디쯤 있나?”

    나는 망원경을 들어 시혼 시장의 집무실 남쪽 창문에 댔다.

    츠츠츠츠츠……

    이윽고, 마약 공장에서 뿜어져 나온 흐릿한 매연들이 점점 사라진다.

    그나마 남아 있던 보라색 안개들이 완전히 걷히자 그 너머로 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탑.

    하지만 그 크기만큼은 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 분명하다.

    탑의 뾰족한 지붕 위로는 보라색 구름들이 작당모의라도 하듯 음산하게 모여 있었다.

    붉게 저물어 가는 노을 때문에 그 구름들은 더욱 음흉하고 불길해 보인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역시나. 그냥 가면 열쇠가 없어서 못 들어갈 뿐만 아니라 마약 공장의 매연에 취해서 위치를 찾기도 힘들지.”

    이제 마약공장이 없어졌으니 환각을 보여 주는 매연도 안개도 없다.

    열쇠도 손에 넣었으니 굳게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쯤 해서, 시혼 시장은 나와 유다희에게 최후의 히든 퀘스트를 주었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살인자들의 탑’ >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의 마약 공장 토벌’을 완료한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오래 묵은 리치 ‘카르마(業報)’ 처치 (0/1)>

    <※보상: 960만 골드, 경험치,‘‘찢어진’ 무한의 힘이 담긴 봉인서’>

    오래 묵은 리치 ‘카르마’를 처치하라는 내용.

    보상 아이템인 ‘‘찢어진’ 무한의 힘이 담긴 봉인서’는 나도 모르는 아이템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 자체는 알고 있지만 용도를 알 수 없는 아이템이랄까?

    ‘……무언가를 봉인할 때 쓰는 아이템 같긴 한데, 정체도 불분명하고 심지어 반쪽짜리라니.’

    회귀 전 세상에서도 끝끝내 효능이 밝혀진 적 없는 미지의 아이템.

    이걸 얻어서 뭐에 쓸까 싶긴 하다.

    한편, 시혼 시장은 눈을 빛냈다.

    [인간은 익명 속에서 더없이 사납고 잔인해지지. 카르마를 처치하고 범죄자들의 죄를 만천하에 공개한다면 범죄율은 크게 내려갈 거야. 물론 범죄자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곳이 범죄자들의 낙원으로 통하는 일은 없게 될 것 같군.]

    시혼 시장의 말은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레이 시티가 정화되는 것은 나 역시도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었다.

    앙신 조디악의 근거지가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제 전리품을 팔 곳도, 포션이나 주문서를 살 곳도, 퀘스트를 받아서 히든 피스를 구할 길도 없게 되겠지.’

    놈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을 거의 완전히 틀어막는 것이나 다름없는 봉쇄조치.

    더군다나 살인자들의 탑이라는 던전 자체를 공략함으로서 놈이 실질적으로 머물 곳마저 빼앗아 버리겠다는 것이다.

    일명 고사(枯死) 작전!

    나는 놈을 말려 죽일 것이다.

    오징어처럼 씹는 맛이 있도록, 아주 쫀득쫀득하게.

    *       *       *

    시청을 나온 나는 곧장 숲으로 들어갔다.

    똥바다가 된 마약 공장을 지나 한참을 더 숲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내 화산재에 뒤덮인 회색 공간이 나왔다.

    온통 잿가루만 풀썩풀썩 날리는 숲.

    겨울이 와 눈이 수북하게 내린 것 같지만 사실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처럼 쌓인 재는 바람이 불 때마다 풀풀 가볍고 삭막하게 날린다.

    눈이란 것은 본디 차가우면서도 보기에는 따듯하건만 이 재라는 것은 차갑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채 그저 메마르고 텁텁한 느낌만을 주고 있었다.

    나와 유다희는 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설원을 말없이 걷는다.

    …….

    긴 침묵이 부담스러워서일까? 유다희는 짐짓 투덜거리고 있었다.

    “쳇. 내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고대하던 살인자들의 탑 레이드인데. 하필 너랑 가게 되다니.”

    “어쩔 수 없잖아. 이 열쇠로는 동반 1인까지만 입장 가능하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넘기자 유다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너는 이번엔 일행 없냐? 늘 같이 다니던 사람들 있잖아.”

    “다 마동왕에게 뺏기고 없다. 그리고 나는 원래 솔로 플레잉을 즐기는 타입이라서 개인방송 할 때 아니면 파티 안 해.”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나는 실제로 굵직굵직한 메인 퀘스트를 제외한 자잘한 퀘스트나 레이드는 혼자 뛰는 편을 선호한다.

    게임 시간을 따져보면 솔로 플레이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기도 하고.

    그러자 유다희는 코웃음 쳤다.

    “흥. 하긴. 정말 어지간한 이상성욕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너 같은 변태랑 같이 파티를 하겠어.”

    “너.”

    “…….”

    내 말에 유다희는 입을 다물었다.

    입을 꽉 다물고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니 왠지 하찮아 보인다.

    이윽고.

    우리는 잿빛의 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살인자들의 탑> -등급: ?

    마모된 벽돌을 쌓아 올린 높은 탑.

    창문 하나 없는 벽에 붙어 말라죽은 담쟁이넝쿨들이 으스스하다.

    ‘……?등급이라.’

    나는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살인자들의 탑 안은 정말로 기상천외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일반적인 던전을 생각하고 들어갔다가는 큰일 난다.

    나는 옆에 있던 유다희에게 당부했다.

    “우리는 안에 들어가서 카르마만 잡고 바로 나올 거야. 알아들었지?”

    내 말에 유다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카르마만 잡지 뭘 더 잡아?”

    “……카르마는 이 탑의 중간 보스야. 서열로 따지면 세 번째에 불과하지.”

    내 말을 들은 유다희는 꽤나 놀라는 기색이다.

    그녀는 아마 카르마가 이 탑의 최종보스인 줄 알았던 모양.

    “알겠어. 나도 그레이 시티의 카르마 수치를 드러내게 하는 게 목적이니까 그 이상은 욕심 안 내. 애들만 구하면 되니까.”

    “오케이. 그럼 입장하자고.”

    나는 열쇠를 꺼내 탑의 문으로 가져간다.

    그때.

    그동안 내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유다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너 진짜 나한테 할 말…….”

    하지만 타이밍이 안 좋았다.

    열쇠는 문 손잡이 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에 닿는 것만으로도 검붉은 빛을 폭사한다.

    …파앗!

    이윽고 눈부신 기운이 우리를 완전히 감쌌다.

    ‘살인자들의 탑’이 우리를 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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