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화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4)
유다희.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성문을 나왔다.
“……후.”
갑자기 한숨을 내쉬는 유다희 때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또 내 눈에 띄다니. 진짜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
유다희의 말에서는 극도의 짜증과 살의가 뚝뚝 묻어난다.
나는 약간의 억울함을 담아 항변했다.
“아니, 내가 널 따라오고 싶어서 따라온 것도 아니고. 그냥 퀘스트 깨다가…….”
하지만 유다희는 내 말을 채 듣기도 전에 등에 맨 도끼를 뽑아들었다.
“본때를 보여 주든가 해야겠군.”
나는 순간 긴장했다.
유다희의 레벨과 장비는 시간이 지나 나조차도 마냥 쉽게 볼 수 없을 정도로 빵빵해진 상태.
재능까지 뛰어나 거의 준프로 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괜히 탑 급 게임방송 스트리머가 아니지.’
유다희가 작정하고 근접 딜 승부를 걸어오면 방심할 수 없다.
예전과는 달리 어느정도는 진심을 다해 맞서야 할지도.
……한데?
파팟!
유다희는 나를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곧장 성문 앞을 내달려 비탈길 아래로 향했다.
“……?”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목을 길게 빼고 유다희가 달려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
그곳에는 나 역시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이~ 내 친구들 병원신세 지게 만든 꼬맹이가 너라며?]
언덕빼기 아래에 불량배 수십 명이 모여들어 츄츄를 핍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츄츄는 건장한 불량배들 사이에 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량배들은 낄낄 웃으며 츄츄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쓰레기 같은 젤리 파는 거 눈감아 줬더니 은혜를 아주 원수로 갚는구만. 네가 그렇게 막돼먹게 행동하니까 네 오빠도 뒈진 거 아니겠……]
하지만, 그 불량배들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콰-쾅!
유다희가 집어던진 도끼가 츄츄 앞에 있던 불량배 셋을 일격에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헉!?]
[히이익!]
[뭐야 이게!]
주변에 있던 불량배들이 주춤주춤 물러난다.
그 앞으로 유다희가 스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세상에 쓰레기 같은 인간은 없다지. 누구나 갱생 가능성은 있어.”
말을 마친 유다희는 츄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온통 눈물범벅인 츄츄의 얼굴은 이곳저곳 멍들어 있었다.
머리카락도 쥐 파먹은 듯 군데군데 잘려나가 있는 것이 이 불량배들에게 꽤나 지독하게 괴롭힘 당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유다희는 다시 고개를 들어 불량배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인간 같은 쓰레기는 있는가 보군. 너희는 재활용도 안 되겠다.”
말을 마친 그녀는 맨주먹으로 앞에 있는 불량배들을 쥐어 패기 시작했다.
붕-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가는 그녀의 주먹.
어깨 부근에는 ‘자경단장’이라는 글귀가 적힌 완장이 보인다.
“쓰레기는 영어로 갈비지(Garbege)!”
유다희의 주먹이 불량배의 갈비뼈를 부쉈다.
그러자 나머지 불량배들이 이를 악물고 유다희에게 달려든다.
[이년은 맨주먹이다! 끼고 있는 것도 낡은 건틀릿뿐이야! 한꺼번에 덤비자!]
십 수 명의 사내들이 라인을 만들어 유다희에게로 달려든다.
그러나 유다희는 능숙한 스텝으로 뒤로 물러섰고 덤벼드는 이들을 하나하나 맨주먹으로 때려눕혔다.
“우둔한 것들. 이거나 받아라! 우둔살!”
[크학!? 어떻게 그런 후진 장비로 이런 힘이!?]
“후지기 짝이 없는 장비라도 기본 스탯이 높으면 가능하지. 후지살!”
[케헥! 아이고 나 죽네! 아파서 모, 못 살겠다.]
“이얍! 목살!”
