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키스 타임 (5)
“흐아암~”
E스포츠 스타디움의 중계석.
오늘 행사의 시설 점검을 맡은 스타디움 관계자는 숙취와 피로로 인해 피곤한 표정으로 하품을 한다.
“아아, 저 사람들 설마 싸우는 건가? 뜨신 밥 먹고 왜들 저런대?”
그는 유리창 너머 저 아래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윽-
그는 싸움이 진행될 동안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경으로 의자에 누워 한 숨 청하기로 했다.
그가 잠을 자기 위해 막 의자에 드러눕는 순간.
…삑!
행사장 전광판과 연결되어 있는 원격 카메라를 조종하는 레버가 살짝 건드려진다.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옅은 잠에 빠졌다.
위이잉-
수많은 카메라 중 한 대가 자동으로 움직여 저 밑,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 홀 중앙을 잡기 시작했다.
* * *
“싸움을 멈춰 주세욧!”
“저희 친합니다! 그러니 싸우지 말아주세요!”
고인물과 마동왕이 한 자리에 섰다.
그 장면을 본 유다희와 임요셉이 주춤했다.
“……마왕님?”
“고인물 님?”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동왕을 주목했다.
유다희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허공에 정지한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임요셉 역시 마찬가지로 제자리에 우뚝 멈췄다.
하지만 고인물과 마동왕의 등장으로도 불붙은 두 팬덤의 투기를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다.
저 멀리서는 싸움을 말리러 등장한 두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
이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몰려든다.
바로 그때.
팟!
위에 있던 카메라 한 대가 갑작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카메라에 연결된 대형 전광판에 불이 들어온다.
“……!”
순간,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이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제자리에 멎었다.
공교롭게도, 대형 전광판과 연결된 카메라는 딱 한 곳.
바로 고인물과 마동왕이 서 있는 포인트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X됐다. 어떡하지.’
나는 회귀한 이후 드물게도 몹시 당황해 있었다.
아무리 내가 게임 속에서 대단하다고 해도 현실에서, 그것도 2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리가 없다.
이들이 싸운다면 아마 내일 뉴스에 나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대한민국 게임 산업의 발전과 긍정적인 이미지 확립에 몰두하고 있는 나로서는 여러모로 사양하고 싶은 상황이다.
그 순간.
파앗!
잔뜩 당황하고 있는 내 모습이 대형 전광판에 잡혔다.
어찌된 영문인지 카메라 한 대가 돌아가 내 모습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내 옆에 있는 마동왕의 모습 역시도 전광판에 떴다.
(참고로 지금 마동왕은 드레이크가 분장한 상태로 그는 수술 후 재활치료를 거듭한 끝에 휠체어 없이도 짧은 거리 정도는 무리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드레이크는 나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저 전광판은 뭐냐? 왜 우리를 잡는 것이지?”
그는 마치 내가 뭐든지 다 알고 있는 척척박사라도 되는 양 기대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하지만 나는 드레이크의 의문에 답해 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전광판에 미친 나와 드레이크.
……이건 마치 야구장에 온 듯한 광경 아니던가?
“미안해, 드레이크.”
“괜찮다. 친구끼리는 미안하다는 말 하는 것 아니다. …그런데 뭐가 미안한가?”
미안하다는 말에 이유도 묻지 않고 괜찮다는 말을 먼저 하는 착한 드레이크.
…하지만 미안한 건 미안한 일이다.
나는 재빨리 손을 썼다.
전광판에 투샷으로 크게 잡힌 고인물과 마동왕, 양 팬덤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
파앗!
나는 옆에 있던 드레이크의 목을 거세게 끌어당긴 뒤 재빨리 그에게 입을 맞췄다.
“……!?”
드레이크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진다.
나와 드레이크의 입술이 포개어지는 것이 대형 스크린에 크게 잡혔다.
(물론 가면이 막고 있어서 실제로 막 그런…그런 것은 없었지만)
동시에.
……!
양 팬덤의 모든 사람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제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 왜, 야구장에 가면 키스 타임이라는 것이 있지 아니한가?
일단 한 전광판에 투샷으로 잡힌 이상 무조건 키스를 해야 한다는 룰.
그것이 설령 동성끼리라도.
벽조목이라도 된 듯 굳어 버린 나와 드레이크.
그리고 그런 우리를 지켜보는 양 진영의 사이에 갑자기 훈훈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뭐야, 저 두 사람… 친해 보이네.”
“어… 단순히 친한 게 아닌 것 같지 않아?”
“바보야, 저건 키스타임이라서 한 거잖아.”
“으음, 저 두 분이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우리가 여기서 더 싸울 수는 없지 않겠어?”
