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85화 (485/1,000)

486화 성지순례 (1)

‘TRPG’란 무엇인가?

컴퓨터가 없던 시절 사람이 종이에 지도를 그리고, 대화로 캐릭터 조종을 하고, 주사위 같은 소도구를 이용해서 스토리를 진행했던 원조 격 RPG.

보드게임처럼 오프라인 상에서 사람들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 대화를 통해 진행하고 각자가 분담된 역할(Role playing)을 연기한다.

세계관 설정과 규칙 등이 담긴 롤북이 따로 존재할 정도로 자세하고 방대하며 자유도가 굉장히 높다.

*       *       *

뎀 유니버스의 본사는 캘리포니아 남부 도시 어바인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이른 오후가 되어서야 뎀 본사를 방문할 수 있었다.

크고 웅장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는 상상과 달리, 뎀 유니버스 안에는 작고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많고 이것들은 전부 수로에 연결된 카누, 장난감처럼 보이는 열차 등으로 이어져 있었다.

직원들의 수는 의외로 별로 많지 않았는데 그것은 대부분 재택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유원지에 있는 물놀이 열차를 탄 것처럼 카누에 탄 채 수로를 나아갔다.

내 뒤에서는 엄재영 감독, 윤솔, 드레이크, 유세희, 마태강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안내를 맡은 홀로그램 속 직원은 특이하게도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는 말했다.

“뎀 유니버스는 박물관, 극장, 도서관 같이 다양한 장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회사 내부를 둘러보며 게임의 설정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근무 시간 내에 투어가 이루어지는 만큼, 개발팀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장소는 오랜 시간 살펴볼 수 없을 수도 있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랄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뎀 유니버스의 본사에 방문한다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엄청난 업적이다.

한국 협회조차도 초대받지 못한 곳.

심지어 뎀의 총수인 윌리엄 윌슨은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정계의 거물들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인물이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의 경험이 평생의 무용담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때, 내 뒤에서 윤솔이 탄성을 질렀다.

“와아, 회사 안에 어린아이들이 엄청 많네?”

그렇다.

주위를 둘러보면 회사 안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죄다 어린아이들이었다.

십대 후반, 조금 많이 어리다 싶으면 7세 이상 정도로 보이는 애들이 돌아다닌다.

테이블에 앉아서 보드게임을 한다거나 책을 읽고 있는 모습들.

물론 옆에는 보호자 역할을 하는 부모들이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는 카누를 타고 회사의 심층부로 들어갔다.

수로가 끝나는 곳에는 작은 돔 형식의 건축물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박물관과 한 개의 생태공원을 지나야 했다.

“땅 진짜 넓다.”

나는 이런 비싼 부지에 이토록 넓은 캠퍼스를 지었다는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1월치고는 매우 따듯한 날씨라서 그런가 걷기에 딱 좋다.

얼마간 걷다 보니 우리 ‘닳고닳은 뉴비’ 구단은 건물 디자인이 하나같이 특이하다는 것만 빼면 일반적인 대학교 캠퍼스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뎀 유니버스 본사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어서 와.]

돔 모양의 건물 안에 들어가자마자 들린 것은 앳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갤러리 형식의 내부, 제목모를 그림들이 수없이 걸려 있는 벽.

허공에서 홀로그램 하나가 천천히 내려왔다.

이제 막 열 살 정도나 되었을까?

아까 카누에서부터 우리를 안내해 주던 어린아이였다.

[내가 윌리엄 윌슨이야.]

솔직히 좀 의외였다.

백발 성성한 노인을 생각했는데.

우리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자 윌슨은 깔깔 웃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데 나이는 상관없잖아? 뭘 따지고 그래.]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저 모습은 홀로그램으로 연출된 모습이고 실체는 따로 있겠지.

윌리엄 윌슨의 모습은 회귀 전 35년의 세월을 살아온 나 역시도 모르는 것이었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탁!

윌슨은 우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러자 우리들의 눈앞에 갑자기 찻잔 하나씩이 생겨났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었다.

“와아, 이거 진짠가요?”

윤솔이 깜짝 놀라 찻잔 손잡이를 잡자 잔은 이내 윤솔의 손을 붕 통과해 버린다.

[그럴리가! 당연히 홀로그램이지!]

윌슨은 깔깔 웃었다.

그리고는 다소 시무룩해진 채 중얼거린다.

[……하지만 걱정 마. 곧 진짜가 될 테니까.]

