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86화 (486/1,000)

487화 성지순례 (2)

나와 윌슨은 커다란 캡슐 앞에 섰다.

이 공간을 꽥 채우고 있는 열일곱 개의 거대한 메인스트림.

하지만, 모두가 번쩍번쩍 빛을 내뿜고 있는데 반해 내 앞에 있는 메인스트림은 검게 죽어있다.

나는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몬>

내가 잡은 고정 S+등급 몬스터.

게임 속 보스 몬스터 마몬이 사냥당한 순간 17개의 서브스트림 중 마몬에 해당하는 스트림이 꺼져 버린 것이다.

[으으, 내가 엄청나게 애써 만든 서브스트림이었는데.]

윌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몬의 데이터가 담긴 캡슐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내가 잡아 버린 것을. 몬스터는 잡으라고 만드는 것이니까.

[진짜 게임 좀 살살 해. 너 같은 플레이어는 처음이라고. 무슨 고정 S+등급 몬스터를 잡아.]

윌슨은 반쯤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고 말이다.

그때.

“……음?”

나는 특이점 하나를 발견했다.

마몬의 데이터가 담긴 캡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그곳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동 중인 데이터 캡슐이 보인다.

<오즈>

죽음룡 오즈.

내가 맨 처음으로 잡았던 고정 S+등급 몬스터.

이 놈을 잡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근데 이건 왜 불이 안 꺼졌지?”

나는 마몬의 캡슐과 오즈의 캡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마몬을 죽인 결과 놈의 캡슐은 꺼졌다.

그렇다면 오즈의 캡슐도 불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즈의 캡슐은 지금도 씽씽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윌슨은 낄낄 웃었다.

“죽음룡 오즈? 그놈이라면 아직 살아 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다고? 그럴 리가!

“오즈라면 분명히 제가 잡았습니다만, 아이템과 보상까지 받았는데…….”

[후후후. 하지만 오즈가 가진 생명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어. 봐, 이렇게나 팔팔한걸?]

윌슨은 손으로 오즈의 캡슐을 쓸었다.

그럴 때마다 캡슐은 반짝반짝 불빛을 뿜어냈다.

나는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때, 윌슨이 갑자기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채 나를 돌아보았다.

[사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

[뭐 때문에 ‘고인물’이라는 캐릭터와 ‘마동왕’이라는 캐릭터를 별개로 구분하는 거야?]

윌슨의 말에 나는 대략의 사정을 설명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책임감 문제부터 시작해 서로 다른 스타일을 통한 다양한 팬층 확보, 이미지 관리 등등 다양한 이점들에 대해 들은 윌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름대로 재밌겠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짤막한 평가였다.

순간, 윌슨은 비죽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옮겨 한 캡슐 앞에 섰다.

<레비아탄>

7대 악마 중 질투와 바다를 지배하는 악마성좌.

고정 S+등급 몬스터 중에서도 많은 것이 베일에 싸여 있는 존재이다.

윌슨은 레비아탄의 데이터 캡슐을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레비아탄을 조심해.]

나는 윌슨의 말에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레비아탄이라면 심해에 사는 거대한 고래, 혹은 뱀장어와 같은 악마로 그 크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예전에 마몬 레이드 때 한번 봤었지.’

잠깐 스쳐 지나가며 본 것이었지만 그 위용이 실로 상상초월이었다.

놈은 내가 회귀하기 전까지 살았던 10여 년 뒤의 미래에도 알려진 정보가 거의 전무하다.

[아무리 너라도 레비아탄만큼은 힘들겠어. 그렇게 숨기고 있는 게 많아서야.]

윌슨은 쿡쿡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서브스트림 정복을 꿈꾸고 있는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이윽고, 윌슨은 손가락을 튕겨 소파 하나를 만들어 내고는 그 위에 푹신하게 앉았다.

그리고 한껏 나른해진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래. 게임을 하는 데 뭐 불편한 건 없고?]

“없습니다.”

[가감 없이 편하게 말해 줘. 너 같이 훌륭한 파이오니아의 의견이야말로 수렴할 가치가 있지.]

“정말 없어요.”

내가 두 번이나 부인하자 윌슨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진짜 없어?]

“네.”

[완벽해?]

“네.”

내가 두 번이나 긍정하자 윌슨의 미간이 더더욱 찌푸려진다.

[……그럼 뭐, 게임 안에서 이상한 것 겪어 본 적 없어? 버그라거나.]

약간 은근해진 목소리.

나는 윌슨의 질문 의도를 잘 몰랐기에 그저 내가 느낀 바대로 말해 주었다.

“뭐, 기술적인 측면에서 약간의 버그들은 있었죠. 조경수역이나 빛과 어둠의 경계 등 맵의 특성들이 겹치는 부근에서 일어나는 설정치 버그라든가. 사람과 사람의 몸이 특정 아이템에 의해 겹쳐지게 되는 버그라든가? 뭐 다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지만요.”

내가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윌슨은 지루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아아, 그래. 그런 것들이야 뭐 상관없어. 엔지니어랑 프로그래머들을 갈아 넣으면 되니까.]

그는 손을 휘휘 젓고는 내게 손짓했다.

그러나 윌슨과 그가 앉아 있는 소파가 내 앞으로 확 다가왔다.

