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91화 (491/1,000)
  • 492화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5)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의 마약 공장 토벌’>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의 뒷골목 청소’를 3초 이내에 거절한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그레이 시티의 마약팔이들을 소탕하자>

    <※보상: 480만 골드, 경험치, ‘살인자들의 탑 입장권’>

    나는 퀘스트 창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 히든 퀘스트는 드물게도 보상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살인자들의 탑 입장권’

    경험치와 골드 따위는 얻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없는 것들이지만 마지막 보상은 확실히 시선을 잡아끌 만한 것이었다.

    그레이 시티 최외곽에 우뚝 솟아있는 회색 첨탑.

    이 불길한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알기로는 딱 둘 뿐이다.

    ‘같은 종족의 다른 플레이어들을 1천 명 이상 죽일 것. 혹은 시혼 시장이 주는 마약 공장 퀘스트를 클리어할 것.’

    현재 살인자들의 탑은 조디악 일당의 아지트가 되어 있는 상태.

    놈은 그곳을 거점으로 그레이 시티에서 소모품들을 조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레이 시티를 병들게 하는 마약 공장을 소탕해서 그레이 시티 내부의 시장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은 뒤 조디악의 본진인 살인자들의 탑을 치면 되겠군.’

    말하자면 군량 보급로를 먼저 차단한 뒤 거점을 공략하겠다는 계획.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지금 내 뒤를 쫄레쫄레 따라오고 있는 플레이어 하나.

    바로 유다희의 존재다.

    ‘난감한데.’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크흠. 흠. 으으음~”

    유다희는 짐짓 딴 곳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부른다.

    누가 봐도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모양새.

    나는 한숨을 쉬었다.

    ‘……살인자들의 탑은 가능한 혼자 가고 싶은데.’

    내가 목표로 하는 곳은 굉장히 불길한 곳이다.

    일반적인 던전은 레이드 인원이 늘어날수록 힘의 총량이 많아지지만 이 던전에서는 그런 공식이 통하지 않는다.

    그때.

    [호에엥……]

    품속에 있던 쥬딜로페가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데스나이트의 갈기를 잡고 칭얼거린다.

    아마 내 인벤토리 안에 있는 슬라임 젤리를 더 먹고 싶다고 조르는 것이겠지.

    “안 돼. 젤리는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씩이라고 했잖아.”

    […포에에엥.]

    쥬딜로페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누워서 바동거리기 시작했다.

    “스읍, 그럼 쥬딜로페는 그레이 시티에서 살아. 나는 갈 거야.”

    […빼애애앵!]

    하지만 쥬델로페는 막무가내다.

    오전에 받은 젤리를 세 개나 연거푸 먹어서 배도 빵빵하면서 말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줄게. 어때?”

    …빵긋!

    그러자 쥬딜로페는 언제 울었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작은 두 손을 붙여서 내게 공손히 내민다.

    나는 그 위에 츄츄에게서 산 슬라임 젤리 하나를 올려 주며 말했다.

    “이따가 저녁에는 3개만 먹는 거야 그럼?”

    [앙! 앙!]

    쥬딜로페는 젤리를 받자마자 입에 우겨넣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빵빵해진 두 볼을 온 힘을 다해 오물거리는 저 모습이라니.

    그때.

    “야, 뭐냐? 누구냐? 네 펫이냐? 거 되게 귀엽네.”

    유다희가 쥬딜로페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확실히 쥬딜로페가 깜찍하긴 하지.

    녀석의 땡깡을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말이야.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내가 얘 펫이야.”

    “응? 아니, 그러니까. 얘가 네 펫이냐고.”

    “아니라니까. 내가 얘 펫이라고.”

    “……?”

    유다희 역시 내가 예상한 반응 그대로다.

    뭐, 아무튼.

    내가 잠시 걸음을 멈춘 사이에 유다희는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나는 그런 유다희에게 말했다.

    “저번에 상하이에서는 미안했다. 양말에 돈 넣어 둔 거 깜빡했어.”

    그러자 유다희는 그날 일이 생각났는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됐어. 뭐, 이젠 그만 싸우자고. 부탁받은 것도 있고. 또 내 잘못도 많이 있으니.”

    부탁이라 함은 아마도 마동왕을 말하는 것이겠지.

    이후 유다희는 자기의 사정을 대략이나마 설명했다.

    이 ‘마약 공장’ 퀘스트는 자기가 한 1년 전부터 노리고 있던 히든 퀘스트라나?

    그녀는 머뭇거리는 태도로 내게 물었다.

    “……혼자 갈 생각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다희는 시선을 떨구고 바닥을 쳐다본다.

    그러더니.

    “……나, 나도 데려가 주면 안 되냐?”

    나는 조금 놀랐다.

    예전에 크라켄 레이드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

    ‘퀘스트 가로채지 말라며 방방 뛸 줄 알았는데 의외네.’

    유다희는 시선을 떨구고 있느라 내 표정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겠지?”

    뭐, 사실 아주 안 될 것은 없다.

    살인자들의 탑은 여럿이서 공략이 까다로운 던전이지만 두 명 정도라면 별로 상관없을 수도 있지.

    게다가 그레이 시티에서 ‘자경단장’이라는 희귀 호칭을 가지고 있는 유다희라면 어쩌면 도움이 될 여지도 있었다.

    나는 유다희에게 물었다.

    “자신 있냐?”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하지.”

    내가 묻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다희.

    그녀는 도끼를 빼들어 휘둘렀다.

