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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462화 (462/1,000)
  • 463화 휴식 (2)

    늦은 오후.

    나는 내 소유가 된 호텔을 나와 근처의 야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몰래 나온 나들이었지만 은근히 규모가 커져 유세희와 마태강 역시 따라 나오게 되었다.

    나와 윤솔, 드레이크, 유세희, 마태강.

    닳고닳은 뉴비 구단의 다섯 멤버들은 상하이의 야시장에 나왔다.

    빨갛고 파란 등불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곳에는 각종 먹거리, 게임, 공예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재잘재잘 웃는 인파.

    꼬치, 구이, 튀김, 조림, 볶음 등등의 음식들.

    따듯한 온기가 배인 소리와 냄새가 온 세상 천지에 진동한다.

    “예쁜 언니! 천 원! 천 원! 예쁜 언니!”

    장사꾼 아저씨 하나가 유창한 한국어로 우리에게 손짓했다.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썼는데 어떻게 한국인인 줄 알아본 걸까?

    “예쁜 언니! 천 원! 한국 돈도 괜춘해!”

    윤솔에게 사탕수수즙 한 컵과 빙탕호로 꼬치 하나를 들이미는 아저씨.

    예쁜 언니라는 말에 혹한 윤솔은 얼굴을 붉히며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들었다.

    알록달록한 과일에 설탕 코팅이 입혀진 꼬치가 윤솔의 손에 들렸다.

    그러자, 장사꾼 아저씨는 바로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드레이크에게도 월병 하나를 내밀었다.

    “이쪽 무쟈게 예쁜 언니도! 천 원!”

    아마, 모든 사람을 다 예쁜 언니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드레이크도 과자 하나를 받아들었다.

    …어흠, 그럼 다음은 나인가?

    내가 슬쩍 앞으로 나서자 이내 장사꾼 아저씨는 나를 보며 말했다.

    “빙탕호로가 이천 원입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

    “구매하시겠습니까? 이것은 합리적 선택.”

    나는 취급이 약간 다른 것 같은데?

    내가 씁쓸한 마음으로 자리를 뜨자 장사꾼 아재는 마태강과 유세희에게 또다시 장사를 시작한다.

    “예쁜 언니들, 예쁜 커플, 이쪽 예쁜 언니는 공짜!”

    아저씨는 마태강에게 꼬치구이 하나를 팔고 유세희에게는 하나를 공짜로 주었다.

    “…이건 뭔가 부당해.”

    내가 투덜거리자 드레이크가 내 등을 툭툭 치며 위로해 주었다.

    윤솔 역시도 내 팔을 잡은 채 배시시 웃는다.

    한편, 유세희는 마태강의 팔짱을 꼭 낀 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너무 붙지 마라.”

    “그럼 어떻게 해요. 눈이 안 보이는데~”

    “그러게 왜 나왔어.”

    “와~ 그럼 눈 안 보이면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해요? 중국까지 왔는데?”

    유세희의 반격에 마태강은 입을 다물었다.

    얘는 중학생 주제에 왜 이렇게 말을 당돌하게 잘할까?

    나는 만만한 게 마태강이라서 그저 씩 웃을 뿐이다.

    “태강이 세희랑 팔짱 끼고 다니네?”

    “……동생 같아서요. 걔도 자주 이래서.”

    그러고 보니 마태강의 여동생 역시 몸이 아주 약하다고 들었다.

    지금은 마태강의 수입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서 많이 호전되었다고 들었지만.

    문득 생각난 것인지 마태강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새삼스럽지만… 예전 토뎀 나이트 때 도와주신 것 덕분에 동생 병원비를 댈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사부님.”

    그러고 보니 마태강은 당시 집안 사정 때문에 불법 토토리그에 참가했었다고 했다.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나에게만은 털어놓은 사실.

    “평생 갈 사이에 이런 걸로 일일이 고마워하면 되나.”

    나는 마태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녀석은 몹시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마스크를 올려 자기의 표정을 가린다.

    은근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다.

    야시장의 밤은 깊어갈수록 더욱 뜨겁고 화려해진다.

    곳곳에서 요란한 음악소리가 뒤섞였고 맛있는 냄새가 자욱하게 퍼진다.

    펄떡펄떡거리는 거대한 생선이 즉석에서 해체되고 있었고 고기가 삶아지거나 튀겨지는 소리, 사탕수수가 으깨지고 달콤한 즙이 컵 안에 차오르는 소리들이 도처에 가득했다.

    방금 도살한 돼지나 소의 특수부위 역시 경매가 벌어지고 있었다.

    단순히 먹거리뿐만이 아니라 이런 볼거리들 역시 매우 풍족하다.

    …하지만 마냥 흥겹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 뭐야? 관광객? 일본인? 한국인?”

    “일본 팀이 더 잘한다고 생각하나? 중국 팀이 더 잘한다고 생각하나?”

    “한국 팀? 그런 얍삽한 짓이나 하는 것들은 논외지~”

    곳곳에서 열성적인 게임팬들의 사상검증이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몇몇 일본인 관광객과 중국인 팬들 사이에 시비가 붙는 일도 있었다.

    아무래도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시즌이니만큼 멀리 원정 응원을 온 열성팬과 홈 팀 열성팬들 사이에 마찰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다툼을 싫어하고 또 다퉈서도 안 되는 입장이었기에 그런 분란이 일어날 만한 곳은 최대한 피해서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때.

    “어! 저기 좀 봐!”

    앞서 걷던 윤솔이 정면을 향해 외쳤다.

