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57화 (457/1,000)
  • 458화 한국, 중국, 일본 (2)

    2024년의 새해가 밝았다.

    동시에 올해 최고의 이벤트가 될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의 날 역시도.

    하늘을 색색으로 물들이는 엄청난 양의 폭죽들, 허공에 수많은 홀로그램 빔을 쏴 환상적인 연출을 자아내는 드론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압도적인 장관은 인파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관람객들이 거대한 홀 안을 꽉 채운 것도 모자라 그 주위를 몇 겹으로 감싸고 있었다.

    홀은 물론이요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시설들이 죄다 마비될 정도로 엄청난 성황이다.

    한국에서도 15만 명이라는 대기록이 세워진 적 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거리 곳곳의 커다란 전광판과 돔 천장 중앙의 홀로그램 기계에서는 경기 홍보 영상들이 재생된다.

    이내.

    부우웅-

    수십 대의 밴이 인파를 가르며 전용 도로로 진입했다.

    오늘 리틀리그에 출전할 한국, 중국, 일본의 대표팀들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총 15명의 프로게이머에 불과한 주연들.

    하지만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수행원들의 수는 그보다 열 배는 많았고 또 그 수행원들의 관계자들은 그보다 열 배는 많다.

    거기에 그 사람들을 감싸고 있는 팬들의 수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

    우-와아아아아!

    경기장 천장이 들썩일 정도의 함성이 상하이의 하늘을 뜨겁게 끓였다.

    한편.

    ‘…우와, 이건 좀 부담되네.’

    나는 가면 너머, 창밖의 인파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공항에서와 달리 이곳의 팬들은 대체로 나, 그리고 우리 구단 멤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제 만났던 중국 팬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우호적이었고 또 시종일관 좋은 모습만 보여줬지만 오늘 만나는 이들은 대놓고 적개심 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노려본다.

    “소국이 어딜 대국에게 덤벼드느냐!”

    “빵쯔들은 저리 꺼져!”

    “일본도 한국도 모두 멍청이! 교통비만 버릴 뿐!”

    “중국에서 열리는 리그인데 너희들은 왜 왔니!”

    “中华脊梁 宁折不弯!”

    “你们这群韩国弟弟来抓我呀!”

    몇몇 중국의 훌리건들은 대놓고 우리가 있는 밴에 욕을 했다.

    그 과정은 우리가 홀 앞에서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내리는 동안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다만 생각했을 뿐이다.

    ‘원래라면 한국은 여기서 광탈했었지. 시작부터 일본과 중국에게 연달아 두들겨 맞고 말이야.’

    몇몇 한국 선수들이 분전하기는 했지만 일본과 중국이 손을 잡은 것에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회귀 전의 한국은 확실히 E스포츠 퇴물국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를 거다.’

    나는 가면 속의 얼굴을 들어 주변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한국 팀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표정.

    적어도 나 하나쯤은 꽤나 경계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리 크게 위협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싶다.

    ‘곧 표정들이 재밌어지겠군.’

    나는 가면 속에 표정을 숨긴 채 눈앞의 관객들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

    ‘…응?’

    나는 순간 인파 사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방금 익숙한 얼굴을 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아니지. 꼭 뭐 기분 탓인가 싶을 때는 그게 맞더라.’

    기분 탓인가? = 기분 탓이 아님.

    잘못 봤나? = 잘 봄.

    아니겠지? = 맞음.

    나는 영화나 만화의 흔한 클리셰를 반대로 생각했다.

    허연 피부, 시커먼 다크서클, 검은 올백머리.

    만약 내가 지금 본 것이 기분 탓이 아니라면, 방금 인파 속에 숨어서 나를 보고 실실 쪼개던 놈은 바로 조디악이다.

    놈을 현실에서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약간 등골이 오싹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뉴스 기사가 맞다면 놈은 지금 한창 수배중일 텐데.

    그때.

    “사이코가 하나 있네요, 형님.”

    내 귓가에 스산한 목소리가 하나 들린다.

    유창. 녀석이 날 선 표정으로 인파 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내가 조디악 비스무리한 얼굴을 봤던 방향이다.

    “너도 봤구나?”

    “예 형님. 사이코는 사이코를 알아보죠.”

    …그 말은 나도 사이코라는 소리인가?

    내가 고개를 돌리자 유창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녀석 또한 예전에 게임 속 늪지대에서 조디악과 싸워 봤던 경험이 있기에 놈의 얼굴을 안다.

    ‘저놈이 뭐 때문에 또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미간을 구겼다.

