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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88화 (488/1,000)
  • 489화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2)

    [스마일 젤리 많이 팔았냐? 어디 좀 보자.]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츄츄의 손에서 바구니를 빼앗았다.

    [오? 바구니 안이 텅 비었는데? 이 맛없는 젤리를 사 먹는 사람이 있다니.]

    [하하하! 소중한 일괄결제 고객을 만났군.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손님인데 말이야.]

    [츄츄젤리는 아직 몇 백 개는 더 있잖아! 안심하고 팍팍 사라고 해! 너도 좀 팍팍 만들어 팔고!]

    세 명이나 되는 남자가 츄츄를 둘러싸고 윽박지른다.

    어느 세상을 가나 어린아이가 핍박받는 것은 보기 힘든 장면이다.

    ……그래서 난 가끔 내 깎단이 부럽다.

    칼에는 눈이 없는 법이니까.

    착!

    내 얼굴에 피카레스크 마스크가 덮였다.

    나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앞도 보지 않고 바로 깎단을 휘둘렀다.

    빠악!

    거꾸로 휘둘러진 깎단은 몽둥이가 되어 정면을 노린다.

    하지만. 그레이 시티의 닳고 닳은 NPC들은 의외로 레벨이 높다.

    [어엇!? 뭐야 이 자식!]

    놈들은 그 찰나의 순간 허리춤에서 칼을 빼들어 나의 깎단을 막아 내었다.

    하지만 내 깎단은 풀강을 통해 무려 S+등급의 위력을 지니게 된 상태.

    NPC의 너절한 롱소드로 막아 낼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다.

    땅! 우지직!

    칼이 부러지고 방패가 아작나는 소리.

    손상되거나 부서지는 것을 넘어 소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장비들의 너머로 겁에 질린 눈망울들이 보인다.

    “갓챠.”

    나는 그 상태 그대로 깎단 몽둥이를 휘둘러 눈앞의 NPC 셋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억! 어억! 사, 살려 주십쇼… 꺼흑!?]

    두부처럼 깨지는 무기와 방어구에 경악한 NPC들은 감히 저항할 생각 한번 못해 보고 나에게 얻어터졌다.

    “머~어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머~어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바아아알. 머리! 어깨! 바알~ 무릎, 발. 머~어리, 어깨, 무릎, 귀, 코, 귀.”

    [끄악! 끄어어억! 그, 그만, 제발!]

    “이곳이 목심. 근육막 사이에 지방이 적당히 박혀 있어 풍미가 좋지. 다음은 등심. 가장 연하고 지방이 적어 담백한 부위야. 계속해서 몸으로 알려 주지. 여기는 채끝, 치마, 부채, 우둔, 양지, 차돌박이……!”

    [주, 죽는다! 진짜 죽을 것 같다고!]

    “안심해.”

    [엇, 어어? 사, 살려 주시는…?]

    “육질이 부드럽고, 지방이 거의 없는데다가 수율이 적어 매우 귀한…….”

    퍼억!

    내 깎단이 앞 녀석의 허리께를 파고든다.

    “안심으로 하겠다고.”

    [게에엑!]

    앞의 녀석이 무릎을 후들거리며 몸을 비틀자 뒤에 있던 녀석이 나를 덮쳤다.

    [너 이 자식! 내 동료를!]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보군.”

    휘이익-

    깎단이 녀석의 몸을 부드럽게 훑더니 어느 순간 강력한 기세로 녀석의 양어깨를 부숴 놓는다.

    [아아아아악!]

    “운동량이 많은 부위라 결이 거칠고 지방이 적어 주로 국거리로 이용되는 부위. 그곳이 사태다. 어때 이제 파악이 되나?”

    그러자 결국 마지막 녀석까지 용기를 내어 나에게 덤벼들었다.

    [으아아아! 그만! 그만하라고!]

    나는 흐뭇하게 녀석을 마주 보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현실의 불량배들은 줄행랑을 놓기 일쑤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녀석은 강력한 적대감을 표하며 나에게 달려왔다.

    “말 그대로 만용이군.”

    깎단이 내 등 뒤를 왼쪽으로 빙글 돌았다.

    “만화 같은 용기 말이야.”

    동시에 나는 깎단의 무게에 기대어 왼쪽으로 무게중심을 살짝 이동했다.

    …쿠당탕!

    마지막 녀석의 돌진이 한 끗 차이로 나를 빗겨 갔다.

    나는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른 놈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섰다.

    “그만하지? 너희들 공격은 뻔히 다 보여.”

    [으윽……. 어째서……!]

    “전지적 정육 시점으로 보면 다 보이거든.”