마교도 덜렁교도 더 이상의 다툼은 모 야메룽다.
두 집단 사이에는 약간의 어색함과 함께 화해의 싹이 떡잎을 틔운다.
“…그러고 보니, 당신 아까 현피 뜨기 전에 스텝을 3.3.7 박자로 밟던데. 그거 마동왕 님의 스텝 아니야?”
“어엇? 맞아! 나는 고인물의 팬이긴 하지만 스텝에 한해서만은 마동왕의 장인정신을 인정하지. 그러는 너는 아까 돌진해 올 때 무빙 실력이 제법이던데, 그 중심이동은 고인물의 전매특허 아니던가?”
“맞아. 인정하기는 싫지만…사실 고인물의 중심이동만큼은 최고지. 거의 탈 아시아급이랄까?”
“분하지만 멋졌어. 배울 것은 배워야지. 당신 같은 사람을 팬으로 두고 있는 마동왕도 제법이야.”
“…당신 역시도 상당했어. 당신의 롤모델이 되는 고인물 역시도 다시 보게 됐는걸?”
천천히,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교와 덜렁교 사이에 서로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가득해진다.
그동안 퀴즈대회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팽팽하게 싸워 왔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다.
“너희는 정말 마동왕을 사랑하는구나.”
“너희가 고인물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대단해.”
“왠지…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고인물과 마동왕… 의외로 닮은 구석이 있으니까.”
두 팬덤은 그렇게 서로를 인정하고 또 이해했다.
이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싸움을 멈추는 광경.
그것은 키스타임이 불러온, 실로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 * *
며칠 뒤.
나는 마동왕 콘셉트로 옷을 입고 한 공원을 찾았다.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커다란 레인저로버 트럭의 조수석 문을 열자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오셨어요?”
유다희. 그녀는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차체가 워낙 높았기에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 겨우 올라올 수 있었다.
유다희는 큰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대뜸 한 마디를 던졌다.
“키스.”
“…….”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미묘한 기분이 든다.
세상에 드레이크와 키스를 할 날이 오다니.
“어쩔 수 없었잖아.”
“…꼭 그게 최선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을까?”
“흐으음~”
내 말을 들은 유다희는 고양이처럼 목을 길게 뺀 뒤 나를 쳐다본다.
이내, 그녀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죄송했어요. 마왕님 허락도 구하지 않고 현피를 뜨다니.”
“뭐, 내가 아챔 일정 짜느라 네 메일을 확인 못했던 잘못도 있지.”
나는 말을 마친 뒤 유다희의 얼굴을 슬쩍 돌아보았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 언제나 화장이 짙던 옛날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하기야, 내 기억 속에 있던 유다희의 마지막 모습은 서른이 넘었을 때이니.’
이 시절의 유다희는 화장 따위는 하지 않아도 무척이나 예쁘다.
물론 회귀 전의 유다희 역시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그때에 비해 좀 더 풋풋한 매력이 있다.
거의 10년은 더 어리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편, 유다희는 차 앞 유리를 바라보며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다.
나는 그런 유다희를 향해 슬쩍 말을 꺼냈다.
“…고인물, 이제 그만 봐주는 게 어때?”
마동왕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유다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네에? 갑자기 그건 왜요?”
“아니. 저번 일도 있고 해서.”
내가 지난번 현피 사건을 다시 언급하자 유다희는 멋쩍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맞아요. 기껏 봉사와 기부 등으로 만들어 놓은 팬클럽 이미지를 폭력적으로 변질시킬 뻔했으니까요. 제 잘못이 커요. 앞으로는 절대 팬클럽의 이미지를……”
“아니, 그런 것 말고. 개인적으로도 말야.”
“…….”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유다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턱을 쓰다듬었다.
“으음! 조금 갑작스럽네요.”
“…….”
“예전에 제가 마왕님께 살인청부를 했던 것 기억 하시나요?”
유다희의 질문에 나는 뜨끔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마동왕이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고인물에 대한 원한 때문이다.
유다희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변태 놈에게는 개인적인 원한이 커요. 그래서 없는 돈까지 닥닥 긁어모아 가면서 청부 의뢰를 했던 것이고요. 그게 게임플레이에 방해 안 받고 돈 벌기에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아서.”
하기야, 그녀는 게임 초반에 나에게 많이 당하긴 했다.
나는 슬쩍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으음. 그래도 요즘 하는 걸 보면 썩 나쁜 놈은 아니지 않을까?”
“아뇨. 개나쁜새끼예요.”
“그, 그래?”
“네에. 아무리 마왕님 부탁이라고 해도 절대 용서 못하죠! 본인이 직접 찾아와서 사과한다면 또 모를까. 제가 당한 게 얼만데!”
