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63화 (463/1,000)
  • 464화 휴식 (3)

    ‘제왕세기가 더 잘한다! 중국 최고!’

    ‘아니다 쥬신구라가 더 잘한다! 일본 만세!’

    .

    .

    천막 밖에서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는 중국어와 일본어.

    아무래도 훌리건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 듯했다.

    …하지만 시장의 소란스러움은 내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

    나는 지금 천막 안의 상황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손을 잡자고?”

    내 반문을 들은 조디악은 칼자국 난 입가를 비죽 말아 올렸다.

    “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무적이지. 그 누구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게 될 거야.”

    나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표정을 읽힐 일이 없으니까.

    ‘보자, 조디악이 내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나는 현 시점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소유한 근접 딜러.

    조디악이 만약 모종의 이유가 있어서 파티원을 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고정 S+등급 몬스터를 노리고 있는 것, 아니면 GM과의 전쟁을 준비 중인 것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미친 짓이다.

    제정신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프로젝트, 하지만 조디악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 놈은 몇 년 안에 이 두 가지를 모두 실행에 옮기게 되니까.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대로라면 조디악이 게임 안에서 큰 사고를 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하지만 내 행동으로 인해 시간 축이 조금 앞당겨졌다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미리 계획에 착수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나는 얼마 전에 만났던 여자 하나를 떠올렸다.

    GM 처리 2반의 반장 남세나.

    그녀는 닳고닳은 뉴비 팀이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정해진 것을 기념하는 파티에 참석해 굳이 나에게 얼굴도장을 찍어 놨었다.

    ‘…조디악. 우리도 그를 주의 깊게 보고 있거든요. 적의 적은 친구라잖아요?’

    당시 남세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디악 번디베일을 특히 주목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의 아지트의 위치를 말해준 것도 그녀였다.

    뭐, 물론 무분별한 PK를 일삼는 조디악은 처리반의 요주의 인물이긴 하다.

    놈은 심지어 프로리그에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 전력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당시 나를 찾아온 남세나의 눈빛은 실로 예사롭지 않았다.

    일반적인 카르마 유저를 경계하는 것을 넘어선 수준의 적개심.

    또한 조디악이 비록 게임 세계 안에서 악명 높은 빌런이라고 해도 그것은 아시아나 북미권에서만 통하는 수준, 그보다 더욱 더 독보적인 수준의 카르마 유저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니 처리반에서 조디악만 특별관리 취급하는 것은 뭔가 수상한 일이다.

    ‘뭔가, GM이랑 척을 진 건가?’

    아마도 조디악은 또다시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미래를 살아온 나조차도 알 수 없는.

    “…흐으음.”

    내가 팔짱을 낀 채 말이 없자 옆에 있던 김정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뭘 고민해? 이번 리그 우승시켜 준다잖아?”

    그녀는 내가 고민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때. 내 옆에 있던 윤솔이 차가운 목소리로 김정은의 말을 잘랐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승을 시켜 준다니. 그쪽이 뭐 대회 주최자라도 돼요?”

    윤솔의 말을 들은 김정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전에 죽음룡 오즈의 부관 ‘데스나이트 사자심왕’ 공략 당시, 중간 보스인 인간 지네를 잡는 과정에서 그 둘은 크게 다퉜던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조언을 들은 윤솔은 기지를 발휘하여 김정은의 음흉한 속셈을 부숴 버렸고 그 결과 조디악에게서 나를 구해 내는 것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나는 조디악을 죽이고 데스나이트 공략에 성공했으며 나아가 죽음룡 오즈를 거꾸러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때 인간 지네 레이드에서 김정은과 윤솔의 승패가 갈린 것이 지금의 조디악과 나의 승패를 갈라 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것 때문인지 김정은은 윤솔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윤솔 또한 보기보다 성격 있는 여자인지라 그런 김정은의 눈빛에 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틴다.

    “뭘 쳐다보세요. 못 물어볼 거 물어봤나?”

    “…….”

    결국 김정은은 짜증스럽다는 듯 윤솔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쳇. 야, 솔직히 너도 좀 골치 아프던 차였잖아. 우리가 도와주면 100% 쉽게 갈 수 있는 길인데 뭘 망설여.”

    “…뭐가 골치 아프다는 거야?”

    내가 진심으로 궁금한 마음을 담아 묻자 김정은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아, 일본이랑 중국! 아키사다 아야카랑 장마오 쉰 말야! 너한테도 충분히 골치 아플 만한 상대잖아!”