    내 계속되는 하이개그에 감동했는지 마지막 녀석은 눈빛에 존경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젠장! 재미없는 육류 개그는 어디서 배운 거야! 네놈은 부끄러움도 없는 거냐! 그만해! 그만하라고!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

    “응~ 계속할 거야.”

    네놈들도 그동안 츄츄가 그만해 달라고 했을 때 무시하고 계속 괴롭혔을 거잖아.

    …휘리릭! 따닥!

    깔끔한 2연격이 마지막으로 녀석의 양 팔을 내리찍었다.

    [끄아아아악! 내 손!]

    “어때? 짙은 육색, 진한 육향, 풍부한 육즙으로 인해 고기의 식감을 즐기기 딱 좋은 부위. 그곳이 바로 전지다.”

    [으으으…전지…적……이란 말은……그런 뜻이…….]

    녀석이 마침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려 하자 나는 얼른 그를 일으켜 세웠다.

    “어허!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고 기절해야지.”

    그러나.

    [차라리… 죽여… 끄르륵!]

    털썩!

    녀석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까지 내가 늘어놓은 노잼 말장난들은 마초적이고 미성숙한 이 하급 NPC들에겐 치명적인 대화 알고리즘이었으니까.

    육체적 데미지보다 정신적 데미지가 큰 만큼 과실치사는 일어나지 않고 모두 얌전히 혼절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레이 시티 전체의 적대수치는 절대 올라가지 않는다.

    NPC들도 죄다 범죄자들인 그레이 시티에서만 가능한 편법이었다.

    [와아아…….]

    츄츄는 그 옆에서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바로 그때.

    [어이! 거기 무슨 소란이냐!]

    순찰을 돌던 자경단 NPC들이 소동을 감지하고는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태연하게 눈앞 NPC들의 악행을 고발했다.

    “여기 이놈들이 세금도 내지 않는 주제에 불법으로 상인을 착취했습니다.”

    [음, 그런가. 그렇다면 탈세에 공갈, 협박죄로군.]

    자경단의 경비병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쓰러진 세 NPC에게 포승줄을 묶었다.

    그리고.

    …꽈아악!

    내 손목에도.

    “앗!? 아니 저는 왜? 저는 그냥 선량한 여행자인데요. 위기에 처한 소녀를 구한.”

    그러자 경비병 NPC들은 경멸에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그런 복장으로 소녀에게 접근해 젤리를 샀다 이거지?]

    [혹시 무슨 비밀 친구 같은 것을 하자고 한 것은 아니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앞으로 나쁜 짓을 할 것 같은 복장이다. 따라왓!]

    이로서 나는 현실에 이어 게임에서도 ‘공연음란죄’ 처분을 받게 되었다.

    ‘으음, 살면서 두 번이나 같은 이유로 공권력의 맛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옆에 있는 츄츄에게 손을 흔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나는 공연음란죄 및 특수폭행죄로 구속되었고 자그마치 2시간 동안의 채석장 노가다 징역을 살게 되었다.

    ‘아니 왜 살인죄보다 형량이 더 높은 건데?’

    말이 채석장이지 실제로는 폐허가 된 구역으로 가 곡괭이를 들고 잿더미를 파내 쓸 만한 벽돌이나 철근 등을 골라내는 단순한 작업.

    나는 화산재들을 걷어내고 재활용이 가능한 건축자재들을 꺼내며 생각했다.

    ‘근데 그레이 시티 주제에 자경단이 묘하게 정의롭네.’

    원래라면 이 타락한 도시의 경비병들은 거의 대부분이 썩어 있어야 한다.

    오히려 뒷돈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을 대신 죽여 주기까지 하는 것이 그레이 시티의 경비병.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그레이 시티에 가끔 멀쩡한 경비병들이 보인다.

    대부분의 경비병들이 의욕 없고 나태한데다가 썩어 있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가뭄에 콩 나듯 멀쩡한 녀석들이 있는 것이다.

    나를 체포해 온 경비병들도 이 경우에 속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두 시간 뒤.

    나의 징역이 끝났다.

    예전에 드레이크와 함께 수행했던 농장주 레글리의 커피밭 일일퀘스트보다 더 지겹고 무의미한 노역이었다.

    내가 곡괭이와 안전모를 반납하고 채석장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을 때.

    [……어!?]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는 두 눈을 크게 뜬다.

    아직 젊어 보이는 얼굴의 경비병이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한 달음에 달려와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추, 충성!]

    “……?”

    나는 뭔 일인가 싶어 시선을 틀었다.

    그러자 젊은 경비병은 더듬거리는 어조로 내게 물었다.

    [호, 혹시 고인물 백작님 아니십니까?]

