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78화 (478/1,000)
  • 479화 깽판 (3)

    협곡의 끝.

    나는 최후의 길목에 우뚝 선 채 발록과 데모고르곤을 맞이했다.

    ‘……남세나의 문자 덕분에 살았네.’

    머릿속에 경기 시작 직전에 봤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 문자 지금 봄ㅡㅡ>

    기묘한 채팅체로 시작하던 문자 메시지는 아주 중요한 정보들을 전하고 있었다.

    <1. 조디악이 노리는 것은 그레이 시티의 히든 퀘스트 중 ‘살인자의 부탁’이라는 특수 퀘스트로 ‘살인자들의 탑’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

    <2. 조디악의 최근 행보는 ‘만마전 외성’ 진입 후 레이드 실패 및 도주, 아마도 의도적인 패배로 여겨짐.>

    <3. 조디악이 근래에 습득한 히든 피스는 ‘결정권자의 소환장’, 아이템 성능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번 아챔에서 하려는 짓은 아마 다수의 보스 몬스터를 소환한 테러로 보임. 경기가 끝나갈 무렵이나 끝난 직후를 주의할 것. ※개인적인 사정 상 처리반의 개입은 기대하지 말 것.>

    <4. 정보료는 후불로 청구할 것임! ※개비쌈>

    조디악이 ‘결정권자의 소환장’이라는 아이템을 손에 넣었고 최근 만마성 외성에 갔었다는 정보를 듣는 즉시 나는 놈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내가 남기고 간 발록과 데모고르곤을 주워먹을 생각이었군.’

    나는 고정 S+등급 몬스터인 마몬을 잡으러 갈 당시 발록과 데모고르곤이라는 두 걸출한 중간보스를 스킵하고 넘어간 적이 있었다.

    조디악은 이 두 초고위악마를 하멜른의 피리로 홀려 꾀어낸 뒤 결정권자의 소환장에 등록시켜뒀던 것이다.

    ‘자기가 직접 메인 보스를 잡지 않아도 되는 거였나? 하여간 세상 참 편리하게 사는 놈일세.’

    어찌 보면 내가 처리하지 않고 남기고 간 찌꺼기 몬스터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이 사태는 내가 마무리하는 것이 맞다.

    나는 시선을 흘끗 뒤로 돌렸다.

    대회에서 죽이지 않고 살려 뒀던 일본 팀 선수들이 슬며시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뒤에 서 있는 일본, 중국 랭커들에게 말했다.

    “A+급 몬스터들을 막아. S급 두 마리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보지.”

    그러자 내 말을 들은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한, 중, 일의 모든 프로게이머, 랭커, 일반인들이 죄다 달려들었는데도 안 되던 것을 혼자서 어찌할 생각이냐는 눈초리.

    …하지만 그들의 양해를 구할 시간도, 생각도 없다.

    팟!

    나는 바로 앞장서 뛰어나갔다.

    [오-오오오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발록이었다.

    놈은 몸을 흔들어 전신의 불덩이를 털어냈다.

    쿠르르르륵!

    순식간에 불바다가 된 협곡, 발록은 그 뜨거운 기운을 받아 더욱 더 흉폭하게 날뛴다.

    그것을 본 중국, 일본 대표팀 전원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마, 마동왕 씨! 피하세요!”

    아키사다 아야카가 외쳤다.

    그녀가 보기에 눈앞의 저 발록이라는 몬스터는 도저히 사냥할 엄두가 나지 않는 괴물이다.

    지금껏 괴롭힘당해 왔던 기억과 당장 눈앞에서 폭발하고 있는 저 박력을 보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

    [그-오오오오오오!]

    하지만 발록은 눈앞의 그 어떤 적도 도망가게 두지 않겠다는 듯, 불타는 날개를 쭉 뻗어 엄청난 속도로 저공비행해 쇄도해 왔다.

    나는 눈앞으로 돌진해 오는 발록의 두 눈알을 똑바로 마주했다.

    ‘가이악사라……. 벨럿이 저 모습을 보면 슬퍼하겠군.’

    발록의 이름은 가이악사, 한때 옥토와 곡식을 관장하는 고위 정령이었던 몸.