    아하, 뭔가 했더니 이 말이었나.

    김정은은 내가 중국과 일본 팀을 버거워하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하기야, 예전 오뚝이배에서도 김정은은 나에게 류요원의 자료를 팔아넘기려 했었지.

    프로게이머의 정보를 분석하고 그것에 가치를 매겨 팔아먹는 것에는 도가 튼 여자니까.

    거기에 일본 팀의 아키사다 아야카나 중국의 장마오 쉰은 충분히 아시아권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고수들이다.

    1차전에서 허무하게 탈락하기는 했지만 1:1, 풀 컨디션으로 맞붙을 경우에는 아무리 나라도 귀찮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골치 안 아픈데?”

    딱 거기까지다.

    암만 거슬려도 그저 귀찮은 수준에서 그칠 뿐, 현 프로리그에서 나를 위협할 만한 존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한편, 내 말을 들은 김정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조디악이 깔깔 웃는다.

    “푸스스스! 내 말이 맞지? 관심 없을 거라고 했잖아!”

    “아, 아니! 야! 진짜 관심 없어? 우리가 너네 우승시켜 준다고! 100% 확률로! 너도 게이머라면 1%의 확률도 방심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뒷말 나오지 않게 깔끔하게 암살해서 사망 패널티 몇 번 먹여 주면 끝나는 일인데…….”

    김정은은 황당한 마음에 열변을 토했지만 나는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프로 대 프로의 결전에 임하기도 싫다.

    뭐 아무튼.

    지금까지 내 앞으로 참을성 있게 내밀어져 있던 조디악의 손이 쓱 거둬졌다.

    “그래서. 나랑 친구 안 한다는 얘기지?”

    “응, 안 해.”

    “…비밀친구도?”

    “뭐든 안 해.”

    그러자 조디악의 분위기가 싹 변했다.

    놈은 창백한 얼굴을 앞으로 쓱 내밀어 내게 속삭이듯 으르렁거렸다.

    “같은 클로즈 베타 출신끼리 너무하잖아. 사이좋게 지내자구.”

    놈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등골에 소름이 오싹 돋는다.

    클로즈 베타(Closed Beta).

    게임 오픈 전 특정 인원만을 데리고 게임을 시운전해 보는 것을 뜻한다.

    참고로 갓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오픈 베타 때부터 알려졌으며 클로즈 베타가 돌아가던 시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아는 바가 없다.

    ‘…애초에 이 게임에 클로즈 베타가 있었던가?’

    이것 역시 미래를 살아온 나조차도 모르는 사실.

    하지만 아무래도 조디악은 정말로 클로즈 베타 출신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살던 미래에서 조디악이 세웠던 불가사의한 업적들도 얼추 이해는 된다.

    ‘그런데 왜 같은 클베 출신들을 찾아다니는 거지?’

    조디악은 예전 프로리그 습격 당시에도 클로즈 베타 출신을 찾는다며 광고를 했었다.

    온 전장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떠들어 대는데 모를 리가.

    아마 한국 랭커들을 그렇게 죽여 댔던 것도 클로즈 베타 유저들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나는 조디악에게 대답했다.

    “나는 클로즈 베타 출신 아닌데?”

    그러자 조디악이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헛소리야?”

    “말 그대로야. 나는 클베 안 했어.”

    내 말을 듣는 동안 조디악의 표정은 더욱 더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진다.

    “야 뭔……. 클베 출신이 아니면 천공섬은 어떻게 떨궜어? 마몬은 어떻게 잡았고?”

    일견 타당한 의문이다.

    옆에 있던 윤솔이나 드레이크도 이것만은 궁금한 모양인지 슬쩍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뭐, 딱히 댈 변명거리가 있나?

    “3빨이지.”

    “……뭐?”

    “운빨, 템빨, 컨빨.”

    내 대답을 들은 모두의 표정이 멍하게 바뀐다.

    이윽고.

    “푸스스스스스!”

    조디악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재미있다는 듯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오케이. 알겠어. 네 말 뜻.”

    놈은 나에게 윙크를 한번 해 보인 뒤 몸을 돌렸다.

    “또 보자고.”

    그것이 조디악의 마지막 대사였다.

    놈들은 천막을 걷더니 나타났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홱 사라져 버렸다.

    “휴우…….”

    나는 긴장이 풀린 것을 느끼며 천막 밖으로 나왔다.

