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59화 (459/1,000)
  • 460화 한국, 중국, 일본 (4)

    먼 옛날, 펠레우스라는 남자와 테티스라는 여자가 결혼을 했다.

    이 성대한 결혼식에는 모든 신들이 초대받았으나 오직 하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만은 초대받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불화의 여신은 초대를 받지 못했음에도 결혼식장에 찾아와 ‘황금 사과’ 한 알을 남겨놓았다.

    황금 사과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칼리스테이(kallistēi)’

    ‘for the fairest one’이라는 뜻.

    한마디로 가장 어여쁜 이에게 바치는 황금 사과라는 의미이다.

    그 때문에 이 사과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놓고 여신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헤라와 아테네, 아프로디테가 사과의 소유권을 놓고 맹렬하게 대립했고 이는 결국 거대한 전쟁인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호메로스 『일리아드』 中-

    *       *       *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나는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바로 대회가 열리는 맵으로 워프했다.

    “……그린헬인가.”

    피부에 와 닿는 무더운 습기, 빽빽한 잎사귀, 만 년 묵은 아나콘다처럼 굵은 나무뿌리들.

    초록 지옥이라고 불리는 ‘그린헬’이 아마 오늘의 무대인 모양이다.

    ‘이 역시도 내가 예상했던 대로군.’

    사실 내가 보고 겪었던 미래와는 다른 맵이지만 새삼 놀랄 것도 없다.

    내 힘이 최대한 봉인될 만한 맵이 나올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수들 엔트리는 내가 아는 거의 그대로지.’

    나는 침착하게 전방을 살피며 오늘 상대하게 될 적들을 떠올렸다.

    일단은 일본 대표팀 ‘쥬신구라’의 멤버들.

    1. 야마카미 시가쿠.

    특징: 칼과 창을 번갈아 쓰는 인간 전사.

    공략: 강력한 한 방 기술만 피하면 별다른 것 없음.

    위험 레벨: ★☆☆☆☆

    2. 우에바라 아츠카네

    특징: 스모 메타를 위시하는 오크 전사.

    공략: 높은 체력과 방어력에 주의. 시간을 들여 침착하게 격파할 것.

    위험 레벨: ★☆☆☆☆

    3. 히데사토 유키에.

    특징: 콘크리트 골렘을 다루는 골렘술사.

    공략: 골렘만 깨부수면 별다른 것 없음.

    위험 레벨: ★★☆☆☆

    4. 스즈키 히카리.

    특징: 화염 마법사.

    공략: 근거리 공격에 극도로 취약. 단 자폭은 극히 주의할 것.

    위험 레벨: ★★★☆☆

    5.  아키사다 아야카.

    특징: 서로 다른 4개 속성 마법 동시 사용.

    공략: ?

    위험 레벨: ★★★★☆

    그 다음은 중국 대표팀 ‘제왕세기(帝王世紀)’의 멤버들.

    1. 커제

    특징: 적토마를 타고 다니는 근접 딜러.

    공략: 말이 일으키는 황사만 걷어내면 별로 위협적이지 않음.

    위험 레벨: ★☆☆☆☆

    2. 구리

    특징: 격투메타의 근접 딜러

    공략: 솔플을 즐기는 근접 딜러이지만 그다지 강한 수준은 아님.

    위험 레벨: ★☆☆☆☆

    3. 팅위안

    특징: 원거리에서 대포를 쏘는 원딜러.

    공략: 포격 가능한 포탄의 개수가 적으니 하나하나 집중해서 피하다 보면 알아서 화력 고갈.

    위험 레벨: ★★☆☆☆

    4. 장마오 쉰

    특징: 근접 딜러 및 버프 캐릭터.

    공략: 몸에 닿은 아이템을 못 쓰게 만드는 능력을 조심, 주변 동료들에게 이동속도 증가 버프를 걸어주니 주의할 것.

    위험 레벨: ★★★☆☆

    5. 탕쯔이

    특징: 서포트형 캐릭터.

    공략: 상대방의 대화를 봉인하는 능력 주의. 마법사의 마도서를 불태우는 특수능력 요주의.

