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60화 (460/1,000)
  • 461화 한국, 중국, 일본 (5)

    화면 밖.

    ‘조금만 더!’

    온 한국인이 마음으로 외친다.

    분명 그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면 속의 나는 그 마음에 화답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지금 당장은 말이다.

    홱-

    나는 화물을 격납고에 밀어 넣기 직전 몸을 돌려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수풀로 들어가 숨었다.

    와드(Ward)조차 통하지 않는, 독특한 지형 특성을 가진 그린헬의 부쉬들은 남의 눈을 피해 숨기에 딱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지금의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격납고에 화물이 들어가기 직전,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혼란은 더하겠지.

    하지만 나 역시도 다 생각이 있다.

    ‘…너무 쉽게 끝내 버리면 재미없잖아?’

    관객들은 비싼 입장료를 내면서까지 이곳에 왔다. 그러니 그들은 ‘재미있는’ 경기를 볼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나 같은 먼치킨 하나가 경기 초반부터 다 때려 부수는 것은 한국 팬들에게만 재밌을 것 아닌가? 중국 팬들과 일본 팬들에게도 즐길 권리를 줘야지.

    나는 모두를 위해 기꺼이 불화의 여신 배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이 귀찮은 황금 사과들을 여기까지 운반한 것이고.

    이윽고.

    내가 요란하게 움직인 덕분인지 금세 반응들이 온다.

    “…대장!”

    “…사부!”

    남쪽 수풀이 바스락거리더니 잎사귀 투성이가 된 여자 둘이 뛰쳐나왔다.

    윤솔과 유세희다.

    그와 거의 동시에, 북쪽 수풀 역시도 반으로 쪼개졌다.

    그 안에서는 드레이크와 마태강이 튀어나왔다.

    “자, 빨리 이리로!”

    내가 손을 흔들자 닳고닳은 뉴비 구단 멤버들이 내가 있는 쪽으로 모여들었다.

    펄럭-

    나는 재빨리 윤솔의 망토를 짚었다.

    샌드웜의 망토에는 ‘흙장난’ 특성이 붙어 있어서 모두를 은폐하기에 딱이다.

    우리들은 윤솔의 망토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린 채 수풀 건너편을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입질은 곧 왔다.

    콰쾅!

    남쪽에서 일본 팀 랭커 다섯 명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뛰쳐나왔다.

    퍼펑!

    그와 동시에, 북쪽에서도 중국 팀 랭커 다섯 명이 엄청난 박력을 뿜어내며 등장한다.

    ‘어라? 5:5 구도가 만들어졌네?’

    이것은 수풀에 숨어 있는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기껏해야 서넛 정도 모일까 했는데 설마 양 팀 모두 풀 멤버로 올 줄이야.

    분위기가 이렇게 완벽하게 흘러간다면 아무리 이 상황을 설계한 나라도 흥미진진해질 수밖에 없잖아.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덤불 안에 숨어 있는 우리 구단 멤버들을 향해 물었다.

    “……다들 ‘그것’ 준비했지?”

    내 말에 윤솔, 유세희, 마태강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야, 아무도 준비 안 했어? 어떻게 이럴 수가! 기껏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잡았는데!”

    하지만, 지금껏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동료 드레이크만은 내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 아이템’ 말이지? 물론이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히든카드.

    이윽고, 드레이크는 품에서 몇 개의 소모품 아이템을 꺼내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 주기 시작했다.

    -<바삭한 팝콘> / 소모품 / F

    튀긴 옥수수.

    -맛있음 +10

    *       *       *

    한편.

    “……뭐야?”

    흙먼지를 날리며 말을 몰아 온 커제는 눈앞에 있는 네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오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네 개의 마법진을 허공에 띄우고 있던 아키사다 아야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팀?”

    일본 팀과 중국 팀은 필드 한가운데에서 서로 마주쳤다.

    공교롭게도 둘 중 종족이 같은 이는 하나도 없었기에 의사소통은 전혀 되지 않았다.