우리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하고 있을 때, 파티션 건너편에서 정장 차림의 할머니가 나타나 우리에게 진짜 차가 담긴 찻잔을 건네주고 다시 사라졌다.

윌슨은 우리는 쳐다보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만나서 반가워, 닳고닳은 뉴비 친구들. 나는 이 게임의 시작이자 끝이야.]

윌슨의 소개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링트 윌슨.

갓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만들어 낸 최고 개발자.

이 게임 안의 모든 설정과 스토리들은 전부 다 그의 머릿속에서 상상된 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말 그대로 ‘모든’ 것들이.

윌슨은 우리를 향해 두 팔을 쫙 벌렸다.

[이 게임은 내가 상상하는 것을 그쪽 세계에 진짜로 구현해 내지. 인간의 머릿속은 우주와도 같이 넓고 광활한데 나는 내 머릿속의 그것들을 이쪽 세계로 조금씩 옮겨오고 있어.]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건만 윌슨은 혼자서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원래 천재는 외로운 법이랬던가? 그는 상당히 고독해 보였고 그래서일까 우리와의 만남에 꽤나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윤솔이 감탄하며 말했다.

“와아, 신기하다. 한 사람의 상상력으로 그 큰 세계를 만드는 게 가능한가요?”

순수한 질문이었고 그것은 윌슨의 기분을 꽤 좋게 만들었다.

[아하하하. 혼자서 될 리가 없잖아. 나의 상상이 큰 틀을 만들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설정에 살을 붙이고… 구멍을 메우고… 버그를 잡고… 그렇게 다 같이 함께 만들어 가는 거지. 너희들이 잘 아는 크툴루 신화나 SCP재단처럼 말이야. 그래서 이 게임은 모두의 것이라는 거고.]

한 마디로 집단지성의 결과라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하나(One For All), 하나를 위한 모두(All For One)랄까?

윌슨 하나의 상상력을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개발자들이 달라붙어 게임을 가동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윌슨의 상상은 2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즐기는 또 다른 현실이 된다.

윌슨은 말미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작은 설정 정도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윌슨은 손을 움직여 다시 홀로그램 상태창을 만들었다.

위이잉-

갤러리 안에 게임 속 세계가 작게 펼쳐진다.

[으흠, 흐으음, 누구로 해 볼까?]

윌리엄 윌슨은 우리들을 쭉 흩어보았다.

그러더니 중간에 있는 윤솔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러자 게임 세계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윤솔. 그녀의 캐릭터가 게임 세계에 새롭게 생성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윤솔이 아니라 윤솔을 닮은 NPC였다.

윌리엄 윌슨은 방금 게임세계에 추가한 데이터 하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윤솔. 나이는 음… 열일곱 정도로 할까? 미안 네 외형에 따라 내 멋대로 상상해 봤어. 동양인들은 원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여서.]

윌슨은 게임 세계 안에 생겨난 윤솔 캐릭터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윤솔, 그녀는 그레이 시티에서 일하는 꽃집 주인이야. 한가할 때는 찻집도 겸하고 있는 가게지. 손이 곱고 예쁜 것이 특징, 하지만 웃을 때 살짝 보이는 덧니는 콤플렉스야. 다른 사람들은 귀엽다고 하지만 본인은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해. 그래서 기쁜 일이 있거나 웃긴 것을 봐도 항상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지. 기본적으로 따듯한 성격에 길고양이들의 친구야. 노래도 잘 불러서 중앙 광장의 음유시인들과 친분도 많고. NPC 고유 코드는  30211273062190990265891806259103216976010135826214572116105222266589658477417896395175321152563115201695175…… 정도로 해 둘까?]

게임 속 NPC가 점점 생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게임에 새로운 설정 하나가 추가되는 것을 매우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윌슨의 목소리는 어느덧 처연해졌다.

[……아아, 하지만 슬픈 일이야. 어느 날 그레이 시티의 지배권을 두고 싸웠던 용과 악마의 전쟁 탓에 그녀의 운명도 변해버렸어. 악마의 꼬드김, 용들의 오만, 그리고 가엾은 윤솔. 그녀는 그레이 시티의 성벽이 무너지고 최후의 기사마저 쓰러지던 날, 그토록 사랑하던 꽃들과 함께 한 줌 재로 변해 버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훗날 재건된 그레이 시티 중앙의 위령비에 작은 글귀로만 남게 되지.]