    내가 아는 미래대로라면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 앙신의 간섭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때쯤의 조디악은 살인자들의 탑에 꽁꽁 틀어박혀 고정 S+등급 몬스터를 잡고자 계획하고 있을 터인데?

    ‘아무래도 미래가 조금 바뀐 것 같네.’

    확실히, 조디악의 행보는 내가 알고 있던 미래와 조금 달라졌다.

    하긴. 애초에 그가 가졌어야 할 깎단이 내 손에 들어온 시점에서부터 이미 꼬였지 뭐.

    ‘하지만 놈이 살인자들의 탑을 아지트로 삼았다는 것은 남세나의 증언으로 보아 거의 확실할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놈이 노리고 있는 고정 S+급 몬스터는 분명…….’

    이거 주저할 시간이 없겠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끝나면 바로 조디악부터 잡아 족치러 가야지.

    놈이 순수한 의도로 경기를 직관 오지는 않았을 테고, 일단은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나는 속으로 느껴지는 찜찜함에 대비할 계획을 머릿속에 착착 세워가며 홀 안으로 들어섰다.

    안티팬들의 진상 따위는 이미 안중에 없어진 지 오래였다.

    *       *       *

    어느덧 홀 안에 오늘의 주인공들이 모두 입장했다.

    한, 중, 일의 선수들이 모두 들어와 팬들에게 인사를 한 뒤 캡슐 장비를 착용한다.

    각국의 캐스터들이 저마다의 중계석에 서서 머나먼 자국의 팬들에게 열심히 영상을 송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한국 중계석에서 자리를 빛내고 있는 이는 한국 팬, 나아가 세계 팬들에게도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 바로 전용진 캐스터이다.

    [네! 먼 곳에서 우리 태극 전사들을 응원해 주시고 있는 신사 숙녀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지금 막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되는 최고의 쇼에 자리해 있습니다. 오늘 있을 아시아 챔피언스 리틀리그 1차!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 봐도 훤하다. 머나먼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을지.

    아마 핸드폰, TV, 모니터 앞에는 그야말로 역대급으로 많은 시청자들이 몰려 있을 것이다.

    전용진 캐스터는 가슴 벅찬 표정으로 멘트를 이었다.

    [오늘 있을 자리는 아시아 챔피언스 빅리그로 진출할 수 있는 단 한 장의 티켓을 놓고 벌어지는 1차 쟁탈전입니다! 여기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차후 빅리그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겠죠? 때문에 전략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닳고닳은 뉴비 구단의 활약이 큰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윽고.

    무대 위로 폭죽이 올라옴과 동시에 한, 중, 일 데스매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5인의 프로게이머들은 제각기 게임 속으로 접속해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고 일제히 경기장으로 워프되었다.

    첫 판은 예정대로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중간중간에 화물을 밀 수 있는 레일이 추가되어 있는 맵이었다.

    순간, 전용진 캐스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아, 이런. 우려하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부정적인 멘트를 하지 않아야 할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절로 탄식이 나온다.

    그나마 전용진 캐스터가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성격이어서 망정이지 옆에 있는 다른 캐스터들의 표정은 맵을 확인한 순간부터 완전히 썩어있었다.

    오늘 경기가 펼쳐질 맵은 ‘그린헬(GreenHell)’이라 불리는 서부의 거대 밀림.

    빽빽한 삼림과 기암괴석, 고온다습한 기후로 유명한 거대 오픈필드였다.

    …그렇다면 이 맵이 왜 문제가 되느냐?

    이 맵은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가 개최되기 한참 전부터 헤비 게이머들 사이에서 한참 화제가 되었던 맵이었다.

    한, 중, 일의 게이머들은 이 맵을 가리켜 일명 ‘마동왕 죽이기 맵’이라고 불렀다.

    모든 면에서 마동왕의 특성과 개성, 공격패턴들을 너프시키는 맵이기 때문이었다.

    1. 지진이나 와류 등 대지 속성 광역기술의 피해를 감소시키는 빽빽한 나무뿌리.

    2. 시야를 가려 화물 미는 것을 방해하는 무성한 잎사귀들.

    3. 불이 잘 붙지 않게끔 자욱한 물안개와 습한 기후.

    4. 원딜 저격수들이 숨기에 좋고 회피 캐릭터들이 도망치기에 좋은 환경.

    5. 소수가 생존하여 농성 및 저항이 가능하도록 배치된 무수히 많은 장애물.