    위험 레벨: ★★★★☆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올라 있는 10명의 인물들 중 8명은 내가 아는 미래에서도 이번 리그에 출전했던 인물들. 그 외 나머지 두 명은 내가 따로 빠삭하게 꿰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모든 이들의 아이템과 스킬, 공격 패턴, 주의점 등을 전부 숙지하고 있기에 그다지 부담감은 들지 않았다.

    ‘다만 아키사다 아야카의 ‘쿼드라 캐스팅’과 탕쯔이의 ‘빅 브라더’, ‘분서갱유’ 특성은 조심해야겠네.’

    아키사다 아야카의 쿼드라 캐스팅 능력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4원소 마법 동시연산 및 구현능력은 나조차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굉장한 능력이다.

    그리고 탕쯔이의 특성 역시도 상당히 위험하다.

    그녀의 ‘빅 브라더’ 특성은 적들의 입을 막아 대화 자체를 봉인해 버린다.

    또한 ‘분서갱유’ 특성은 마법사의 주 무기인 ‘책’을 불태워 버리는 특성이기에 마법사 킬러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나머지들이야 뭐, 나와는 상성이 좋으니 상관없지.’

    다른 일본, 중국 선수들 역시 모두 쟁쟁한 실력을 가졌지만 나를 상대하기에는 무리다.

    …바스락!

    나는 그린헬의 전체적인 맵 외형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했다.

    이윽고, 나는 목표로 하던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나무뿌리 사이에 꽉 끼어 있는 커다란 오브젝트.

    붉은 글씨로 , <취급주의> 라고 적힌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궤짝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의 화물이었다.

    “……어디 보자. 황금 사과로군.”

    나는 궤짝 틈새 사이로 보이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화물 안에 가득 실려 있는 것은 황금색으로 반짝거리는 사과였다.

    “마침 내가 세운 전략에 딱 어울리는 화물이야.”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화물을 밀기 시작했다.

    그린헬에 철도나 격납고가 있을만한 구역은 몇 없다.

    울퉁불퉁한 기암괴석들 위에 격납고를 설치할 수는 없을 테니 몇 없는 평지를 찾다보면 분명 격납고가 나올 것이리라.

    *       *       *

    한편.

    전용진 캐스터는 안타깝다는 듯한 어조로 멘트를 치고 있었다.

    [네, 마동왕 선수. 맵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 맵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네요. 하지만 사람인 이상 당황하지 않았을 리는 없고, 아마 속으로는 많이 불안할 겁니다. 아마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팬들을 의식해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아주 대견한 모습입니다. 우리 팬 여러분들이 속으로 많이 응원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는 국내외의 모든 한국인들은 분함 반 침통함 반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온 힘을 합쳐 한국의 명예를 드높여도 시원찮을 판에 선수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협회의 꼬라지가 너무나도 졸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맵에서 우리 마동왕 선수의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참, 맵 선정에 있어서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거의 치사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인데요. 왜 하고 많은 맵 중에 그린헬이냐 이거죠. 이건 노골적으로 마동왕 선수의 힘을 억제하고 봉인하려는 음모……]

    순간.

    [……어?]

    전용진 캐스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경기를 생중계하고 있던 다른 수많은 스트리머들, 그리고 그들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시청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수의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전광판 안에서는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쾅!

    마동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화물을 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압도적인 힘으로!

    우지지지지직!

    파괴불가의 궤짝이 마치 부서질 듯 휘며 앞으로 쏘아져 날아간다.

    전용진은 그것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으아니!? 마동왕 선수! 가차 없이 화물을 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리따운 묘령의 여인이 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긴다.

    바로 1대 뎀걸이자 해설로 참여한 홍영화다.

    [꺄악! 마동왕 선수! 여전히 대단한 힘이에요!]

    여전히 백치미가 느껴지는 맹한 어조.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홍영화의 분석은 잘 벼려진 발골도만큼이나 날카롭다.

    [사실 마동왕 선수의 힘이 화물을 저렇게 쉽게 밀 수 있을 정도라는 사실은 국내리그에서도 이미 증명된 사실이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국내리그의 화물은 철도와 연결되어 있고 또 전방을 방해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어 격납고로 향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 그린헬은 어떠합니까!? 뒤틀린 나무뿌리와 빽빽한 잎사귀 때문에 철도는커녕 격납고의 위치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마동왕 선수가 화물을 밀기 시작했다는 것은……!]

