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56화 (456/1,000)
  • 457화 한국, 중국, 일본

    새해가 밝았다.

    동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행사가 개막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리그 in 아시아!

    일명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예전에 개최되었던 불법 리그인 ‘토뎀 나이트’와는 다르게 아시아 12개국 정부들이 정식으로 참여하여 개최하는 아시아 최대의 프로리그이다.

    아시아의 12개국 정부들은 각기 이번 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결국 공평한 제비뽑기의 결과 중국이 이번 대회의 유치국으로 선정되었다.

    ……그런 고로.

    “예상대로네.”

    나는 지금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 있는 상태였다.

    나를 포함한 우리 구단 멤버들은 전원이 퍼스트 클래스에 앉아 편안하게 중국으로 향한다.

    ‘닳고닳은 뉴비’의 중국, 아니 아시아권 진출이다!

    ‘내가 알던 미래에서도 첫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는 중국에서 열렸었지.’

    나는 비행기 창문 밖 구름의 바다를 바라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주변에 동료들이 없는 이유는 내가 구단 식구들과 다른 항공사, 다른 시간대의 비행기표를 끊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비행기 속에서 편안하게 생각에 잠기기 위해서였다.

    ‘뭐, 마동왕으로 있으면 가면에 음성변조기 써야 하니까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시원하게 맨얼굴 까고 (옷은 까지 않았다) 고인물 모드로 비행기에 혼자 오른 것이다.

    동료들과는 나중에 공항에서 만나게 되겠지.

    그때.

    “……저기요.”

    내 좌석 옆에서 쭈뼛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단정한 옷차림의 스튜어디스가 발그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한껏 젠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러자 스튜어디스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 못하고 살짝 시선을 내리깐 채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아, 저기… 팬이어서요. 혹시 사인을 좀…….”

    나는 흡족한 미소를 띤 채 그녀가 내미는 사인지에 사인을 했다.

    그러자 스튜어디스는 슬쩍 뒤를 돌아본 뒤 다시 나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사진도 한 장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아, 네. 뭐 그러시죠.”

    나는 이번에도 흡족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무장님~ 가능하다고 하셔요~”

    스튜어디스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밝은 표정으로 외친다.

    “?”

    내가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저 문 뒤에서 얼굴을 반쯤 내민 채 나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중년 남자가 보인다.

    “…패, 팬입니다아.”

    “……아 예. 왜 직접 말씀 안 하시고?”

    “제가 부끄러움이 많아서…….”

    이내 사무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내 옆에 수줍게 앉은 채로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린다.

    스튜어디스 한 명이 그런 우리를 향해 사진을 찍어 주었다.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저번에 퀴즈대회에서 직접 존안을 뵌 이후로 언제 또 뵐까 했었는데, 이렇게 봐서 너무 영광입니다아. 여기 땅콩도 까서 드릴게요!”

    “……거기도 오셨었어요? 아, 땅콩은 괜찮습니다.”

    이윽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승무원들은 총총걸음으로 1등석 객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미묘한 기분으로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앞으로의 일이나 생각해야지.’

    눈을 감고 미래 지식을 더듬는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의 대진표.

    ‘…아마 우리 조에서는 일본이 우승했었지?’

    원래 빅리그에 진출했던 4개국은 아마 일본, 대만,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이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게임 약소국 취급을 받았던 우즈베키스탄의 활약에 모두가 깜짝 놀랐었던 기억이 있어서 확신할 수 있었다.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로 1차를 하고 그 뒤에 2위 결정전, 그 뒤에 1위 결정전 순이겠군.’

    이번에 대회에 나오는 선수들의 엔트리 역시도 이미 입수했다.

    내가 경험했던 엔트리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 비슷했고 그 외의 선수들 역시도 대부분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성 트리, 아이템 트리, 공격패턴, 대부분 아는 랭커들이다.’

    거기에 무력 수준 역시도 한참 뒤떨어져 있다.

    내가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싸움.

    ‘요는 어떻게 이기는지, 그 퍼포먼스가 문제인데.’

    내가 눈을 감고 미래에 겪었던 통쾌한 명경기들 중 눈여겨볼 만한 퍼포먼스들을 고르고 있을 때.

    위이이잉…

    기체가 옅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목적지인 상하이에 당도한 것이다!

    *       *       *

    나는 푸둥 국제공항에 내려 라운지로 나왔다.

    벌써부터 북적북적한 인파들이 보인다.