    다만 서로 눈짓으로 상태를 파악했을 뿐이다.

    ‘우리는 한국 팀을 쫓고 있었는데?’

    ‘그런데 어디서 이것들이 풀 멤버로 튀어나왔지?’

    물론 한국 팀이 제일 성가시긴 하지만 그것과 눈앞에 있는 적은 별개다.

    다섯 명이 하나로 뭉친 이상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쪽은 눈앞에 있는 팀이었다.

    …슬쩍

    이곳에 모인 열 명의 랭커들은 전장 구석에 있는 화물에 우선 시선을 주목했다.

    격납고 앞에 딱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화물.

    사춘기 때 남들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19금 비밀잡지보다도 더욱 더 유혹적인 저 자태와 각도.

    누군가 다가가 저것을 톡 밀기만 해도 이번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의 우승자는 정해진다.

    아마 기여도 1위로 MVP 개인상을 받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

    “…….”

    화물을 눈앞에 두고 일본 팀과 중국 팀의 눈치게임이 시작되었다.

    일단 서로 기선을 제압하고 싶은 심경이었을까?

    중국 팀 중 가장 성질이 괄괄한 커제가 먼저 도발을 했다.

    “어딜 섬나라 소국이 대륙의 대국에게 눈을 똑바로 뜨느냐!”

    마치 사극에서 나올 듯한 어투, 종족이 달라 말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 적의는 충분히 일본 측에 전해졌다.

    그러자 아야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매번 황사만 일으키는 나라 답네요. 흙먼지 좀 그만 피우세요.”

    아야카는 순식간에 마법을 캐스팅해 커제에게 쏘아 보냈다.

    허공을 압축해서 쏘아 보내는 매직 미사일과, 매직 피스트가 연달아 날아가 커제의 몸을 노린다.

    “헉!? 뭐야, 마법이 안 보여! 이게 그 무섭다는 방사능인가!?”

    커제는 대기가 사납게 요동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그리고 말을 재빨리 뒤로 물러 황사와 미세먼지를 일으켜 아야카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골렘술사인 히데사토 유키에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내 기관지! 용서 못해!”

    평소에도 기관지가 약하던 그녀는 분노한 표정으로 대지의 힘을 끌어 모아 골렘을 소환했다.

    콰쾅!

    온몸이 회색빛을 띤 투박한 골렘 하나가 필드에 소환되었다.

    전신이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신기한 골렘이다.

    그것을 본 장마오 쉰이 코웃음쳤다.

    “흥! 바다에 콘크리트로 가짜 섬 하나 띡 만들어놓고 EEZ가 늘어났다고 좋아하는 일본답구나! 허나 그깟 콘크리트로는 우리의 대약진을 막을 수 없다!”

    말을 마친 장마오 쉰은 ‘대약진’ 특성을 발동시켰다.

    주변에 있던 모든 중국 팀의 힘 스텟이 엄청나게 폭증한다.

    (지능 스텟은 조금 내려갔지만 그쯤이야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오오오!”

    장마오 쉰은 그 상태 그대로 적진을 향해 약진했다.

    그 앞에는 일본 측 칼잡이 야마카미 시가쿠가 일본도 한 자루를 든 채 서 있었다.

    “일본도의 예리함은 세계제이이일!”

    시가쿠는 칼을 휘둘러 눈앞에 있는 장마오 쉰을 노린다.

    하지만.

    땡강!

    시가쿠가 자랑하던 일본도는 장마오 쉰의 손바닥에 닿자마자 수수깡처럼 부러져 버렸다.

    그것은 장마오 쉰의 특성 중 하나인 ‘토법고로’때문이다.

    “후후후, 내 손에 닿은 철은 모두 못 쓰게 되어 버리지. 어쩔 테냐?”

    장마오 쉰은 시가쿠를 압박함과 동시에 어깨에 앉아 있던 참새들을 정면으로 날려 보냈다.