    드레이크와 윤솔, 유세희, 마태강 역시도 나를 따라 천막을 나섰다.

    조디악 일행은 벌써 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천막을 나가자마자 열심히 뛰어간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니까)

    “뭔가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구만.”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저기 있는 중국 경찰들 덕분에 딱히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방금은 충분히 무서웠다.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 한숨을 토해냈다.

    “우와, 실제로 보니 더 살벌한 사람이었네.”

    “으음. 사이코들 많이 봤지만 저렇게 찜찜한 놈은 처음이군. 뭐 무력으로 제압하려면 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경찰들 눈치도 있고.”

    그 와중에 드레이크는 조디악을 제압하려 했던 모양이다.

    나는 시선을 힐끔 돌려 드레이크의 몸을 살폈다.

    펑퍼짐한 후드티 밖으로도 느껴지는 근육들, 손등에 선명하게 양각된 저 핏줄들.

    드레이크는 극한의 재활치료 과정을 겪는 와중에 더욱 더 튼튼해졌다.

    달리는 속도를 잘 내지 못할 뿐이지 격투에는 지장이 없다나.

    ……오히려 경찰의 덕을 본 것은 조디악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나는 혀를 찼다. 별일 없기를 바라면 꼭 별일이 생긴다는 것을 모르진 않지만 말이다.

    그때.

    “제왕세기가 더 뛰어나다!”

    “쥬신구라를 얕보지 마!”

    시장 어귀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까부터 계속된 소란은 이내 일파만파 번지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관광 온 일본 여행객들과 중국 여행객들이 싸우는 듯했다.

    귀가 밝은 유세희가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 계속 천막 밖이 시끄럽긴 했어요.”

    조디악과의 대화에 집중하다보니 미처 듣지 못한 모양이다.

    보아하니 각국의 프로팀을 응원하는 열혈팬들 같은데……

    나는 순식간에 모여드는 인파에 당황했다.

    일본 팬들과 중국 팬들의 다툼이 심화되고 있었다.

    우르르르…

    인파들이 갑자기 확 움직인다.

    일본 관광객 다수와 중국 관광객 다수가 머리끄댕이를 잡을 기세로 사납게 설전을 벌였고 그 와중에 경찰들까지 개입하면서 시장은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뭐, 팬클럽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문제는 우리가 있던 천막이 그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어어어? 갑자기 이렇게 모여들면…….”

    우리는 갑자기 몰아치는 사람의 파도에 휩쓸려 버렸다.

    미처 일행을 재정비할 틈도 없었다.

    우리는 열성팬들의 파도에 휩쓸려 순식간에 밀려났고 우악스럽게 선을 긋고 사람들을 뒤로 밀어내는 경찰들에 의해 서로 뿔뿔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 역시 참으로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그리고 몇 분 뒤.

    나는 시장 귀퉁이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고개를 드니 저 멀리 내 소유의 호텔이 보인다.

    ……문제는 내가 지금 거기까지 갈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이다.

    “다 털렸네, 그냥.”

    인파에 뒤엉켜 정신없는 와중 선글라스도 마스크도 모두 벗겨져 버렸다.

    그 와중에 지갑과 핸드폰까지 털려서 완전 알거지 처지였다.

    재주 좋은 소매치기가 있었는지 넘어진 사이 양발의 신발까지 벗겨가 나는 정말로 무일푼 신세.

    있는 것이라고는 속옷과 바지, 후드티 한 벌뿐이다.

    “젠장, 조디악 놈 때문에 기분도 뒤숭숭한데 이런 꼴이라니.”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경찰에 도움을 청할까 했지만 괜히 시합 전에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맨얼굴까지 훤히 알려져 있는 마당에는 행동거지가 더욱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호텔까지 걸어가야 하나?”

    저 멀리 다리 너머로 아주 작게 보이는 호텔, 하지만 리무진으로도 수십 분이 넘게 걸리던 거리다.

    알거지에 맨발인 상태로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

    고개를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이미 같은 팀 멤버들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어휴, 시합 전에 야시장 한번 구경 나왔다가 이게 무슨 일이냐.’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때.

    “어? ……너!?”

    내 뒤에서 깜짝 놀란 듯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이내 익숙한 얼굴이 들어온다.

    크게 확장된 동공, 딱 벌어진 입,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반가운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미묘한 저 표정.

    나 역시도 이 상황이 호재인지 악재인지 알 수가 없다.

    유다희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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