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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89화 (489/1,000)
  • 490화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3)

    나는 오물이 흐르는 다리와 디딜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좁고 가파른 계단, 약쟁이들과 시체들이 뒤섞여 있는 뒷골목을 지나 그레이 시티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몇 킬로미터 안 되는 이 길을 걷는 동안,

    시선이 마주쳤다는 것 때문에 시비에 휘말린 게 12번.

    영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시비에 휘말린 게 21번.

    취객에게 걸린 시비가 19번.

    다진 것 싹 다 내놓으라는 노상강도에 의한 시비가 31번.

    그리고 알몸으로 다니는 게 기분 나쁘다고 걸려온 시비가 632번.

    총 715번의 시비를 모조리 돌파한 끝에 나는 그레이 시티의 시청 역할을 하는 커다란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직사각형의 벽돌을 빙 둘러쌓아 만들어진 무미건조한 성.

    그것은 흑색도 백색도 아닌 회색이다.

    “뭐, 온통 다 화산재 투성이니 당연한 건가.”

    용과 악마의 전쟁은 세상에 대격변을 불러왔고 그 때문에 지각이 불안정해져 화산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레이 시티는 그렇게 활발해진 화산의 분화로 인해 화산재에 뒤덮이게 된 비극의 도시였다.

    “뭐, 원래부터 흑도 백도 아닌 회색분자들의 도시라는 설정이었으니까. 이제는 살인자들의 도시가 되어 버렸지만.”

    그레이 시티는 용과 악마 사이에서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중립국.

    하지만 말이 중립국이지 화산 폭발로 인해 처참하게 변한 지대와 들끓고 있는 범죄자들 때문에 누구도 이 도시를 점령하려 하지 않는다.

    물가도 비싸고 딱히 좋은 아이템이 산출되지도 않는다.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마을의 지정학적 위치가 딱히 전략적이지도 않다.

    그저 지형 특성상 카르마 수치가 가려진다는 것 때문에 오직 살인자들에게만 더없이 매력적인 낙원인 것이다.

    쾅쾅쾅!

    나는 깎단을 들어 성문을 두드렸다.

    반응은 바로 왔다.

    끼긱-

    성문이 열리자 건장한 체격의 NPC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사 귀찮은 표정의 경비병들이었다.

    [무슨 일이냐?]

    나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시장을 만나고 싶은데.”

    내 말에 경비병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뭐? 시장님을 만나? 우리 시장님이 그렇게 한가하신 줄 알아?]

    [거기에 그 복장은 뭐야? 당신 미쳤어?]

    [확 노역장으로 보내 버리는 수가 있어. 그런 음란한 복장으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죄로……]

    역시나 경비병 NPC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 이 살벌한 그레이 시티에서 완장질 하고 다닐 깡단이면 어지간한 위협에는 쫄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그레이 시티의 공무원들에게 무조건 먹히는 키워드 하나를 알고 있다.

    “나는 도시를 ‘청소’하러 온 거야. 안내나 해.”

    그러자 경비병들이 한쪽 눈썹을 까닥 움직였다.

    청소, 도시 정화, 혹은 환경 미화 등등의 특정 키워드.

    그레이 시티의 공무원이라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전부 이런 고민을 하고 산다.

    아무리 썩어빠진 이들이라고 해도 좀 깨끗한 곳에서 살고 싶은 욕망은 다들 있을 테니까.

    …그것이 길거리이든 인성이든 말이다.

    경비병들은 나의 위아래를 흩어보며 미심쩍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시 미화를 하고 싶은 거라면 우리 선에서 일거리를 주지.]

    그러자 귓가에 알림음이 떴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의 하수처리장 청소’>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시청 문을 두드린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그레이 시티의 하수처리장의 오물들을 정화하자>

    <※보상: 120만 골드, 경험치, ‘미약한 힘이 느껴지는 봉인서’>

    나름 흥미로운 히든 퀘스트이다.

    게다가 저 ‘미약한 힘이 느껴지는 봉인서’는 꽤나 쓸 만한 아이템.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빠. 그딴 잡 퀘스트를 할 시간이 없어.”

    그러자 경비병들은 탐탁찮은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흠 그래? 보기보다 배포가 있군. 그럼 다른 일은 어때?]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의 뒷골목 청소’>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의 하수처리장 청소’를 3초 이내에 거절한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그레이 시티의 뒷골목 오물들을 정화하자>

    <※보상: 240만 골드, 경험치, ‘상당한 힘이 느껴지는 봉인서’>

    보상이 거의 두 배로 좋아졌다.

    전의 히든 퀘스트를 단호하게 거절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히든 퀘스트.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 잡퀘는 안 해.”

    그러자 경비병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흐음. 보아하니 청소를 하러 온 것이 아니군. ‘그 공고’를 보고 온 건가?]

    그렇다.

    나는 그레이 시티에서 은밀하게 모집하고 있는 ‘청소부 모집’ 공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서 청소부란 단순히 오물만을 치우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내, 나는 경비병들의 은밀한 눈짓을 받으며 성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얼마간 걸으니 곧 복도의 끝이 보인다.

    시장실로 통하는 문이 커다랗게 나 있었다.

    경비병들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흠, 원래대로라면 복장 검사를 구석구석(?) 해야 하는데……. 알몸이라서 이건 뭐.]

