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깽판 (4)
-<지옥불 코어 반쪽> / 재료 / S
반으로 쪼개진 빨간 구슬 조각.
너무나도 뜨거워 악마조차도 열상(熱傷)을 입고 만다는 지옥 동쪽의 불길이 담겨 있다.
빨간 구슬 안에는 작은 불씨가 잠들어 있었다.
작고 귀엽게만 보이지만 한번 깨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산맥 두어 개쯤은 너끈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런 불씨가 두 개.
조디악은 그것들을 인벤토리 안에 갈무리한 뒤 싱글벙글 웃으며 내달렸다.
그때.
피잉-
조디악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틀었다. 그의 뺨을 화살 한 대가 스치고 지나간다.
“푸스스스스… 벌써 따라왔네?”
조디악은 뒤를 흘끗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뒤에서 한, 중, 일의 랭커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귀찮은 것들.”
조디악과 김정은, 방철우, 방철해 형제는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김정은이 헤이스트 마법을 걸어준 덕분에 그들은 여유롭게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1차 목적지인 ‘구불넝쿨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넝쿨들이 잔뜩 자라 복잡한 밀림을 이루고 있는 이 필드는 광활할 뿐만 아니라 입장객의 방향감각을 꼬아 놓기로 유명하다.
나침반이나 지도 등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입장하지 않으면 길을 잃기 십상, 작정하고 숨어드는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조디악과 매드독 일당은 숲 한가운데로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어느 정도 추격자들을 따돌렸다고 생각한 그들은 이내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린다.
조디악은 품 안의 지옥불 구슬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이게 있으면 ‘그것’의 문을 두드릴 수 있지. 이제 머지않았어.”
그는 머릿속의 계획을 착착 실현시켜 나가고 있다.
입가의 음흉한 미소가 그의 심경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때.
“…웃?”
조디악은 얼굴에 달라붙는 넝쿨 한 줄기에 잠시 멈칫했다.
“에이, 이 숲은 다 좋은데 달라붙는 것들이 많아서.”
그는 툴툴거리며 얼굴에 와 달라붙는 넝쿨들을 손으로 걷어냈다.
“정말 넝쿨들이 많네. 간지러워. 성가시고.”
김정은 역시 목과 팔다리에 감겨드는 넝쿨을 털어내며 투덜거린다.
그러나.
“…….”
“…….”
방철우, 방철해 형제는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원래 과묵한 성격이긴 해도 이렇게까지 조용한 것은 조금 의외다.
아니… 의외가 아니라 이상하기까지 한 일이다.
왜냐면 불평이 안 들려오는 것을 넘어 인기척 자체가 느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조디악은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뒤에 따라오고 있던 방씨 형제 두 명이 안 보인다.
“……낙오했나?”
김정은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살폈다.
그때.
문득 고개를 든 조디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철우, 방철해. 방금 전까지 뒤를 따라오고 있던 그 둘이 까마득한 위, 숲의 거목에 목이 매달린 채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두 구의 시체.
혀를 길게 빼물고 있는 것이 그로테스크하다.
오싹…
김정은은 목덜미를 타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온통 회색 넝쿨과 검게 말라죽은 고목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숲.
이 숲 안에 뭔가가 있다.
이윽고.
스스스스스-
김정은은 목덜미에 닿는 무언가를 느꼈다.
“…응?”
김정은은 목을 한번 손으로 만져보았다.
아까부터 자꾸 넝쿨이 닿는다 싶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넝쿨이 아니었다.
“…올가미?”
마치 목줄처럼 생긴 철사 같은 것이 어느새 슬쩍 김정은의 목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이내.
콰악!
철사줄이 강렬하게 위로 올라간다.
“커흑!?”
김정은은 손 한번 써 보지 못한 채 철사에 목이 휘감겨 위로 끌려갔다.
심지어 철사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무수히 돋아 있었기에 목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진다.
워낙 단단히 감겨 있었기에 손으로 푸는 것도 불가능했다.
뚜욱-
결국 속도와 무게를 이기지 못한 김정은의 목뼈가 부러졌다.
방철우, 방철해의 굵은 목뼈도 버티지 못한 것을 그녀가 버틸 리 만무한 것이다.
결국 김정은 역시 방철우, 방철해의 옆에 목매단 시체가 되어 주렁주렁 매달렸다.
조디악은 순식간에 사라진 세 명의 동료를 올려다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츠츠츠츠츠…
위를 보며 멍하니 서 있는 조디악의 목에도 철조망 올가미가 감겨 들어온다.
“어엇!? 미친!”
조디악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조여든 올가미가 허공에서 탁 하고 하나의 점처럼 변해 뒤로 탁 채듯 사라진다.
“큭큭큭큭.”
이내, 넝쿨숲의 어둠 너머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냐?”
조디악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둠이 걷히며 시커먼 몸을 가진 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커먼 근육이 꿈틀거리는 몸, 붉게 빛나는 눈과 이빨.