동시에 게임 속에서 밝은 미소를 짓고 있던 NPC는 홱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크고 차가운 석탑에 적힌 글씨만이 남았다.

꽃을 노래하던 처녀 윤솔. 여기 잠들다.

(BP 765~782)

R.I.P

갑분싸.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우리가 아무런 말도 없자 윌슨은 당황한 듯 허둥거리며 말했다.

[……쨔, 쨔잔! 벌써 이 게임의 작은 공식 설정 하나가 추가되었어!]

게임 플레이에는 정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공식 설정이다.

괜히 보는 사람만 살짝 우울해지게 만드는.

그제야 윌슨은 시무룩한 표정의 윤솔에게 사과했다.

[……어, 미안해. 아까도 말했지만 이 게임은 순전히 내 상상력이 반영되는 세계라. 너무 내 멋대로 상상했나? ……그치만 나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어서.]

마치 *TRPG가 실시간으로 영상화되는 것을 보는 느낌이랄까?

뭐 아무튼.

우리는 갤러리 복도를 걸어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윌슨은 허공에 둥실둥실 뜬 채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다양한 상상을 하기 위해 책을 많이 읽는 편이야. 아무래도 고전들이 도움이 많이 되지. 하지만 요즘만큼 상상력을 키우기 좋은 시대가 또 없어. 인터넷을 보면 참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넘쳐나거든. 또 순수한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상상도 도움이 되지. 창의적인 것들이 참 많아. 남들이 먼저 상상해놓은 것들이 내게 있어서는 보물과 같달까.]

말을 마친 윌슨은 ‘뭐 내 상상을 따라오는 기술자들만 죽어날 뿐이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킥킥 웃었다.

이윽고. 우리는 갤러리의 끝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오직 나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윌슨은 내 손을 잡고 마지막 방으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17개의 구체가 보였다.

“……세상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게이머로서 이 공간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영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17개의 빛나는 구체는 바로 이 게임을 구성하는 열일곱 개의 메인스트림.

즉 고정 S+등급 몬스터들의 데이터 캡슐이었다!

나는 그중 맨 끝부분에 있는 데이터에 주목했다.

다른 것들과 달리, 그것은 아직 만들어지다 만 듯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윌슨은 턱을 쓸며 고민했다.

[마지막 녀석은 아직 외형을 정하지 않았어. 능력과 특성, 성격이야 다 만들어 뒀지만.]

17번째 고정 S+등급 몬스터.

윌리엄 윌슨은 이 몬스터의 디자인을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신은 세상을 만들고 맨 마지막에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인간을 만들었지.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최고의 역작을 말이야.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윌슨이 이 마지막 몬스터에게 가지는 애착은 꽤나 큰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미래를 살다 왔기에 이 몬스터의 외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불사조’

한쪽 날개는 불, 다른 한쪽 날개는 얼음으로 되어 있는 거대한 새.

세상의 끝에 살며 시간과 공간을 왜곡시키는 절대자.

일곱 용의 위상과 일곱 악마성좌, 대멸종의 두 전쟁군주들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고정 S+등급 몬스터이다.

참고로 나는 예전에 리치 왕 사냥 당시 이 불사조의 힘을 어느 정도 간접체험 했던 바 있다.

피의 연못에 가라앉아 있던 심장을 파괴할 때 말이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윌슨이 내게 넌지시 말했다.

[너라면 내가 마지막 메인스트림의 디자인을 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불렀어. 어때? 내가 이 세계의 마지막 퍼즐조각을 맞출 수 있게 도와주지 않겠어?]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제안이 어디 있을까?

내가 디자인한 몬스터가 이 세계를 열일곱 조각으로 나눠 지배하는 대군주가 된다니!

하지만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내가 살아온 미래에서도 윌리엄 윌슨은 마지막 몬스터의 디자인을 훌륭하게 뽑아냈다.

그 공적을 내가 가로챌 수야 있나.

게임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심은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게임 앞에서 도둑질을 할 만큼 졸렬하지는 않다.

[……그래? 어쩔 수 없지. 혼자서 힘내 볼게 그럼! 흐음~ 독수리로 할까나, 올빼미로 할까나? 독수리는 선지자의 간을 쪼아 먹을 것 같아서 별로고… 역시 지혜로운 올빼미려나.]

윌슨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윌슨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참. 게임 좀 살살 해 줘. 두 캐릭터 모두 다.]

나는 순간 뜨끔했다.

고인물과 마동왕.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윌슨은 그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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