    “무기라면 하나 있는데.”

    [그딴 무기는 됐어. 더러우니까 빨리 들어가기나 하라고.]

    복도 맨 끝의 방, 다소 투박하게 느껴지는 집무실 안에서 나는 이 성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레이 시티의 시장실에 온 것을 환영하네, 낯선 이여.]

    시장실이 열리자 까무잡잡한 피부의 땅딸보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짧은 흑발에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사내였다.

    <시혼 시장>

    그가 바로 이곳의 시장 NPC이다.

    경비병들이 나가자 나는 그와 독대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지? 그리고 소지품 검사를 얼마나 당했길래 옷이 그 모양인가?]

    “다들 성(城)에 대해 개방적이더군. 소지품 검사라면 안 했다.”

    [뭐, 그래. 경비병들에게 일러두긴 했었지. 도시 미화에 관심이 있는 자는 그냥 들어오게 하라고.]

    시혼 시장은 거만한 자세로 두터운 시가 한 대를 빼어 물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문득 신분증을 까고 싶어졌다.

    사실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의 명예 백작’ 신분이라면 시혼 시장에게서 경례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인데.

    ‘…에이, 됐다. 귀찮네.’

    NPC에게 갑질해서 뭐 할 텐가?

    그냥 적당히 대사 [SKIP] 시키고 퀘스트나 받아 가면 그만인 것을.

    시혼 시장은 충실하게 자신의 대사를 읊었다.

    [앞서 경비병들의 일거리를 거절한 걸 보니 쓰레기나 줍고 구정물이나 닦으려고 온 것 같지는 않군. 원하는 게 뭔가?]

    “말했잖아. 청소를 하러 왔다고. 진짜 근본적인 청소.”

    [흐음.]

    시장 시혼은 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우리 그레이 시티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는 ‘치안 문제’야. 알고 있겠지?]

    “그럼 알지. 여기까지 오면서도 엄청 느꼈어. 자그마치 715번이나 시비를 걸렸다고.”

    [……? 그 정도나?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쯤 되면 당신 문제도 있지 않나? 복장이라거나…….]

    “치안 문제지 내 문제가 아냐.”

    [……치안보다는 치한 문제인 것 같은데. 뭐, 일단 알겠어.]

    말을 마친 시혼 시장은 입에 문 시가를 들고 창 너머의 먼 산비탈을 가리켰다.

    [사실 도시 곳곳에 널린 쓰레기들은 사실 진짜 문제가 아니야. 그보다는 ‘인간 쓰레기’들이 더욱 시급하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그레이 시티의 야경은 살풍경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과 그 위로 껑충껑충 솟은, 다 쓰러져가는 불법 증축물들.

    그 사이에 구멍처럼 숭숭 나 있는 골목길 비탈로 구정물들이 졸졸 흘러간다.

    그 구정물들이 모이는 커다란 수로가 도시 바깥의 커다란 회색 담벼락을 빙 에둘러 지나고 있었다.

    그 회색 담벼락 너머에는 커다란 숲이 있었고 그 숲의 끝에서는 보라색 매연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붉게 저물어 가는 노을 때문에 그 연기들은 더욱 음흉하고 불길해 보인다.

    나는 저 연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의 마약 공장 토벌’>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히든 퀘스트 ‘그레이 시티의 뒷골목 청소’를 3초 이내에 거절한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그레이 시티의 마약팔이들을 소탕하자>

    <※보상: 480만 골드, 경험치, ‘살인자들의 탑 입장권’>

    ‘마약 공장.’

    드디어 굵직한 퀘스트를 물었다.

    저걸 소탕하면 그레이 시티를 상당히 정화할 수 있다.

    나아가 내가 진짜로 목표로 하고 있는 ‘살인자들의 탑’에도 한 발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의 침묵을 오해한 것인지, 시혼 시장은 껄껄 웃었다.

    [이 친구, 쫄기는. 걱정 말게. 내가 설마 자네 혼자 보내겠나?]

    ……?

    내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시혼 시장은 나를 향해 윙크를 해 보였다.

    [든든한 지원군 하나를 붙여 주지.]

    이내 그는 벨을 눌러 누군가를 호출했다.

    나는 시혼의 설명을 듣고 그 조력자가 누구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취임한 젊은 자경단장, 그레이 시티 빈민가의 범죄율과 유아사망률을 대폭 낮춰 ‘빈민가의 성녀(聖女)’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존재.

    젤리팔이 소녀 츄츄를 통해 한번 들은 적 있었기에 그 정체가 더욱 궁금했다.

    ‘유저일까? 아니면 NPC?’

    나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시장실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자애롭고 푸근한 미소를 가진 할머니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그때.

    삐걱-

    마침내 시장실 문이 열리며 시혼 시장을 향해 심드렁한 목소리를 내는 이가 나타났다.

    “불렀냐?”

    빈민가의 성녀가 나타났다.

    ……어딘가 껄렁한 태도로.

    나는 포커 페이스를 가장하려 했지만 절로 벌어지는 입을 완전히 앙다물 수는 없었다.

    한편.

    “……!?”

    내 모습을 본 성녀의 표정도 꽤나 동요하는 기색이다.

    반달 모양의 도톰한 눈썹.

    하얀 얼굴. 사슴처럼 큰 눈.

    유다희.

    얘가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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