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화 한국vs일본 (5)
“아직 모르죠.”
아키사다 아야카.
그녀는 필드로 나오며 전에 마동왕에게 보냈던 메시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동왕 님. 별 일 없으신가요? (◞‿◟;;)>
<안녕하세요 마동왕 님. 별 일 없으신가요? (◞‿◟;;)>
<안녕하세요 마동왕 님. 별 일 없으신가요? (◞‿◟;;)>
<죄송합니다. 문자 보내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ㅠㅅㅠ)...>
<어제부터 일본 협회 관계자들이 묘하게 기뻐하는 눈치인 것이 신경 쓰여서 여쭤보았습니다. 같은 나라 동료들이기는 하지만 별로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라서...(•̀ ω •́)>
<혹시 한국 팀에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해서요. 만약 대회 일정을 연기하고 싶으시다면 연락 주셔요. (˙ ω ˙)>
그리고 마지막에 쓰려고 했다가 결국 못 쓰고 지웠던 메시지.
<최고의 컨디션에서 싸워 보고 싶습니다 (๑•̀ω•́)و✧>
하지만 지금 아키사다 아야카는 그때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상대방 하나에게 일본 팀 전체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압박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죽지 않은 채 목숨을 동정 받아 살아 돌아왔다는 수치감.
‘……바보같이, 누가 누구를 배려해 주려고 했던 거야!’
아키사다 아야카는 자기가 분수도 모르고 주제넘은 짓을 했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동시에 마동왕을 원망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래도 꼭 이렇게까지 잔인해야 해?’
그냥 때려 부수기만 하면 인정할 수 있다.
강자가 약자를 이기는 것은 프로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나 자기를 제외한 다른 팀 전원을 수면 모드로 출전시킨 것, 그리고 상대방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농락하고는 결국 살려서 돌려보내는 것은 너무하다.
어차피 체력이나 마나가 바닥을 치고 있는 동료들은 선수교체가 의미가 없다.
그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대회가 완전히 끝난 뒤 포션을 홀짝이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
몇 시간에서 최대 며칠까지 접속불가 판정을 받는 사망 패널티를 입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들 중 지금 그것에 안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기면 그냥 이기면 되지 이렇게 굴욕감을 줄 필요까지는 없잖아!’
아키사다 아야카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비록 말도 많고 탈도 많기는 하지만 뒤에 있는 네 명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중한 팀 동료들이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워낙 크고 동그란 눈이라서 그리 무서워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이것이 그녀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위협적인 표정이다.
“……왜 우리를 죽이지 않죠?”
그리고 물었다.
전방에 있는 거대한 상대를 향해서. 용기 있게.
하지만.
으쓱-
어깻짓과 함께 돌아온 대답은 애써 낸 용기가 맥 빠질 정도로 간단한 것이었다.
“…곧 알게 될 거야.”
* * *
나는 아키사다 아야카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저 곧 알게 될 것이라는 말 외에는 말이다.
‘정말로 곧이지.’
대회가 끝나는 즉시, 아니 어쩌면 대회가 끝나기 전에 알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최대한 빨리 대회를 끝낼 요량이었다.
“…….”
주위를 둘러보자 저 협곡 위에 수많은 인파들이 보인다.
오늘 열리는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를 응원하기 위해 먼 거리에서 달려온 팬들.
그들은 경기의 여파가 미치지 않을 안전거리 안에서 GM들의 통제에 따라 시합을 ‘직관’ 중이다.
게임 안에서 경기를 구경하는 인원들이 현실에서 경기를 구경하는 인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은 당연한 사실.
그리고 대망의 아시아 챔피언스 리틀리그의 결승전이니만큼 그 규모는 역대급이었다.
“…….”
나는 다시 눈앞에 있는 마지막 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키사다 아야카.
현재 전 일본 랭킹 1위.
내가 알기로 그녀는 패도적인 스타일의 근접 딜러 랭커를 좋아한다.
실제로 회귀하기 전 세상에서 그녀는 한국의 랭커였던 마동왕(현 마동섭)을 남몰래 짝사랑했던 바 있었다.
마동섭이 승부조작 추문에 휘말렸을 때도 그를 위해 열심히 변호했고 그럴 리가 없다며 그를 꿋꿋하게 믿었다.
결국 마동섭의 모든 비리가 사실이었다는 것이 판명 난 이후에는 그를 변호하고 옹호했던 책임을 지겠다며 깔끔하게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게임도 접어 버리기까지 했었던 여자.
‘부디 이번 운명에서는 그럴 일 없기를 빌어.’