    그래서 만약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가 열릴 맵이 ‘그린헬’로 선정된다면 아마 주최 측의 농간일 것이라는 의견이 다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많고 많은 맵들 중에 그린헬이 골라질 리가 없어서 다들 설마설마 하던 참.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건 너무 노골적이죠!]

    전용진 캐스터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마 중국 일본 측의 편파적인 맵 선정이 있었고 한국 측에서는 거기에 항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 협회의 무능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인 방해나 다름없다.

    차규엽.

    아마 그가 어느 정도는 관여하고 있겠지.

    ‘…결국 협회의 치졸함이 선수도, 나라도 망치는구나.’

    전용진 캐스터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는 울분에 젖은 표정으로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공중파 방송이 아닌, 하다못해 지상파 방송도 아닌.

    한국의 수많은 개인방송 스트리머들은 전용진 캐스터가 하지 못하는 말을 시원하게 대신해 주고 있었다.

    [망할! 하고 많은 맵 중에 ‘그린헬’이 나왔네요. 분명 한, 중, 일 협회 간의 원활한 합의 끝에 맵이 결정됐다고 알고 있는데요. 한국 측에서는 자국 선수들에게 유리한 맵을 선정해 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똥을 뿌리고 앉아 있습니다!]

    [뻔하지 뭐 X발, 닳고닳은 뉴비 구단이 변변찮은 푸쉬도 안 받고 지들 힘으로 높은 데 올라가니까 아니꼬운 거야. 협회에 머리도 좀 굽히고 설설 기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하니까 높으신 꼰대들 배알이 꼴리는 거지.]

    [하여간 이놈의 X같은 협회들은 늘 지들 밥그릇 쳐 움키느라 정신없죠? 선수들이나 팬들 생각은 X도 없죠? 한국 협회들 다 망해라!]

    스트리머들은 자기들이 분석한 것들을 가감 없이 방송에 대고 모조리 토해 냈다.

    때문에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세 알아낼 수 있었다.

    이제는 옛날처럼 위에서 던져 주는 정보만 받아먹는 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든 게임 커뮤니티 댓글들도 난리가 났다.

    -장난하냐? 한국에서는 마동왕 전폭적으로 밀어줘도 시원찮을 판에 발목을 잡네~~

    -차라리 마동왕이 한국 국적 버리고 다른 나라 갔으면 좋겠다

    ㄴ진짜 열받는 나라다...발암...

    -이번 맵 선정 회의 참여했던 협회 관계자 명단 유출됐습니다!

    ㄴ와 아주 화려들 하시네;;;

    ㄴ중앙에 레드문 사장도 있네ㅋㅋㅋ차규엽?

    ㄴX같이 생긴 꼰대네ㅡㅡ딱 봐도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ㄴㅋㅋㅋ근데 레드문이 바스터즈 스폰기업 아님?

    ㄴ바스터즈는 닳고닳은뉴비랑 국대 선발전에서 마지막까지 붙었었고 말이지?

    -흐음...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

    ㄴ진짜 진상규명 한번 해야하는거 아님?

    -협회 등쌀에 선수들 피해보는게 하루이틀이냐~~~ㅅㅂ

    .

    .

    당연한 반응들이 쏟아진다.

    모든 인터넷 커뮤니티가 불만으로 마비될 정도로 비난 여론이 엄청났다.

    그리고 그 흐름을 짐작하고 있는 전용진 캐스터는 무거운 어조로 멘트를 치고 있었다.

    [네. 말씀드리는 순간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우리 선수들 각각 산개되어 있는데요. 하나둘씩 만나서 팀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 마동왕 선수는 지금 숲 외곽에 혼자 있네요.]

    전용진 캐스터는 그래도 마동왕을 보자 한결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모양.

    [네, 마동왕 선수. 맵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 맵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네요. 하지만 사람인 이상 당황하지 않았을 리는 없고, 아마 속으로는 많이 불안할 겁니다. 아마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팬들을 의식해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아주 대견한 모습입니다. 우리 팬 여러분들이 속으로 많이 응원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용진 캐스터는 마동왕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계속해서 멘트를 친다.

    [만약 이 맵에서 우리 마동왕 선수의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참, 맵 선정에 있어서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거의 치사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인데요. 왜 하고 많은 맵 중에 그린헬이냐 이거죠. 이건 노골적으로 마동왕 선수의 힘을 억제하고 봉인하려는 음모……]

    순간.

    [……어?]

    전용진 캐스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경기를 생중계하고 있던 다른 수많은 스트리머들, 그리고 그들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시청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수의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전광판 안에서는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예상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결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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