    그곳에는 우리가 알아볼 수 있게, 영어로 쓰여 있는 커다란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천막 안에는 여러 개의 인형들이 놓여 있고 몇 미터 앞에는 테이블과 비비탄 총이 보인다.

    “‘숨어서 공격 2’? 저격 게임인가 보네?”

    멀리서도 진동하는 갓겜의 냄새에 윤솔이 관심을 보인다.

    마태강과 유세희 역시 흥미진진한 기색.

    “해볼까?”

    드레이크가 운을 띄우자 모두가 우르르 천막으로 몰려갔다.

    제일 먼저 총을 잡은 이는 윤솔이었다.

    “얍!”

    윤솔은 한쪽 눈을 감고 제법 그럴 듯한 자세로 방아쇠를 당겼다.

    틱- 티틱- 틱-

    하지만 은근슬쩍 움직이는 인형들은 맞히기가 쉽지 않았다.

    개중 몇 개에는 뒤에 지지대가 있거나 안에 무거운 것이 들어 있는지 총알에 맞고도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윤솔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총을 내려놔야 했다.

    얻은 것이라고는 작고 못생긴 열쇠고리 하나가 전부였다.

    “……아아. 뭐야, 이 망겜은.”

    그러자 그런 윤솔을 보다 못한 드레이크가 앞으로 나섰다.

    “줘 봐라 솔. 네가 허접한지 이 게임이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 줄 것이다.”

    그는 비비탄 총을 잡고 테이블 앞에 엎드렸다.

    벌써 견착부터가 다르다.

    틱- 티틱- 틱-

    드레이크는 놀라운 속도로 표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가장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인형은 양 옆 인형 두 개를 쓰러트림과 동시에 그 인형들의 무게로 움직여 지지대에서 대각선으로 벗어나게끔 해 떨어트린다.

    “와아, 드레이크 씨 대단하시네요. 역시 전직 군인!”

    윤솔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드레이크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상품으로 얻은 큰 인형을 윤솔에게 주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로군!”

    나 역시 이런 사격 게임을 아주 좋아한다.

    내가 막 총을 향해 손을 가져가려 할 때.

    “…자기야. 나 주려고 인형 뽑는 거야?”

    귓가에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뱀이 휘감아 오는 듯한 음성.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확 돌렸다.

    …빵!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총으로 뒤를 쏴 버렸다.

    “푸스스스… 오랜만… 악!?”

    내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이마를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시커먼 머리, 창백한 피부, 광대뼈까지 넘실거리는 다크서클.

    조디악 번디베일.

    그가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 하나가 서 있다.

    나른한 눈매, 어딘가 졸린 듯한 표정.

    바로 김정은이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조디악에게 핀잔을 주었다.

    “어차피 고통도 못 느끼면서 왜 아픈 척 해? 광대야?”

    “푸스스스… 아참 그랬지. 버릇이라서, 정상인 흉내 내는 게.”

    조디악은 김정은의 핀잔에 배시시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앙신(殃神) 조디악, 그리고 핵쟁이 김정은.

    이 최악의 콤비 둘이 왜 내 뒤에서 만담을 찍고 있단 말인가?

    조디악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윤솔과 드레이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마태강 역시 프로리그 습격사건 당시 조디악의 얼굴을 본 적 있기에 바짝 경계하는 자세.

    유세희만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제일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조디악이 진짜배기 사이코라는 사실을 안다. 저놈은 현실에서도 살인을 저지르는 미친놈이다.

    “…뭐야?”

    나는 음성변조기를 켠 채 물었다.

    이곳 축제는 얼핏 보기에는 자유롭고 활기차 보이지만 사실 공안의 엄격한 통제 하에 벌어지고 있다.

    이곳저곳에 경찰들이 깔려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기간이니만큼 그 경계는 한층 더 삼엄한 상태였다.

    “만약 칼부림이라도 난다면 공안들이 바로 테이저건 들고 달려올걸? 중국 경찰력 대단한 건 알지?”

    나는 조디악을 향해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가 여기서 마음대로 날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태연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조디악은 짐짓 깜짝 놀란 척하며 되물었다.

    “아니, 친구. 왜 그런 무서운 말을 하나? 나는 그냥 대화를 하러 왔을 뿐이야. 한국 제일의 챔피언 마동왕과 오프라인에서 얘기를 나눠 보고 싶어서 먼 길을 왔다고.”

    그는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개인적으로 팬이야. 친구가 되고 싶어.”

    나는 놈의 손을 잡지 않고 슬쩍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철우, 방철해 형제가 천막 입구를 떡 지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젠장, 유창이라도 데려올 것을….’

    오늘 같은 날까지 따라올 것 없다며 만류한 것이 화근이었다.

    앞으로는 게임 속에서만 극도로 조심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신중해야 하겠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다르게 조디악은 전혀 전의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내 그는 입가의 웃음을 지운 채 내게 내밀었던 손을 한 번 더 쭉 뻗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어 말했다.

    “…이봐, 나와 손을 잡지 않겠어?”

    다소 뜬금없는 제안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세상에 천하의 앙신 조디악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할 일이 있다고?

    머릿속에 몇 가지 상황이 빠르게 가정된다.

    조디악이 내 손을 빌려 가면서 하고 싶은 일이 뭐가 있을까?

    ‘음, 확실히 몇 가지 상황이 있기는 있다만…….’

    그러나 이 상황에서 바로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내가 말이 없자 조디악은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이 ‘무사히’ 우승할 수 있게 도와주지. 이번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서 말이야.”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치고는 꽤나 위험해 보이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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