나는 그저 아키사다 아야카가 이번 생에는 더욱 좋은 플레이를 많이 보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한때 내가 존경했던 탑 티어 급 플레이어로서.
한편.
아키사다 아야카는 나를 향해 재차 물어오고 있었다.
“저는 당신의 강함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
“그리고 그 강함의 밑바탕이 되고 있을 당신의 올바른 성정도 믿었죠. 아니 믿었었어요.”
“…….”
“그러나 지금 제가 느끼는 배신감은 말로 형언키가 어려울 정도네요.”
아키사다 아야카는 나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남의 굴욕을 자신의 명예로 삼는 이들은 높이 올라갈 자격이 없어요. 최선을 다하는 것은 프로의 본분, 일본 팀의 선수들은 그깟 사망 패널티를 피하자고 당신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이런 말에는 나도 원론적인 대답밖에는 해 줄 수밖에 없다.
“동의해. 하지만 나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이유요? 무슨?”
“곧 알게 될 거라고 했잖아.”
시간이 없다.
나는 경기를 빨리 마무리 짓고자 움직였다.
그러자 아키사다 아야카의 눈매가 싸늘하게 변했다.
“……결국 이번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동시에, 그녀는 손을 움직여 허공에 여덟 개의 궤적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드리지요.”
아키사다 아야카는 초반부터 전력을 다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차피 앞서 네 동료가 차례로 연파되는 것을 본 이상 전략이고 뭐고 있을 턱이 없다.
그저 온 힘을 불사르는 수밖에는.
키이이잉-!
이윽고 여덟 개나 되는 원소마법이 동시에 구현되기 시작했다.
불, 바람, 얼음, 풀, 암석, 전기, 어둠, 빛의 옥타 캐스팅(Octa casting)!
여덟 개나 되는 마법 줄기가 나를 향해 동시에 떨어져 내린다.
‘흐음. 이거 실제로 보니 꽤나 무서운데.’
나는 처음으로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아키사다는 확실히 인구 1억 5천 일본인 중 정점에 위치할 만한 실력자다.
‘하지만… 고작 5클래스의 마법으로는 안 되지.’
만약 6클래스였다면 나도 힘을 숨긴 채 상대하기 버거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키사다 아야카가 6클래스 옥타 캐스팅이 가능하게 되는 시점은 아직 멀었다.
지금은 그저 잠재력만 가지고 있을 뿐인 애송이에 불과하지.
콰콰콰콰쾅!
아키사다의 마법이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자욱하게 치솟는 포연.
아키사다 아야카는 숨을 몰아쉬며 이쪽을 바라본다.
“…해치웠나?”
거의 부활의 주문이나 다름없는 대사.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포연을 걷으며 걸어 나갔다.
상처 하나 나지 않은 모양새로.
“……!?”
아키사다 아야카는 나를 향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어떻게 아무런 데미지도? 대체 어떤 방어를 한 건가요?”
그녀는 경악한 채 내게 물었다.
나는 그저 피식 웃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정말이다.
나는 아키사다 아야카의 마법을 막기 위해 그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의 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이유를 말하자면 오늘 경기가 열린 맵의 특성을 먼저 설명해야 한다.
죽음부름 전장.
이곳의 토질은 상당히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일명 ‘레고토’라고 불리는 흙으로 진흙 함유량이 12.5% 이하여서 일반적인 모래흙의 성질을 지니며 흙 알갱이가 하나씩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금씩 결합되어 공기나 수분의 유통이 원활한 떼알 구조를 이룬다.
쉽게 말하자면 건조할 때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단단하게 굳으며 습할 때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무르게 변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아까 아키사다 아야카가 쏘아 보낸 8개의 마법 중에는 불, 얼음, 암석 속성의 마법들이 있었다.
Q. 이 세 종류의 마법들이 따로따로 시전 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시전 된다고 했을 때 토양에 미치는 영향을 구하시오. [4점]
답은 쉽다.
‘얼음 마법이 땅을 얼리고 불 마법이 땅을 녹이는 것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땅이 물러졌고 암석 마법에 의해 지력이 올라가 다시 단단해졌다.
거기에 얼마 전 스즈키 히카리의 멜트아웃 마법 때문에 지면에 부담이 가 있는 상태인지라 그 변화폭은 한층 더 다양해진다.’
고로.
나는 아키사다 아야카가 쏘아 보낸 마법 폭풍의 한가운데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다만 물러서 저절로 꺼지는 지면 위에서 발을 살짝 굴러 나를 감싸는 진흙의 벽을 높이 세웠을 뿐.