    홍영화의 분석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마동왕은 저 멀리 있는 격납고 포인트를 향해 화물을 날려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영화는 꺅 소리를 내며 마이크를 잡았다.

    [아무래도 우리의 마동왕 선수는 화물이 향해야 할 곳을 벌써 감 잡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철도도 격납고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마동왕 선수는 이미 맵 전체를 간파하고 있다는 듯 바로 움직임에 착수합니다!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는 평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때.

    …터억!

    마동왕이 날려 보낸 화물이 커다란 나무뿌리들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그 순간 캐스터 석뿐만이 아니라 홀 안에 있는 모든 인파, 그리고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재수 없게도 화물은 나무뿌리 사이의 아주 깊은 곳에 단단히 끼어 버린 것이다.

    이것을 다시 빼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에 다른 화물을 찾아 멀리 이동하는 것이 유일한 방책으로 보였다.

    한편.

    관중석 1열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 중 유난히도 안타까워하는 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유다희였다.

    “……아아!”

    그녀는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틀리그의 첫 맵이 ‘마동왕 죽이기 맵’으로 악명 높은 그린헬로 선정되었을 때부터 유다희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유창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전광판을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형님은 절대 안 질 거야. 어디 가서 무릎 꿇을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런 유창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우지지지직!

    요란한 소리가 전광판 밖으로 터져 나왔다.

    전용진 캐스터와 홍영화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마이크를 잡았다.

    [세상에! 마동왕 선수! 화물에 뒤엉킨 나무뿌리를 손으로 죄다 뜯어 버리고 있습니다!]

    [아, 아니, 근데 저게 뜯는다고 뜯겨지는 뿌리인가요? 하나하나가 인도코끼리 허리보다도 굵은 뿌리들인데…….]

    하지만 마동왕은 마치 달리기 결승선에 묶인 종이테이프 끊듯 그린헬의 굵고 질긴 나무뿌리들을 죄다 손으로 잡아 찢어 버린다.

    대체 그 악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히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

    그리고.

    …콰쾅!

    또다시 화물이 격납고가 있는 방향을 향해 날아오른다.

    다섯 명이 온 힘을 다해 밀어야 겨우 밀리는 화물이 마치 아이언에 맞은 골프공처럼 솟구쳐 오르는 광경.

    그것은 전 세계인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신위(神威)였다.

    전용진 캐스터는 이제 아예 마이크를 목구멍까지 박아 버릴 기세로 가깝게 잡고 소리치고 있었다.

    [마동왕! 빠릅니다! 빨라요! 마동왕! 화물! 빠릅니다! 쭉! 쭉쭉! 쭉쭉쭉 밉니다! 그아아앗! 격납고 가즈아아앗!]

    홍영화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마이크를 놓고 유리창에 대고 마구 소리친다.

    그래 봐야 마이크가 없어서 금붕어가 뻐끔뻐끔거리는 것 같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화면 밖 모든 이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소리친다.

    온 한국이 하나가 되어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유다희를 위시한 마교인들의 응원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고 간절했다.

    “사랑해요 마동왕!”

    “우윳빛깔 마동왕!”

    “꺄아아악! 마동왕 세계정복 가자아아!”

    화물을 미는 본인이야 눈앞의 무성한 잎사귀들 때문에 보이지 않겠지만 화면 밖에서 보는 수천만의 눈에는 화물 앞에 놓인 커다란 격납고가 뚜렷하게 보인다.

    ‘…조금만 더!’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있었다.

    이제 마동왕이 미는 화물은 격납고까지 불과 몇 미터도 채 남지 않았다!

    한국의 무혈우승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한데?

    우뚝!

    마동왕.

    그는 격납고가 빤히 보이는 앞까지 와서는 화물 밀기를 중단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홱 뒤돌아 그 옆의 풀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바스락!

    화물을 버려 둔 채 격납고에서 멀어지는 마동왕.

    캐스터 석에 앉아 있는 전용진 캐스터, 뎀걸 홍영화, 관중석에 앉아있는 유다희와 유창을 비롯한 수많은 마교 팬클럽.

    그리고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수천만의 한국인들이 모두 일순간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

    ‘…어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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