    마동왕 전용 가면을 쓰고 퍼스트 클래스 전용 다이닝 룸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왔나, 친구!”

    드레이크가 제일 먼저 손을 흔들어 나를 반겨 주었다.

    “어진아아!”

    윤솔이 활짝 웃으며 쪼르르 달려와 내 팔을 잡았다.

    해외에 온 것이 처음이라는 그녀는 아직 공항을 벗어나지도 않았음에도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 뒤로 유세희가 내 뒤에서 백허그를 했고 옆에서 마태강이 꾸벅 인사를 올린다.

    엄재영 감독이 내 등을 팡 치며 씩 웃었다.

    “자식. 오는 동안 별 일 없었고?”

    “없었어요. 달리 뭐가 있겠어요.”

    “승무원들이 뭐 막 인사하고 그러지 않디?”

    엄재영 감독은 피식 웃으며 옆에 있는 드레이크를 가리켰다.

    “이 친구 인물이 워낙 좋아야지. 여자 승무원들이 줄지어서 사진 찍고 포옹하고 뭐 난리도 아니었다. 번호도 엄청 받았던데?”

    그렇다.

    드레이크는 오는 도중 여자 승무원 32명에게 번호를 받았단다.

    마태강 역시 귀엽다며 세 명의 승무원이 번호를 주고 갔다고 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가 괘씸해져서 한참을 노려보았다.

    한편 윤솔은 눈치도 없이 나에게 꼬치꼬치 물어본다.

    “어진아, 너도 오면서 승무원들이 번호 주고 갔어?”

    야, 넌 눈치도 없냐!

    나는 빽 소리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꾹 참았다.

    “으, 으응… 뭐, 받았지.”

    받은 건 사실이다. 남자 승무원이긴 했지만.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는 않기로 한다.

    서둘러 화제를 넘기려는 나에게, 윤솔은 눈치도 없이 계속 꼬치꼬치 물어왔다.

    “누, 누구한테 받았는데? 예뻤어? 승무원이니까 당연 예쁘겠지? 그 번호로 연락할 거야?”

    나를 몇 번을 죽이려는 거야…… 드레이크 앞에서 비참해진다구.

    “아, 아니, 연락 안 해. 대회 앞두고 다른데 신경 쓸 일이 어딨어.”

    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윤솔은 왠지 크게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프로정신! 본받아야해 정말.”

    “그렇다 어진. 그래서 나 역시도 아무와도 연락 안 할 거다.”

    뭐 그러시던가.

    나는 드레이크의 말을 살짝 무시해준 채 고개를 돌렸다.

    *       *       *

    우리는 공항을 나와 엄재영 감독이 예약해 둔 숙소로 이동했다.

    리무진을 타고 공항을 나서자 상하이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의 무역, 금융의 중심지답게 화려한 풍경이다.

    명나라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 양식의 건물들과 중세 유럽식 건물들이 특이하게 섞여 마치 동양풍 판타지 세계에 온 듯한 느낌.

    특히나 디즈니랜드에 가고자 하는 젊은 관광객들이 많아 도시 자체가 굉장히 혈기왕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란 것은…….

    “사랑해요 딸딸뉴!”

    “딿고 딿은 뉴비! 사랑해요오!”

    “마동왕 어서와! 띵호와!”

    리무진을 둘러싸고 환호해 주는 중국 팬들이다.

    중국 팬덤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니 정말 어마어마했다.

    지금껏 봐 왔던 모든 팬덤들의 규모를 다 합친 것보다도 많은 팬들이 우리의 리무진을 환영해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인기의 대상이 나라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을 정도로 황송한 일이다.

    이윽고, 우리는 호텔 앞에서 내렸다.

    리무진 앞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호텔의 로비까지 이어져 있다.

    커다란 회전문 위로 웅장한 호텔의 외형이 보인다.

    하루 묵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비쌀 것 같은 최상급 호텔.

    별이 다섯 개임은 당연하다.

    “오, 호텔 엄청 비싸 보이네요. 무리하신 것 아닙니까 형님?”

    “무리하긴. 네가 구단 운영비로 벌어온 돈이 얼만데.”

    “그래도 너무 호화스러운데요. 햐, 내 평생 이런 데서도 다 묵어보네. 이 호텔 이름이 뭐예요? SNS에 자랑글 좀 올리게.”

    내가 묻자 엄재영 감독은 그저 씩 웃을 뿐이다.

    호텔은 크고 화려했지만 지나다니는 손님들은 한 명도 없었다.