[그런 사소한 것들 말고 있잖아. 그 왜, 좀 더 심각한 거.]

“……예?”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윌슨은 조바심을 내며 나를 올려다본다.

[‘핵’이나 ‘데모 버전’ 같은 거 말이야.]

나는 순간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데모 버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핵이라면 조금 안다.

김정은.

매드독 출신의 김정은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안에서 온갖 핵을 남발하지 않던가?

그녀는 나중에 스피드핵, 에임핵 등 전투 밸런스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헬퍼’뿐만 아니라 돈 복사, 아이템 복사 버그까지 만들어내서 게임 속 경제체제까지 무너트리는 빌런 중의 빌런이다.

나는 모르는 척 시침을 뗐다.

“전혀 들어본 적이 없네요.”

[……그래?]

윌슨은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다.

그러더니 뭔가 결심했다는 듯 작게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클로즈 베타’는?]

이것까지 모른다고 하면 정말로 티나는 거짓말이겠지.

나는 아는 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예전에 몇 번 만났던 카르마 유저가 그런 말을 했었죠.”

[……앙신 조디악이라는 작자 말이지?]

“예. 알고 계시네요?”

[당연하지. 나는 모르는 게 없다고.]

윌슨은 짜증스럽다는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나는 그런 윌슨에게 역질문을 했다.

“그 클로즈 베타라는 게 대체 뭡니까?”

두 가지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다.

첫 번째는 내가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

두 번째는 진짜 궁금해서.

그러자 윌슨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모른다면 됐어.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

[뭐, 이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나쁜 의도를 가진 것 같으니까 간단하게 설명은 할게. 데모 버전이 뭔지는 알지?]

“대충요.”

[제품 소개용 프로그램을 뜻해. 단순한 동작만 반복하거나 극히 일부 기능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주로 시운전용이나 홍보용이야.]

말을 마친 윌슨은 홀로그램에 몇 개의 창을 띄웠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월드맵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지구의 모든 땅을 합친 것만큼이나 큰 이 월드맵을 혼자서 디자인할 수는 없겠지?]

“그야 그렇죠. 그래서 다른 스토리 작가들이 있는 것이고.”

[맞아.]

말을 마친 윌슨은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말야. 가끔 그 스토리 작가들 중에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놈들이 있어.]

“네?”

[스토리 작가들은 내 상상력을 도와 다양한 몬스터, 던전, NPC, 퀘스트, 아이템 등을 만들어 내지. 하지만 그러다 보면 자기가 만들어 낸 창작물에 과한 애정이 갖는 경우가 생겨.]

일명 ‘자캐’ 자작 캐릭터의 줄임말이다.

이 자캐를 디자인하고 설정을 짜는 것에 너무 빠지면 자기가 만든 캐릭터 외의 다른 캐릭터들은 전부 하찮게 느껴지고 더 나아가 모든 캐릭터들이 자기 캐릭터를 위한 조연들로만 느껴지게 될 수도 있다.

[몇몇 스토리 작가들은 자기들의 보잘것없는 스토리에 푹 빠져 자기들만의 세계를 꾸리려고 했지. 그러기 위해 내 기술을 훔쳐 달아났고 말이야. 그것도 게임 오픈 직전에.]

“……아.”

[그렇게 해서 놈들이 만든 것들이 바로 ‘데모 버전’이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전에 급하게 만들어진, 프로토 타입이라고도 볼 수 없는 형편없는 졸작들이지. 뭐 정식 버전에 참고하기 위한 참고 데이터 이상의 의미는 없어.]

“그럼 클로즈 베타는요?”

[그거야 그 데모버전을 플레이한 놈들이 했던 시운전인가 보지. 나는 잘 몰라, 관심도 없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오픈 베타부터 시작했고 클로즈 베타 따위는 하지 않았어. 너도 잘 알잖아?]

나는 윌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디악과 김정은이 손을 잡은 이유를 약간 알 것도 같고.’

뭐, 성실하게 준법 정신에 의거해 게임을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얽힐 일이 없겠지만 말이다.

한편, 윌슨은 내 대답에 어느정도 만족했는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먼 길 와서 나와 어울려 줘서 고마워. 종종 연락하자고. 아! 뭐 부탁할 것 있으면 하고.]

갓겜의 최고 총수에게서 이런 말을 듣다니.

이 사실을 한국의 잘나신 협회 어르신들께서 알면 어떻게 될까?

나는 윌슨과 친분을 만든 기념으로 용기 내어 한마디 했다.

“인증샷 가능한가요?”

[인증샷? 그게 뭐야?]

“같이 사진 찍는 거요.”

[아, 좋아 좋아. 나는 괜찮아. 별로 신비주의 콘셉트도 아니고.]

말을 마친 윌슨은 싱긋 웃으며 나와 셀카를 찍었다.

손에는 뎀 유니버스의 총수임을 증명하는 서류들을 든 채로.

나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웃어 봤자 사진에는 나오지 않지만, 뭐 상관없겠지.

…찰칵!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몇 번 울려 퍼졌다.

‘……이걸 SNS에 올리면 반응 참 볼 만하겠네.’

또다시 뒤집어질 한국 게임계를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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