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나는 홀로 게임에 접속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제일 먼저 할 일은 당연히 조디악을 잡아 족치는 것.
꽤나 위험한 일이 될 수 있기에 이번에는 혼자 왔다.
‘차라리 혼자가 낫지. 그 짜증나는 맵에서는…….’
내가 이번에 향할 곳은 ‘살인자들의 탑’, 그레이 시티에서 특정 퀘스트를 수행하면 넘어갈 수 있는 히든 던전이다.
던전의 특성 상 파티 플레이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원수와 함께하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괴상한 시스템의 던전이 바로 살인자들의 탑이니까.
나는 후덥지근한 물안개를 걷어내고는 저 산마루 아래에 펼쳐진 잿빛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남대륙 깊은 곳.
내 시야가 닿는 끝에는 제법 높은 고산지대에 위치한 도시 하나가 있었다.
온통 우중충한 잿빛으로 물든 도시.
오래 전 커다란 화산이 폭발해 그 화산재가 온 땅을 뒤덮은 이래 쭉 칙칙한 회색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이다.
정식 명칭 ‘그레이 시티’
그리고 ‘쓰레기의 도시’, ‘머더러들의 천국’, ‘카르마의 땅’, ‘무법지대’ 등 온갖 불명예스러운 별명들이 줄줄이 뒤를 잇는 맵.
나는 드디어 이곳에 왔다.
“……공기부터가 역하네.”
그레이 시티의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물안개가 짙어진다.
안개 속을 걸을 때마다 눈이 매캐한 것이 담배냄새가 진하게 섞여 있는 모양.
나는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벽을 지나 껄렁한 태도로 서 있는 경비병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좁고 가파른 골목, 제멋대로 높아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하는 계단들, 졸졸졸 흐르는 구정물.
높고 너저분한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비탈계단에 몇 명인가의 사내들이 모여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NPC인지 플레이어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나같이들 죽은 동태 눈깔이다.
아슬아슬하게 쓰러지지 않은 채 그저 높이만 솟구친 건물들.
규모는 꽤 컸지만 전혀 웅장해 보이지 않는다.
비루먹고 깡마른 집들은 썩어 가는 나무판자로 엉성하게 증축되어 있었다.
나무판자들 틈새로 벽 너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가 전부 들여다보인다.
촥-
사람들은 길거리에 거침없이 오물을 뿌렸다.
이 거리에 수도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집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정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비탈길 아래 벌거벗은 아이들이 다 터진 돼지 오줌보를 걷어차며 놀고 있었다.
하늘을 수천 조각으로 땅 따먹고 있는 빨랫줄에는 빨아도 빨아도 누런 빨랫감들이 더러운 바람에 펄럭인다.
그때.
“이 새끼가 진짜 장난하나!”
저 골목 어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얼마를 잃었는지 알아? 주사위에 장난질 쳤잖아! 눈금 보여 달라고!”
“거 새끼, 더럽게 예민하게 구네. 개평도 줬구만.”
후드를 깊게 눌러쓴 두 명의 사내가 벽에 기대어 티격태격한다.
그러더니.
푹!
한 명이 단도를 꺼내 다른 한 명의 옆구리를 찔렀다.
“…꺽!?”
단도에 찔린 이는 허리를 움켜잡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즉사해 버렸다.
찌른 이는 흰 이를 드러내며 비죽 웃었다.
“아, 또 카르마 수치 올랐네.”
그러자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경비병 몇 명이 단도를 든 사내를 불렀다.
[어이, 너 마을에서 살인을 하면 어떻게 해.]
“아이 씨. 재수 없게 경비병이 지나가고 지X이야.”
[얌전히 따라와. 도망갔다간 바로 창 맞을 줄 알아.]
살인을 저지른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경비병 NPC에게 다가간다.
이윽고 그는 경비병에게 손목을 묶인 채 비탈길 아래로 어슬렁 어슬렁 내려갔다.
경비병은 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저 아래 노역장에서 1시간 동안 강제노역을 하면 풀어 주지. 채석장, 농장, 목장, 벌목장 중에……]
“예이- 예이- 채석장 가겠습니다아~”
살인자는 뻔뻔하게도 히죽거린다.
경비병들은 그를 저 아래 채석장으로 보내고는 뒤돌아섰다.
그게 끝이었다.
“……거 PK 처벌 한번 가볍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플레이어를 마을 안에서 죽였는데 처벌이 강제노역 1시간이라니.
다른 일반적인 마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
[아이고! 이놈의 약쟁이들, 도박쟁이들 지겨워 죽겠네! 으응? 이거 건너건넛집 막내아들 아녀? 즤네 집 가서 죽지 왜 여기 와서 죽고 난리람!]
판잣집 문을 열고 나오던 할머니가 벽에 기대어 죽어 있는 시체를 보고 짜증을 낸다.
…풍덩!
그녀는 손에 든 빗자루를 이용해 시체를 옆에 도랑으로 밀어 떨어트려 버렸다.
골목을 오가는 이 누구도 길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공을 차고 노는 아이들마저.
“참. 추억이 새록새록 하구만.”
나는 도랑물에 흘러 내려가는 시체를 쓰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이곳 그레이 시티는 ‘살인자들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쌓이는 카르마 수치가 이곳에서는 모두 블라인드 처리되기 때문이다.
즉 NPC를 폭행했거나, 무고한 플레이어를 죽였거나, 공탁금을 가지고 사기를 쳤거나, 물건을 훔친 범죄자들도 이곳에서는 평범한 유저처럼 퀘스트를 받거나 물건을 사는 등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조디악, 그놈에게 딱 어울리는 도시야.”
조디악은 카르마 수치가 너무 높아서 다른 마을에서는 아이템 거래나 퀘스트 수행을 할 수 없다.