    오로지 수십 명의 직원들만이 일렬로 서서 우리들의 짐을 대신 들어 줬을 뿐이다.

    “우선 로비로 가자. 보여 줄 게 있어.”

    엄재영 감독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맨 앞에 서서 우리를 이끌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에는 으레 좋은 일이 생기기 때문에 나는 지레 기대감을 품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윽고.

    “오오!?”

    닳고닳은 뉴비 구단 전원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호텔 중앙의 로비에는 거의 3층 건물에 필적하는 높이의 거대 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둥그런 복도가 그 트리를 에워싸고 있고 높은 천장에까지 연결되어 있는 전구들의 행렬은 마치 은하수를 세로로 뉘어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그 트리의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선물박스들이 놓여있다.

    엄재영 감독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이것들이 전부 다 우리 구단을 향한 중국 팬들의 선물이다.”

    일명 ‘조공’이라 부르는 선물들.

    우리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크리스마스 겸 새해 선물로 보내온 수많은 선물상자들, 그 속에는 정말로 온갖 물건들이 다 있었다.

    “와아! 이건 내 거네!”

    “오오! 내 것도 있어.”

    “진짜 대단하다. 너무 감사한 일이야.”

    “중국 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전하지. 지금부터라도 중국어 배워야겠어.”

    모두는 환희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선물상자들을 짚는다.

    선물상자들에는 각각 선수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태강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선물박스 속에서 엄청난 퀄리티의 시계를 발견하고 놀라워한다.

    유세희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선물박스 속에서 유명 브랜드의 명품 핸드백을 선물로 받았다.

    윤솔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선물박스 속에서 목뼈가 뻐근해질 정도로 무거운 금목걸이와 보석 귀걸이를 보고 경악했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선물박스 속에서 스포츠카의 열쇠를 받았다.

    그 외, 엄재영 감독과 스태프들 역시도 나름의 선물들을 받고 좋아한다.

    ……그럼 나는?

    나는 어딘가 섭섭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나 많은 선물상자들 중 내 이름이 적힌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흐…흥. 별로 애시당초 기대도 안 했는걸?”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렸다.

    하기야 뭐,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목소리도 변조되어 있으니 중국에서는 인기가 좀 없을 수도 있지.

    “…역시 나는 한국인이야. 한국 팬들이 최고라구. 신토불이야.”

    한국에 가면 내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우리 구단 중 단연 최고로. 암, 당연한 일이지.

    “신토불이~ 신토불이~ 신토불이야~”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쓸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턱-

    내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바로 엄재영 감독이다.

    그는 싱긋 웃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네 선물 확인 안 하고 어디 가냐?”

    “…뭐야, 장난하세요? 제 선물이 어디 있어요, 다 님들 거구만.”

    내가 뾰로통하게 대답하자 엄재영 감독은 껄껄 웃었다.

    “네 선물 하나 있긴 있더라.”

    ……?

    나는 잽싸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분명 확인했다. 저 상자들 중 내 이름이 적힌 것은 없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엄재영 감독은 킥킥 웃었다.

    이내, 그는 두 팔을 쫙 펼쳤다.

    “이게 중국 팬들이 돈 모아서 보낸 네 선물이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엄재영 감독을 바라본다.

    뭐지? 설마 자기가 선물이라는 징그러운 멘트를 치려는 건가?

    인상이 조금 찌푸려진다.

    이 아저씨가 지금 술 먹었나,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당최 이해가…….

    바로 그때.

    엄재영 감독이 손가락으로 까마득히 높은 호텔의 천장을 가리킨다.

    나는 고개를 들어 호텔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순간.

    “……!”

    나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호텔 천장에는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로 그려진 마동왕 가면이 보인다.

    산 위, 정상에 우뚝 서서 나폴레옹처럼 손가락을 뻗고 있는 내 모습.

    그리고 내 손가락 끝 부분의 유리창을 통과한 햇빛은 이내 호텔 1층의 광활한 로비에 빛으로 된 글자를 수놓는다.

    호텔의 이름이 햇빛을 받아 천천히 중앙 로비 정중앙에 그려지고 있었다.

    ‘마동왕 호텔’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에게 엄재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 호텔을 너에게 조공으로 바치겠단다. 중국 팬들이.”

    그 말이 귓가에 들리는 순간 나는 몸을 한번 파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몇 초간의 침묵.

    그 끝에는 소녀의 것 같은 비명이 따라붙는다.

    나는 온몸으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꺄아아아악! 차이나 넘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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