    …콰쾅!

    눈앞에 깊은 크레이터가 생긴다.

    오, 저 정도 화력이라면 확실히 근접 딜은 괜찮겠군.

    유다희는 멋쩍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저번에 혼자 마약공장 쳐들어가 봤는데, 아무래도 혼자서는 힘들더라고. 동생은 취업한 뒤에 일 때문에 바쁘고.”

    그때.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유다희가 재빨리 다시 시선을 피한다.

    ‘……뭐야?’

    내가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할 때.

    [호에에에엥…….]

    방금 전 난 큰 소리에 놀란 쥬딜로페가 또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어엇? 괜찮아. 그냥 도끼가 땅가죽 벗겨내는 소리야. 평범한 살인기술이니까 진정해.”

    나는 재빨리 등을 돌려 쥬딜로페를 어르고 달랬다.

    쥬딜로페가 진정하고 잠잠해지자 나는 다시 유다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

    유다희는 뒤돌아선 내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마저 빨갛게 붉힌 채로.

    이건 뭐 거의 ‘등짝을 보자’라는 표정인데?

    “뭐냐?”

    내가 묻자 유다희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뒤 얼굴을 화다닥 붉혔다.

    그리고는 고개를 다시 바닥으로 향한다.

    “뭐, 뭐, 뭐, 뭐가?”

    “…….”

    “아, 아닌데? 등 안 봤는데? 너 본 거 아님.”

    “…….”

    나는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유다희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근데 너는 왜 마약 공장 퀘스트를 깨려고 하는 거냐?”

    “……그야, 살인자들의 탑이지.”

    “거기 들어가서 뭐 하려고?”

    내가 꼬치꼬치 묻자 유다희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변했다.

    “니, 니가 알아서 뭐하게!? 템 파밍 하려고 그런다 왜!”

    유다희는 빽 소리쳤다.

    마동왕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

    그때.

    [자경단장 언니가 살인자들의 탑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유라면 제가 알아요!]

    나와 유다희의 사이에 불쑥 끼어드는 이가 있었다.

    바로 츄츄였다.

    그녀는 등장하자마자 쥬딜로페에게 슬라임 젤리 하나를 물려 주고는 생글생글 웃었다.

    음, 이따 저녁에 두 개만 줘야겠군.

    [어른들이 그러는데 살인자들의 탑에는 ‘카르마’라는 이름의 나쁜 마법사가 산대요. 그 마법사 때문에 그레이 시티의 죄악들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되는 거라면서. 그레이 시티가 나쁜놈들의 소굴이 된 건 다 그 마법사가 원인이라고 했어요.]

    츄츄의 말이 맞다.

    살인자들의 탑의 중간 보스 몬스터인 ‘카르마’는 오래 묵은 리치로 주변의 카르마 수치를 가리는 특수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 몬스터가 그레이 시티의 주변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한 살인자들은 계속해서 이쪽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카르마는 몬스터인 주제에 카르마 유저들의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츄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경단장 언니는 그 카르마라는 나쁜 마법사 때문에 도시의 어린애들이 피해를 입는 거라고 하셨어요. 제 오빠를 죽인 나쁜 놈들도 그 마법사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그래서 그레이 시티의 어린이들을 위해 꼭 그 마법사들을 혼내 주겠다고 저랑 약속을……]

    “얌마, 내가 어, 언제 그랬어! 그냥 아이템 보상 얻으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네? 하지만 그때 언니 우셨잖아요. 제 오빠 장례식 때에도 3일이나 같이 있어 주셨으면서.]

    “그, 그야 임마. 그때 비도 많이 왔었고, 또 니가 다른 가족이 없었으니까. 아 몰라!”

    유다희는 츄츄의 머리를 거칠게 한번 쓰다듬고는 시선을 옮겨놓았다.

    그리고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내게 말했다.

    “바보 같냐?”

    “……?”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유다희는 새빨갛게 물든 옆얼굴로 중얼거렸다.

    “NPC들 사정에 너무 과몰입하는 것 같냐고.”

    뭐, 사실 헤비 게이머라면 다 겪는 일이다.

    그만큼 게임에 애착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겠지.

    나 역시도 진성 겜덕으로서 충분히 이해하는 입장이다.

    얼마 전 윌슨이 만들어낸 윤솔 NPC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때도 꽤나 울적해졌었으니까.

    “마약 공장 구조는 알고?”

    내가 묻자 유다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어어. 알지. 엄청 꼼꼼하게 조사했어!”

    그녀는 땅바닥에 마약공장 내부의 지도를 그려 보여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부 지도를 보니 마약공장을 공략해 본 적은 없지만 대충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각이 나온다.

    하지만 유다희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었다.

    “안에서 나오는 마약쟁이들 레벨이 꽤나 높아. 오크나 리자드맨들도 관여하고 있고. 심지어 카르마 유저들도 일일퀘스트 깨러 종종 오더라. 도끼 들고 가서 전면전도 해 봤고 주변에 불도 질러 봤는데 방어, 방화시설이 완벽하더라고.”

    마약은 태워 버리는 게 제일 좋다.

    때문에 유다희는 제법 넓은 구역에 불을 내 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공장 내부에 방화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서 효과는 미미했던 듯했다.

    ……그러나!

    방법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

    “방화시설이 잘 되어 있었단 말이지?”

    “응? 어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유다희를 향해 눈을 빛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렇다면 방수 시설은 어떻지?”

    나를 바라보던 유다희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뜨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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