100%의 순수한 악의를 뿜어내는 습격자가 조디악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내 이름은 Rotten water이다. 항상 두려워하십시오. and I also P.K.조.아.”
썩은물. 아니, 이제는 적폐망령.
나의 세 번째 변신 모드이다.
나는 말라죽은 고목 위에 거꾸로 붙어 있었다.
조디악의 PTSD를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칼침의 탑 공략 당시의 적폐망령과 같은 복장으로.
한편 조디악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뭐야? 그때 그 망령? 찐이냐, 짭이냐? 아니, 애초에 찐이 짭이지 참.”
도플갱어?
혹은 정신 나간 플레이어?
어느 쪽이든 간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는 말라죽은 나뭇가지를 박차고 펄쩍 뛰어 조디악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망령 모드일 때는 마동왕이나 고인물의 기술들을 모두 범용 가능하다.
심지어 망령 모드에서만 쓸 수 있는 ‘킬 체인’ 특성까지 쓸 수 있는 탓에 사실상 내 세 가지 모드 중 가장 제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메타가 바로 이 망령 메타이다.
물론 오추멜로프의 무한코스튬 반지 덕분에 정체를 들킬 일도 없다.
(애초에 몬스터인지 플레이어인지도 정체가 애매하니까)
한 마디로 나는 지금 100%의 힘과 100%의 인성을 모두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근력이면 근력, 속도면 속도, 외모면 외모, 인성이면 인성.
뭐 하나 무시무시하지 않은 것이 없는, 바로 이게 나의 진짜 모습이다.
심지어.
-<이어진>
LV: 91
호칭: 바실리스크 사냥꾼(특전: 맹독) / 샌드웜 땅꾼(특전: 가뭄) / 씨어데블 격침자(특전: 심해) / 대망자 묘지기(특전: 언데드) / 지옥바퀴 대왕게 잡이(특전: 백전노장) / 아귀메기 태공(특전: 잠복) / 크라켄 킬러(특전: 고생물) / 와두두 여왕 쥬딜로페의 펫(특전: 갹출) / 여덟 다리 대왕 참수자(특전: 불완전변태) / 리자드맨 학살자(특전: 징수) / 식인황제 시해자(특전: 1차 대격변) / 뒤틀린 황천의 생존자(특전: 절약) / 불사(不死)의 좌군단장(특전: 여벌의 심장) / 불사(不死)의 우군단장(특전: 선택) / 검은 용군주 오즈의 위상(특전: 혈족전생) / 탐욕의 악마성좌 마몬의 위상(특전: 수전노) / 발록의 뿔을 꺾은 자(특전: 야수) / 그 무서운 데모고르곤(특전: 싸움광)
HP: 910/910
나는 발록과 데모고르곤을 꺾은 뒤 레벨업했다. 막타를 빼앗겼긴 했지만 막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 극악한 높이의 경험치 천장을 뚫고 레벨이 1 올랐다.
새로운 호칭 특전은 ‘야수’와 ‘싸움광’
흥분할 시 몸에 야수의 힘과 활력이 깃들게 되며 이는 곧 싸움광 특성과도 연관이 있다.
심장 박동 수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감지되면 자동으로 몸이 야수화되며 이에 따라 싸움광 특성으로 인한 근력 스탯 증가 보너스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강제 로그아웃 한계선도 크게 상승한다)
콰쾅!
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했다.
정면의 적을 향해 가감 없이 드러나는 발록의 야수성!
그리고 데모고르곤의 호전성!
마동왕의 힘과 고인물의 속도가 합쳐지자 조디악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헉!? 뭐, 뭐야 이 속도!”
조디악은 잽싸게 뒤로 내뺐지만 내 속도를 이길 수는 없다.
나는 조디악을 향해 양손을 휘둘렀다.
한쪽 손에는 깎단이 손톱처럼 숨겨져 있고 다른 한쪽 손은 마몬의 대지진 건틀릿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실려 있다.
어느 쪽이든 스치면 사망이다.
“히익!?”
조디악은 재빨리 위로 점프하려 했지만 놈의 발목을 휘감은 킬 체인 탓에 도망은 불가능했다.
츠츠츠츠츠…
나는 심지어 조디악의 몸에 닿아있는 킬 체인을 통해 ‘근묵자흑’ 특성과 ‘부관참시’ 특성까지 덤으로 걸어 버렸다.
이윽고, 나는 손을 뻗어 놈의 뒷목을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갓챠.”
나는 조디악을 향해 만면의 웃음을 지었다.
망령 특유의 무너져 가는 몸에 문드러진 얼굴, 아마 내 모습은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크리쳐로 보이지 않을까?
그러나 조디악은 이 극한의 궁지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했다.
…파앗!
놈은 손의 마도서를 치켜든 채 무덤사역 특성을 발동시켰다.
‘뭐야? 되살릴 시체가 없을 텐데?’
의문도 곧 잠시, 내 뒤로 세 번의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쿵- 쿵- 쿵-
바닥에 떨어진 세 구의 시체.