    ‘해로운 새’ 특성!

    독을 뿜는 참새들을 이용해 광범위한 지역에 새똥을 끼얹는 범위 공격이다.

    그것을 막아내는 이는 일본의 화염 마법사 스즈키 히카리였다.

    “이거나 받아라! 원전 3호! 멜트다운!”

    그녀가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자 무시무시한 열기류가 몰아치더니 이내 주변의 대지가 시뻘겋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해로운 새들은 모두 열기류에 휘말려 날아가 버리거나 불타 사라졌다.

    하지만.

    “어딜 감히 마법사 따위가 목소리를 내? 마법 따위 전부 통제해주마.”

    탕쯔이,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있는 리자드맨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손을 쓰자 주변에 있던 모든 마법들이 모조리 캔슬되었다.

    마법사에 한해서만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빅브라더’ 특성의 힘이다.

    그러나 일본 제일의 마법사 아키사다 아야카만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오로지 일본에만 있는 고유한 특성인 ‘사계절’을 얕보지 마세요. 하나의 마법이 봉인당해도 세 개의 다른 마법이 남아 있으니!”

    봄의 풀, 여름의 불, 가을의 바람, 겨울의 눈.

    아야카는 일본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계절 마법 특성을 이용해 네 가지 마법을 동시에 영창했다.

    탕쯔이의 마법봉인에 걸린 불 마법을 제외한 나머지 마법 3개가 날아가 사방팔방을 휩쓸었다.

    휘오오오오-!

    오로지 핀란드와 일본에만 존재한다는 ‘단풍잎’이 허공에 흩날린다.

    “…칫!”

    탕쯔이가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그녀와 같은 팀 동료인 팅위안이 대포를 펑펑 쏘아 보냈다.

    “가라! 나의 정원*진원 포!”

    묵직한 대포알이 날아가 일본 팀에 떨어졌다.

    …콰콰쾅! 퍼펑!

    한 발 한 발의 위력이 나름 강력했다.

    비록 서너 발밖에 쓸 수 없는 대포였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일본 팀 입장에서는 참으로 위협적일 수밖에 없는 모습.

    한편.

    “우오오오!”

    스모선수처럼 거대한 덩치를 가진 우에바라 아츠카네가 마찬가지로 커다란 덩치를 가진 구리와 맞붙는다.

    거구의 오크와 거구의 리자드맨의 괴수전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흥미진진한 대결이었다.

    “반자이(ばんざい)! 돌격!”

    “중화(中华)는 꺾이지 않는다!”

    일본과 중국은 살벌하게 맞붙고 있었다.

    격납고 앞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화물을 누가 차지할 것이냐를 놓고 싸우는 대결.

    콰-콰콰콰콰쾅!

    마법과 칼부림이 난무하는 격전, 온 대지가 뒤틀리며 맵의 풍경이 급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커헉! …커흑! …허억!”

    자욱한 흙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이 있었다.

    중국 팀 대장 장마오 쉰과 일본 팀 대장 아키사다 아야카였다.

    나머지 멤버들은 격전 중 전부 리타이어 되었다.

    죽어 나자빠져 있거나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나무뿌리에 기대어 있는 모습들.

    저런 HP로는 살아도 산 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화물은!”

    “…내 거야!”

    장마오 쉰과 아키사다 아야카는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살육전.

    굶주린 두 맹수는 눈앞에 있는 고깃덩어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바로 그때.

    “이야. 직관 꿀잼.”

    화물 바로 옆의 부쉬가 한번 바스락 흔들렸다.

    장마오 쉰과 아키사다 아야카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개를 돌렸다.

    …까드득! …우득! 붕붕붕붕-

    그곳에는 묵직한 건틀릿을 빙글빙글 휘두르며 어깨를 푸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

    얼굴을 덮고 있는 흰 가면, 산책을 나온 듯 여유로운 태도, 심지어 입가에 잔뜩 묻어 있는 팝콘 가루까지.

    마동왕.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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