    무저갱에 못 박혀 소멸한 줄 알았던 그는 결국 마몬에게 굴복해 사악한 악마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주인도 못 알아보고 덤비는구나.”

    나는 마몬을 쓰러트리고 빼앗은 망치 건틀릿을 피뢰침처럼 높이 치켜들었다.

    후우우우욱!

    전신이 거대한 불덩어리가 된 발록이 나를 향해 쏘아져 온다.

    “안 돼! 피해요-오!”

    아키사다 아야카가 부르짖는 소리.

    동시에, 나와 발록이 한 지점에서 세차게 맞붙었다.

    콰-쾅!

    결과는 깔끔했다.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 내 주먹은 발록의 얼굴 한쪽 면을 왕창 뭉개 놓았고 이빨을 모조리 부러뜨려 버렸다.

    …우지지지지직!

    발록은 나에게 날아들던 자세 그대로 목이 꺾여 바닥에 처박혔다.

    땅이 아래위로 한번 사납게 요동쳤고 이내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

    순간, 협곡 전체가 기이한 침묵에 휩싸였다.

    경악 그 자체. 너무 놀라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들.

    모두가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나와 내 앞에 혀를 빼물고 뻗어 버린 발록을 바라보고 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아키사다 아야카가 더듬더듬 한 마디 중얼거린다.

    “……이, 일격?”

    단매에 쳐 죽인다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는 장면이었다.

    […그륵! …그르륵!]

    그러나 발록은 아직 죽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두 팔로 몸을 지탱해 일어나려 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투지는 인정하지만, 하수인 특성이 있는 한 거기까지야.”

    발록과 데모고르곤은 본디 마몬 휘하의 몬스터이다.

    따라서 ‘탐욕의 악마성좌 마몬의 위상’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는 내 앞에서는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

    …아마 전투력이 50% 이하로 감소하겠지.

    더군다나 마몬을 죽이고 얻은 ‘대지진 건틀릿’은 놈들에게 두 배의 추가 데미지를 준다.

    방어력을 50% 깎는데다가 두 배의 데미지까지 주니 총 4배의 데미지를 가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발록의 뒤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데모고르곤 역시 마찬가지였다.

    쿠르르르르륵!

    나는 데스웜의 힘이 담긴 왼손으로 데모고르곤을 끌어당긴 뒤 마몬의 힘이 실린 오른 주먹으로 데모고르곤마저 격퇴해 버렸다.

    [크아아아악!?]

    데모고르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뒤에서 윤솔이 신성불가침 특성으로 건 디버프에 걸려 속절없이 무릎 꿇는다.

    애초에 놈들은 불타는 땅이 아닌 곳에서 마법방어력이 격감되기도 하니 윤솔의 디버프 역시도 더욱더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상성이 좋다.

    …우지직! …빠각!

    나는 마몬의 힘을 끄집어내 두 초고위악마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고 그 즉시 상황은 종료되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두 마리의 S급 몬스터가 정리되자 나머지 A+등급 몬스터들은 일사천리였다.

    “가자! 마동왕 씨가 S급 몬스터들을 다 정리해 주셨다!”

    “이제 무서울 게 없어! 돌격!”

    “몬스터 잔당들을 해치워라!”

    그제야 다른 이들이 용기백배하여 전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열 마리 남짓 남아 있던 A+급 몬스터들이 그제야 주춤주춤 물러난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포격들이 전장으로 쏟아 부어지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정리되어 가는 전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록과 데모고르곤의 출현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거기에 다른 플레이어들의 집중포격으로 인한 서포트 덕도 꽤 쏠쏠히 봤다)

    아무리 나라도 두 마리나 되는 S급 몬스터가 갑자기 나타나 공격해 온다면 크게 당황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쉬이이익…

    내 오른 주먹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뜨거운 김을 뿜어낸다.

    마치 한계까지 달린 폭주기관차의 엔진을 보는 듯한 모습.

    “아무리 S+급 아이템이라도 S급 몬스터를 연달아 잡는 것은 조금 심했지?”

    제아무리 하수인 특성 탓에 상성 상 압도적으로 우위였다고 해도 내구도 소모가 막심할 것이다.

    발록과 데모고르곤이 아닌 다른 S급 몬스터였다면 당연히 이런 식으로 사냥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막 자리를 뜨려 할 때.