그리고 아키사다 아야카의 마법은 어찌 보면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없는 토사의 벽에 상쇄되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참호처럼 가라앉은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겁게 넘실거리는 진흙 안개를 뚫고 아키사다 아야카에게 다가갔다.
“옥타 캐스팅, 다수의 몬스터들을 상대로 할 때에는 유용하겠지. 하지만 나를 상대로는 힘들 거야.”
내 말에 아키사다 아야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몸속의 모든 마력이 텅 빌 정도로 포격을 했는데 단 1의 데미지도 주지 못했으니 허탈할 수밖에.
털썩-
아키사다 아야카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자폭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서 잠깐 긴장했지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죽이세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포연이 걷히지 않아 우리의 모습은 카메라와 대중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팬들에게 참혹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하는 듯한 모양새.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살생을 할 생각이 없다.
“돌아가서 회복이나 해라.”
“…….”
“아, 그 전에 기권 선언부터 하고.”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깔끔하게 돌아섰다.
그러자.
아키사다 아야카가 나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나는! 당신의 플레이를 보고 감동받아서 프로가 됐어요!”
으음. 아무래도 내가 마동섭을 제거하고 그의 위상을 흡수했기 때문에 사건의 흐름이 조금 변한 모양이다.
그녀는 쏟아내는 듯한 어조로 계속해서 외쳤다.
“당신의 힘, 당신의 플레이에 매료되었고 위로받았어요! 상대방을 가차 없이 부수는 그 모습에 쉴 새 없이 전율했고!”
“…….”
“당신처럼 되고 싶었어!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 그런데…….”
아키사다 아야카는 급기야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 큰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신에게라면 맞아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쁜 사람!”
뭔가 좀 막장 불륜 드라마의 한 장면 같지만… 그녀가 말하니 멜로영화의 대사처럼 들린다.
이윽고, 그녀는 나를 향해 히끅거리며 말했다.
“일본의 최종병기인 나에게까지 굴욕을 주니 이제 속이 시원한가요?”
“…….”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인성이 나쁘면 멋있지 않아요. 당신은 최악이야.”
이건 회귀하기 전 세상에서 아키사다 아야카가 마동섭에게 했던 말이다.
그 대사를 지금 내가 듣고 있자니 확실히 기분이 묘했다.
내가 돌아서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할 때.
휘이잉-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걷어 버렸다.
우뚝 서 있는 나, 무릎 꿇은 아키사다 아야카의 모습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와-아아아아아!
게임 속에서도 현실 세계에서도 모두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승자가 명백하게 가려지는 순간이다.
“와 대박! 마동왕 혼자 나가서 올킬 한 거야?”
[한국이 이겼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미쳤닼ㅋㅋ심지어 다른 선수 네 명은 뒤에서 자고 있네ㅋㅋㅋㅋ잠만자도 랭커인 것~
“이제 빅리그에 가는 건 누구지!? 어!? 외쳐! 한국!”
[최고다! 닳고 닳은 뉴비쨩!]
-;;;보고도 못 믿겠네ㄷㄷㄷ실화냐 이거???
“마동왕과 같은 시대에 게임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역시 캡틴 코리아……갓동왕.]
-침대 플레이가 멋져 보이긴 나 또 처음이네ㅋㅋㅋ
현실에서 들려오는 환호성, 게임 속에서 느껴지는 전율, 심지어 온갖 커뮤니티에 미친 듯이 도배되는 댓글들까지.
누가 봐도 이번 경기의 승자는 나였고 그것이 곧 한국이었다.
빅리그로 올라갈 수 있는 티켓을 손에 거머쥐게 된 것이다.
오로지 나 혼자의 힘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못 하지.”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내 혼잣말을 들은 아키사다 아야카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순간.
아키사다 아야카의 힘 빠진 듯한 눈빛이 갑자기 확 변했다.
그것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저벅-
저 멀리 몰려 있는 관중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어? 저기요, 이 필드로는 나가면 안 돼요.]
[아직 대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수 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미니맵의 가이드라인 밖으로 물러나주세요.]
GM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이 그를 막아섰지만.
쿠르륵!
이내 검은 불길에 휩싸여 한 줌 잿가루로 변해 버렸다.
……!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GM을 죽일 정도로 정신 나간 카르마 유저에게 쏠린다.
나 역시도 놈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놈이 검은 후드를 벗고 맨얼굴을 드러냈다.
“푸스스스스. 시상식이면 몰라도 대회 중간에 난입하는 것은 또 처음인데.”
조디악.
놈이 드디어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