[아니, 목이 아니라 못이라고 못! 아니, 그보다 이 여자 대화 패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유다희는 양떼 속에 뛰어든 늑대처럼 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불량배 무리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제기랄! 이년은 어차피 혼자다! 싹 다 불러와!]
몇몇 불량배들이 목에 걸린 호각을 불렀다.
이내 뒷골목에서 더 많은 불량배들이 어슬렁 어슬렁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플레이어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어떤 놈이 우리 애들을 건드리냐?]
“헤헤, 돌발 퀘스트인가? 이 동네는 나쁜 짓만 해도 경험치가 올라서 좋아.”
[감히 우리 패거리를 건드리다니, 겁도 없군.]
“키키…키키키키키! 살인 좋아, 킥… 킥킥!”
NPC, 플레이어 가릴 것 없이 온갖 껄렁한 놈들은 죄다 모여든다.
“……으음.”
유다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녀라도 지금의 이 다대일 상황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레이 시티의 NPC들은 험한 곳에서 굴러먹어서 그런가 어지간하면 다들 레벨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에 정착한 플레이어들은 말할 것도 없이 빌런들이다.
하도 범죄를 많이 저질러 모든 마을에서 추방된, 잘못 건드렸다간 정말로 미친 짓을 벌일 진짜배기 미친놈들.
함부로 PVP를 떴다가는 나중에 보복당할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킁킁. 어, 뭐야 이 귀요미들은?”
막 유다희를 따라온 내 눈에는 그저 싱그러운 풋내 풀풀 풍기는 뉴비들로만 보일 뿐이었다.
게임 경력 근 20년차.
플레이 타임만 해도 10만 시간에 육박하는 고인물.
그레이 시티에서 날뛰는 살인귀들조차도 내가 보기에는 그저 귀여울 뿐이다.
제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게임 경력 4년차일 뿐, 플레이 타임은 뭐… 아무리 많아도 1만 시간은 되려나?
“파릇파릇한 뎀린이들이잖아? 헤헤…에헤헤헤헤헤.”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자기 자신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는 뉴비’만큼 귀여운 콘텐츠가 또 있을까?
그러자 내 앞에 있던 그레이 시티의 플레이어들은 전부 그 자리에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히익. 고, 고인물.”
“어헉? 저 진성 변태가 여긴 왜…….”
“망했다. 진짜가 나타났어.”
눈이 풀려 있던 놈들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온다.
히죽히죽 미소 짓던 놈들이 표정관리를 시작했다.
칼을 핥던 이들은 슬그머니 칼을 허리춤으로 숨긴다.
정신병자, 망나니, 살인광, 분노조절장애 코스프레를 하던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으로 돌아와 허둥지둥 주워섬겼다.
“아, 돌발퀘 깨려고 했는데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네요. 님들 그럼 수고요.”
“맞다, 학원 갈 시간 다 됐네. 숙제도 있는데.”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저 이만 나가 볼게요. 저희 집 고양이가 오늘 생일이라.”
“저도 세탁기에 빨래 넣는다는 게 모르고 원심분리기에 넣었네요. 다음에 봐요 다들.”
하지만 어딜 내빼려고?
“못 가. 히히.”
나는 바람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형아랑 깎단 놀이 하자. 나는 찌르고, 너는 도망가고.”
그레이 시티 빌런들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킥…킥킥…킥킥킥킥. 사, 살려 주세요. 아. 저 원래 이렇게 안 웃는데, 하하하……”
“……으아아, 눈 마주쳤어. 느껴져, 저건 진짜배기 미친놈이야! 도망가야 돼!”
“틀렸어. 흉내도 못 내겠어. 괴물을 만난 것 같아.”
나와 눈을 마주친 모든 이들이 순간적으로 눈을 깔았다.
플레이어고 NPC고 상관없이.
푹! 푸푹! 뿍! 뿌욱!
그리고 하나같이 내 깎단에 당해 비명에 가 버렸다.