    “……잠깐.”

    나를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중국 대표팀 제왕세기와 일본 대표팀 쥬신구라 멤버들이 보였다.

    그들은 쭈뼛거리는 태도로 나의 시선을 피한다.

    “……?”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들 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장마오 쉰이 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저…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목만…… 정말 면목 없군요.”

    아, 협곡 길목에서의 일을 말하는 건가?

    내가 마노타우로스와 요툰을 한꺼번에 상대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산사태가 일어나는 통에 잠깐 당황했었지.

    ‘……뭐, 특별히 상관없는데.’

    지금 상황에 굳이 그때의 일을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손사래 몇 번이면 사라질 정도의 경미한 피해였으니까.

    “됐어. 어차피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나는 그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대충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을 들은 중국 팀과 일본 팀 멤버들은 왠지 엄청나게 감동 받은 눈치였다.

    “그 실력과 이런 배포…… 우리가 졌습니다.”

    “역시 당신이 진정한 아시아 넘버원이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나는 난데없이 벌어지고 있는 이 낯 뜨거운 상황에 잠시 당황했다.

    …바로 그때!

    [고-오오오!]

    발록과 데모고르곤이 또다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머리 한구석이 부서져 깨졌는데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니 과연 그 투지가 무섭긴 무섭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놈들의 투지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푸스스스스! 드디어! 예상대로야!”

    조디악, 놈이 갑작스럽게 협곡의 길목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투명화 기능이 있는 망토 때문에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미처 돌아서기도 전, 조디악은 시커먼 불길을 칼날처럼 빚어냈고 그대로 발록과 데모고르곤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막타! 발록과 데모고르곤의 목을 자른 조디악은 이윽고 두 개의 아이템을 손에 넣었다.

    -<지옥불 코어 반쪽> / 재료 / S

    반으로 쪼개진 빨간 구슬 조각.

    너무나도 뜨거워 악마조차도 열상(熱傷)을 입고 만다는 지옥 동쪽의 불길이 담겨 있다.

    -<지옥불 코어 반쪽> / 재료 / S

    반으로 쪼개진 빨간 구슬 조각.

    너무나도 뜨거워 악마조차도 열상(熱傷)을 입고 만다는 지옥 동쪽의 불길이 담겨 있다.

    두 조각 나 있는 빨간 구슬.

    조디악은 반쪽짜리 구슬 조각 하나를 발록의 시체에서, 다른 반쪽을 데모고르곤의 시체에서 회수했다.

    사실 나는 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아이템이지만 조디악은 마치 천금을 얻은 듯 기뻐하고 있었다.

    “푸스스스스! 세상에! 처리반 놈들이 오기 전까지는 못 구할 줄 알았는데! 고맙다 마동왕! 다 네 덕이야!”

    조디악은 나를 향해 윙크를 날려 보이고는 잽싸게 뒤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잽싸게 놈을 뒤쫓으려 했지만… 예전과 똑같이 멈칫했다.

    아무래도 마동왕 모드는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가서 그런가 조디악의 날렵한 움직임을 뒤따라 갈수가 없다.

    “우, 우리가 쫓을게요!”

    아키사다 아야카를 비롯한 중국, 일본 팀의 랭커들이 재빨리 앞으로 나선다.

    몇몇은 이미 독자적으로 조디악을 추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조디악의 기동력이 저들을 훨씬 더 앞서고 있음을.

    놈은 아시아 챔피언스 대회를 망쳐 놓음과 동시에 발록과 데모고르곤을 대신 잡아 줄 화력을 필요로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놈은 ‘지옥불 코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채 도주하고 있다.

    놈을 따라가 죽여 놓지 않는다면 정말로 꿈자리가 뒤숭숭해질 것이다.

    …착!

    나는 몸을 날려 조디악을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경은 오히려 뒤나 옆에 따라붙고 있는 다른 선수들을 의식하고 있는 채였다.

    ‘……조디악을 쫓아가려면 고인물 모드로 변신해야 하나?’

    순간, 내 머릿속에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고인물보다도 더욱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데다가 남 눈치까지 보지 않아도 되는 모드가 내게는 하나 더 있지 아니한가.

    썩은물.

    간만에 망나니 한번 되어 볼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