말을 마친 유다희는 손에 쥐고 있던 사과 하나를 우직 으깨 버린다.
역시 얼굴만 봐서는 짐작할 수 없는 불가해의 괴력…….
“그, 그렇구나. 아주 구제불능인 놈이네 그거.”
“암요.”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유다희, 그때 그녀는 문득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뭐, 마왕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앞으로는 묵은 감정 털어 내려고 노력해 볼게요.”
“오? 진짜?”
“네네.”
유다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묻은 사과즙을 물티슈로 닦으며 말했다.
“대신!”
“……?”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유다희는 나에게 서류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나는 서류봉투 안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침음성을 삼켰다.
유다희는 차 앞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믿을 만한 정보원을 통해서 확인한 정보에요. 아마 ‘닳고닳은 뉴비’ 구단이 아챔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을 경우, 차규엽이 준비한 악플부대의 융단폭격이 곧바로 이어질 것이라는 계획이죠.”
바스터즈 구단의 스폰서 차규엽, 그는 자신의 계획을 망쳐 버린 나와 내 구단을 아직도 증오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우리가 이번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내지 못한다면 가차 없이 여론조작을 통해 우리를 매장시킬 심산인 것 같았다.
이내, 유다희는 차량 앞유리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나를 간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제 부탁은 간단해요. 이번 아챔에서 꼭 우승해 주세요. 저는 그것밖에 바라는 게 없어요.”
유다희는 간절하면서도 미안한 표정이다. 대회 시작도 전에 나에게 이런 부담을 준다는 것에.
하지만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는 서류봉투를 품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것은 시기적절할 때에 좋은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차규엽에게 개망신을 줄 수 있는, 나아가 놈의 입지를 크게 위축되게 할 수 있는 폭탄.
한편, 유다희는 크게 안심한 기색이었다.
“다행이다. 저는 또 제가 주제넘게 부담을 드리는 게 아닌가 해서 고민했었어요. 오늘 그냥 자료만 넘겨드리고 갈까 했었는데.”
“아냐, 큰 도움이 되겠어. 설계에 꼭 필요했던 파츠 중 하나야.”
나는 씩 웃으며 유다희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뭐… 어차피 내 가면 때문에 미소는 전해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때, 나는 문득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아챔에서 우승하면 말야. 고인물 그 녀석도 용서하는 거야?”
“…예?”
내 질문을 들은 유다희가 고개를 갸웃한다.
한동안 골똘하게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뭐, 그렇죠? 좋은 감정을 갖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전처럼 이를 갈지는…….”
“오케이. 그거면 됐지 뭐.”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유다희는 여전히 차규엽의 ‘악플 계획’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아마 그 치졸한 자식은 닳고닳은 뉴비 대신 바스터즈를 국가대표로 내보내야 했다면서 여론전을 엄청 펼칠 거예요. 더러운 놈.”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내 관심 밖이다.
“상관없어.”
“……?”
“어차피 우리가 우승하면 다 의미 없는 뻘짓이 될 테니까.”
바스터즈, 아니 레드문에서 준비하고 있을 이 정도 수준의 흑색선전이야 이미 예전에 간파했던 바이다.
아마도 차규엽은 곧 역대급 분노를 경험하게 되겠지.
자신의 모든 물 밑 작업들이 죄다 한 줌 물거품이 되어 버릴 테니까.
나는 손을 뻗어 유다희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고인물 때와 달리, 마동왕을 대하는 유다희는 순한 고양이처럼 얌전하기 그지없다.
나는 유다희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사실 나도 미리 준비해 둔 히든 카드가 있거든.”
나도 오래전부터 따로 준비해 왔던 ‘작업’이 있단 말이다.
유다희에게는 말해 줄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계획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떠올렸다.
그것은 내가 얼마 전에 받은 하나의 메일로부터 시작하는 계획이었다.
-----Original Message-----
From: “바스터즈”
To: <[email protected]>;
Cc:
Sent: 2023-12-01 (월) 11:18:09
Subject: 안녕하세요, 스트리머 ‘고인물’ 님. 귀하의 플레이는 늘 감명 깊게 시청하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희 ‘바스터즈’에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고인물 님을 모셔가고자……저희 바스터즈는 국내 우량 기업인 ‘레드문’의 전폭적인 스폰을 받고 있는 탄탄한 프로팀으로……내년 목표는 국내 1위 프로팀 타이틀의 탈환이며……최종적으로는 마동왕 선수를 잡아내어……고인물 님이 국내 NO.1으로서 군림하실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서포트를……꼭 회신 주시기를 간절히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