“……부디 또 봐. 나도 이 도시에 한동안 머무를 생각이니까.”
나는 웃는 얼굴로 사망 로그아웃하는 모든 빌런들에게 굿바이 인사를 보냈다.
대부분은 바들바들 떨며 정신줄을 놓았다.
아마 이들 중 상당수는 근거지를 옮기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
“……으음. 역시 미친놈은 미친놈을 알아본다던가?”
유다희는 침음성을 삼키며 나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변태로 보이겠지만 게임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무시무시해 보일 수밖에 없는 내 플레이를 말이다.
‘원래 게임할 때 알몸이나 팬티만 입고 있는 녀석들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법이지.’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불량배들을 정리해 버렸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츄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친구. 잠깐 시청에 간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괜찮아요, 벌거숭이 아저씨. 흔한 일인걸요. 그보다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게 예의바르게 인사한 츄츄.
하지만.
[자경단장 언니이이!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오오오!]
츄츄는 유다희에게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인다.
도도도 달려간 츄츄는 유다희의 다리를 붙잡고 볼을 부비기 시작했다.
호감도가 MAX를 찍은 것도 모자라 그 이상까지 쌓인 모양.
“어어어? 얌마. 이렇게 달라붙지 말라니까. 어우, 참. 뭔 힘이 이렇게 세.”
유다희는 툴툴대면서도 내심 좋은 듯 츄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는다.
나는 그런 유다희를 바라보며 잠시 옛날 일을 회상했다.
‘맞네. 그러고 보니 심해도시 아틀란둠에 갔을 때도 쟤가 먼저 도착해 있었지.’
유다희는 은근히 파이오니아적 기질이 있다.
실제로 중부대륙에서는 돌아다녔던 던전 중 내가 최초 발견자가 아니었던 던전들도 몇 개 있었으니까.
‘참, 예전 퀴즈대회 나갔을 때도 생각나네. 그때를 생각해 보면 유다희가 여기에 훨씬 더 먼저 오긴 했었네.’
나는 옛날 일을 회상했다.
멕심 배 퀴즈대회에서 나왔던 문제 한 토막이 얼핏 기억난다.
Q: 게임 속 남대륙에 있는 NPC들의 나라 ‘그레이 시티’를 알고 계시나요? 이곳 ‘그레이 시티’는 전부 시장 명령으로 인해 기물 파손을 엄금하고 있습니다. 도시 안에 있는 조형물을 파괴했다가는 상당한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를 당하게 되는데요! 놀랍게도 이 도시에 있는 조형물 중 파괴해도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 기물이 있다고 합니다! 과연 어떤 것일까요?”
당시 유다희의 대답은 당찼다.
A: 정답은 전 시장 ‘로드리고’의 흉상입니다! 현 시장 ‘시혼’은 전 시장 로드리고와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오로지 그의 흉상만큼은 파괴해도 죄를 묻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그레이 시티’에 갔었거든요! 개인방송에서 남대륙 최심층부까지 가 보는 미션이 있었는데, 그때 이 도시의 설정에 대해서 알게 됐어요! 뭐, 그 뒤로 필드 몬스터들에게 바로 죽어서 자세히 탐험하지는 못했지만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애장품 경매 끝나고 잠깐 얘기했을 때 자경단장 역할을 맡고 있다는 얘기도 했었고.’
유다희는 행운이 따르는 체질에 게임 감각도 좋으니 그레이 시티의 자경단장이라는 희귀 호칭을 받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뭐, 최초 입장객 특전도 있었을 것이고.
그때.
“……야, 너는 어떻게 할 거냐?”
유다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짐짓 퉁명스러운 어조.
하지만 내 눈치를 보고 있음이 분명한 표정이었다.
나는 되물었다.
“뭐 말야?”
“아니, 그… 마약공장 토벌 퀘스트. 우리 둘이 받았잖음.”
유다희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했다.
……그거야 뭐 그리 생각할 게 있나?
나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나 혼자 할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