방철우, 방철해, 김정은이 좀비가 된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료의 시체조차 거침없이 화살받이로 사용하는 조디악.
하긴, 동료의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료조차도 거리낌 없이 고기방패로 쓸 놈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쿵! 퍼퍽!
나는 앞을 막아서는 방철우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후려쳐 날려버렸고 뒤에서 부딪쳐오는 방철해의 몸에 반사 데미지를 쏴 배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주었다.
그러나.
[나의 불길이 너의 몸을 태우리라.]
좀비 마법사 김정은의 언령마법만은 예상치 못한 걸림돌이었다.
언령의 힘이 실린 화염 마법이 뿌려져 나의 몸을 뒤덮었다.
‘…젠장!’
끄지 않으면 계속해서 몸을 태우는 불길이다.
나는 손바닥을 휘둘러 강한 풍압을 만들어 내 불길을 털어냈고 그 길로 바로 김정은의 머리통마저 날려버렸다.
하지만, 내가 세 구의 좀비를 쳐 죽이는 시간이 조디악에게는 충분한 여유가 되었다.
놈은 시야를 가리는 넝쿨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넝쿨숲 외곽 방향으로 향했고 이내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푸스스스스…… 다음번엔 네놈도 사냥해 주마.”
뒤가 찜찜한 말을 남긴 채로.
나는 놈을 뒤쫓으려 했지만 넝쿨숲 자체가 사람의 방향감각을 어지럽히는 지형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시야에서 놓친 이상 따라잡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그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이나 숲을 돌아다니며 조디악의 흔적을 추격했지만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조디악을 놓친 것도 모자라 심지어 발록과 데모고르곤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마저 도둑맞았다.
나름 철저하게 준비한 것인데도 이 지경이라니, 과연 회귀 전 세상을 통째로 뒤흔들었던 빌런다운 행보.
‘……발암도 또 이런 발암이 없네.’
고구마를 한 트럭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복받친다.
바로 그때.
깜빡- 깜빡-
게임 창 한구석에 최소화시켜둔 메일함이 빛을 뿜는다.
긴급 메일을 알리는 표시.
뭔가 싶어 켜 보니 마동왕의 메일주소에 새로운 메일 한 통이 와 있었다.
<마왕님! 제가 뭘 잡았는지 아세요?>
제목부터가 밝은 어조.
유다희가 보낸 메일이었다.
* * *
몇 시간 전.
구불넝쿨 숲을 빠져나온 조디악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레이 시티에 있는 ‘살인자들의 탑’, 조디악이 아지트로 삼고 있는 던전을 향해서.
“푸스스스… 얻을 건 다 얻었네.”
조디악은 품속에 있는 아이템 두 개를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지옥불 코어.
이것을 얻기 위해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까지 습격해야 했다.
도저히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 발록과 데모고르곤을 대신 잡아 줄 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뭐, 겸사겸사 클로즈 베타 테스터도 찾아볼 겸 해서도.
“처리반이 아니라 마동왕, 그놈이 해결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그 자식…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어. 그런데 클베 출신이 아니라고? 말이 되나.”
조디악은 남쪽을 향해 걸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욱신-
그는 한쪽 발목이 묘하게 저릿한 것을 느꼈다.
통증은 없지만 분명 발에 문제가 생겼다.
발목을 내려다본 조디악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이건?”
발목이 시커멓게 물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수포가 끓고 악취가 올라오는 것이 상처가 썩어버린 것 같았다.
아까 망령의 철조망에 휘감겼을 때부터 이렇게 검게 물들어 가는 것이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특성이지? 부패 데미지를 준다고?”
조디악은 인상을 찌푸렸다.
‘근묵자흑’과 ‘부관참시’ 특성에 대해 모르니 더욱 불안한 일이었다.
“푸스스스… 에라 모르겠다. 신전에 가서 치료받으면 낫겠지. 그래도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이구만.”
원하는 아이템은 다 얻었고 강적으로부터 목숨도 건졌다.
비록 동료를 모두 잃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은 알 바 아니다.
좀 멀기는 하지만 그레이 시티에 가면 카르마 유저도 치료받을 수 있는 사이비 신관들이 넘쳐나기에 회복도 걱정 없었다.
이제 허리춤의 포션만 꾸준히 먹어 가면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모든 게 해피엔딩.
하지만.
…퍽!
그의 등팍에 와 박히는 것이 있었다.
“……어?”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리의 포션 병이 죄다 깨지며 안에 든 포션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그리고 허리부터 등까지 긴 자국을 내 놓은 것은 바로 커다란 도끼 한 자루였다.
털썩-
조디악은 황당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포션이 끊기자 썩어 버린 발목에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고개를 들자 석양을 등지고 우뚝 서 있는 플레이어 하나가 보인다.
“이게 누구야? 반가워.”
유다희.
그녀가 그레이 시티에서 올라오는 길 방향에 서서 조디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유다희의 뒤로 붉은 옷을 입은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마동왕사랑교.
일명 마교의 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