    ……아!

    이 친구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예전에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에서 엄청난 규모의 돈지랄 파티를 연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유토러스의 명예 백작 작위까지 수여받았었고.

    “나를 아나?”

    [저도 유토러스 출신인데 알다마다요! 그때 백작님이 나눠 주신 금화로 제 부모님이 지병도 치료하셨는걸요. 제 여동생도 지금 저택의 메이드로 일하고 있는데 백작님 덕분에 스크루지 후작님도 마음을 바꾸셨는지 요즘은 그렇게 잘해 주신답니다.]

    “오오, 그거 잘됐구만.”

    [넵! 전부 고인물 백작님의 덕분입니다. 진작 백작 신분을 밝히셨더라면 여기서 이렇게 노역하실 필요도 없으셨을 텐데. 송구하네요.]

    스크루지 후작과의 만남은 악마성좌 마몬을 잡기 위한 포석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근황을 전해 들으니 뭔가 즐겁다.

    ‘이 맛에 자잘한 퀘스트 깨지.’

    나는 간만에 마음이 헛헛해지는 것을 느끼며 노역장을 나섰다.

    흠, 그나저나 유토러스의 명예 백작 작위라.

    이거 써먹을 수 있겠는데?

    ‘……내가 왜 이걸 까먹고 있었을까.’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의 작위는 어디를 가도 인정받는다.

    이 도시에서도 잘만 쓰면 꽤나 도움이 될 것 같았다.

    *       *       *

    몸에 묻은 돌가루와 재를 털어내며 채석장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츄츄를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었다.

    츄츄는 새초롬한 얼굴로 채석장의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손에 두부 한 모를 든 채로.

    [아, 아저씨. 아까는 고마웠어요.]

    츄츄는 빨개진 얼굴로 내게 두부를 내주었다.

    나는 두부를 받아들어 한입 씹었다.

    ‘음. 이것도 슬라임 젤리였군.’

    묘하게 말랑말랑하고 아무 맛이 없는 이 느낌.

    […호에엥?]

    채석장에 있는 동안 품에서 코를 골며 자던 쥬딜로페가 슬그머니 일어나 군침을 흘리는 걸 보니 이 젤리는 역시 와두두 입맛에만 맞나 보다.

    그때.

    옆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츄츄가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 근데 왜 저한테 잘해 주시는 거예요?]

    그레이 시티의 어린아이들은 일반적인 어린아이들과는 달리 자신들에게 오는 호의에 무척 낯설어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그냥 당연하게 받을 수 있는 많은 호의들이 이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이들은 무조건 사기꾼, 도둑놈, 혹은 살인범들이다.

    NPC고 유저고 모두 똑같다.

    애초에 그런 놈들만 몰려드는 도시니까.

    나는 츄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상적인 NPC나 유저들이 없으니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지.”

    [……?]

    “하지만 조금만 참으렴. 이 도시도 곧 살기 좋아질 거야.”

    나는 내가 이 도시에서 앞으로 벌일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그래도 이 도시에 나쁜 어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츄츄는 다소 의외의 말을 했다.

    [새로 부임해 오신 자경단장님은 정말 착하신 분이신걸요? 빈민가의 아이들을 엄청 잘 챙겨 주셔요. 그래서 우리끼리는 성녀(聖女)라고 부르죠.]

    자경단장? 빈민가의 성녀? 그런 설정의 NPC가 있었던가?

    내가 회귀하기 전 세상에서는 없었던 설정 같다.

    ‘혹시 유저인가? 그렇다면…….’

    보통 어린이를 좋아하고 예뻐한다고 해도 그저 게임 속 NPC를 대하는 수준인 것이 대부분이다. 어차피 게임 속 설정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이런 척박한 곳까지 와서 아이들을 위한다며 보호 활동을 한다는 것은 게임 스토리에 그만큼 깊게 몰입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게임을 진정성 있게 플레이한다는 점에서 꽤나 호감이 간다.

    ‘어차피 그레이 시티는 변해야 한다. 조디악의 근거지를 뿌리 뽑으려면 말이야.’

    아마 그 자경단장이라는 자와 나의 목적은 일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 시티가 정화되면 나는 퀘스트도 클리어하고 조디악의 자금줄도 말릴 수 있어서 좋고, 그는 원하던 아동 보호를 실현할 수 있으니 좋고.

    이것이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 아니던가?

    ‘……그러기 위해선 제일 먼저 찾아갈 NPC가 있지.’

    나는 츄츄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레이 시티의 중심부, 제일 높은 언덕 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넓은 성채.

    바로 그레이 시티의 시장 NPC ‘시혼(Sihon)’이 취임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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