성문에서 경비병들에게 투창 세례나 안 받으면 다행이겠지.
아마 조디악은 이곳 그레이 시티에서 사냥으로 모은 아이템을 처분하거나 레이드에 필요한 소모품들을 조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눈을 빛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중앙 광장이 보인다.
뿌연 잿가루에 뒤덮인 광장, 물안개에 섞여 부유하는 화산재의 모습이 으스스하다.
그때 나는 한 소녀와 마주쳤다.
[젤리 사세요, 젤리~]
소녀는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석탑 앞에 앉아 젤리를 팔고 있었다.
나는 그 석탑에 볼일이 있었기에 소녀에게 다가갔다.
<젤리팔이 소녀 츄츄>
츄츄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
내가 말을 걸자 츄츄는 내게 바구니 하나를 내밀어 보였다.
[슬라임 젤리 하나 사세요, 아저씨! 맛은 없지만 가격이 싸요!]
바구니 안에는 슬라임 모양의 젤리들이 가득했다. 투명한 것이 무색, 무취, 무맛이 뻔해 보인다.
나는 소녀를 석탑에서 비키게 하기 위해 젤리를 사기로 했다.
“젤리 얼마니?”
[100골드요!]
현실의 돈으로는 10원 남짓 하는 금액.
내가 100골드를 주자.
[여기요!]
놀랍게도 소녀는 바구니 속의 슬라임 젤리를 모조리 내게 넘겨주었다.
한 개당 100골드인 줄 알았는데 바구니 전체가 100골드일 줄은 몰랐다.
나는 바구니를 열어 젤리의 정보를 열람했다.
-<츄츄의 슬라임 젤리> / 재료 / D
그레이 시티의 명물 슬라임 젤리.
슬라임으로 만든 젤리답게 주변 환경의 영향을 잘 받는다.
슬라임은 기본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잘 받는 생물이다.
화산지대에 사는 슬라임은 불 속성을 가지게 되고 설산지대에 사는 슬라임은 얼음 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 슬라임으로 만든 젤리도 뭐 비슷하겠지.
[호에엥… 오물오물.]
의외로 이 무색, 무취, 무미의 젤리는 내 품속에 있던 쥬딜로페의 식욕을 자극하는 듯싶다.
이 젤리가 와두두 입맛에는 딱 맞나 보다.
“꼬마야. 이제 좀 비켜 줄래?”
내가 묻자 츄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디론가 도도도 달려갔다.
잠시 후. 광장을 벗어났던 츄츄는 이내 어디에서 시들어 가는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와 내 앞의 석탑에 내려놓았다.
[이것은 위령비예요. 도시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츄츄는 슬픈 눈으로 위령비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위령비에는 내가 아는 이름 하나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꽃을 노래하던 처녀 윤솔.
여기 잠들다.
(BP 765~782)
R.I.P
나는 위령비에 적힌 글귀를 보며 쓰게 웃었다.
이런 것을 보고 있노라면 단순히 게임 설정인 것을 알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진다.
한편. 츄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제 오빠가 젤리를 팔다가 떠돌이 불량배들에게 맞아서 죽었어요. 하나뿐인 가족이었는데……. 흑흑흑.]
자세히 보니 위령비에는 그녀 오빠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젤리의 기쁨을 나누던 츄첸.
여기 잠들다.
(BP 854~863)
R.I.P
나는 손을 뻗어 츄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오빠를 죽인 놈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
내 말을 들은 츄츄는 고개를 끄덕인다.
[검은 머리에 창백한 피부, 졸린 듯한 눈에 다크서클이 진한 사람이었어요. 흑마법사였고요.]
……흐음.
나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리고 슬라임 젤리 하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어쩌면 네 오빠의 원수를 갚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자 츄츄는 못 믿는 듯한 눈치다.
[……에이. 아저씨가 어떻게요.]
울적한 표정의 츄츄는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도와주고 싶다는 감정을 느낄 만큼 귀여웠다.
…물론 이 도시에 정상인은 없겠지만 말이다.
“도와줄 수 있어. 아저씨, 생각보다 세.”
내가 씩 웃자 츄츄는 겁먹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내가 아까 꽃을 살 수 있게끔 젤리를 사 줘서인가 그렇게까지 경계하지는 않았다.
[……아저씨, 싸움 잘해요?]
“그럼, 잘하지.”
[거짓말, 옷도 못 입고 다니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의 츄츄.
나는 손을 뻗어 그런 츄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못 입는 게 아니라 안 입는 거란다.”
간만에 뱉어 보는 대사이다.
바로 그때.
츄츄에게 내 힘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어이, 츄츄 이년아! 젤리를 팔았으면 빨리빨리 자릿세를 가지고 와야 할 것 아냐!]
껄렁거리는 대사, 전형적인 등장.
양아치로 보이는 사내 몇 명인가가 골목에서 나와 이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츄츄의 복수’>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슬라임 젤리를 일괄 구매한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츄츄의 오빠를 죽인 이들을 처치하자>
<히든 퀘스트 보상: 슬라임 젤리 제조법>
내가 모르는, 아니 그 누구도 모를 히든 퀘스트가 떴다.
조디악이 츄츄의 오빠를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슬라임 젤리를 모두 사지 않았다면 절대로 발견하지 못했을, 아니 생겨나지도 않았을 퀘스트.
미래를 살아 본 나조차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히든 퀘스트라.
비록 보상이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조디악이 얽혀 있는 이상 난이도는 무지하게 어려울 것이다.
“이거 손해 보는 장사일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작게 투덜거리며 눈앞의 불량배들을 향해 다가갔다.
…….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히든 퀘스트가 훗날 내 목숨을 구해 줄 구명줄이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