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453화 (453/1,000)
  • 454화 키스 타임 (3)

    연말의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

    오늘 이곳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아무런 공식 경기도 벌어지지 않는 마당에 이천 명이 넘는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든 것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놀랍게도, 오늘 스타디움을 전세 낸 이들은 협회나 구단 측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이 대규모로 돈을 모아 거대한 홀을 대관하여 행사를 벌인다.

    그 행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마교 VS 덜렁교

    시대가 배출한 두 명의 걸출한 랭커!

    각기 마동왕과 고인물이라는 탑스타를 추종하는 열혈 팬클럽.

    오늘 모여든 인원만 각각 1천에 달하는 대규모의 거대 팬덤이 오늘 이 자리에서 자웅을 겨룬다.

    일명 ‘현피’를 뜨는 것이다.

    자존심 강한 두 천재 집단의 집단 승부가 펼쳐질 전장.

    마교 측: [이번에야말로 고인물VS마동왕 논쟁을 끝낼 차례.]

    덜렁교 측: [어차피 이번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직관 때 1열 예매 전쟁을 치러야 했을 터.]

    마교 측은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의 주인공이 될 마동왕을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응원하기 위해.

    덜렁교 측은 고인물과 함께하는 S급 관람석에서의 쾌적한 관람 및 단합대회를 위해.

    양 랭커들의 공식 팬클럽들은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이 전장에 입성했다.

    누가 진정 한국 게임판의 지존인지 가리는 패싸움.

    이윽고, 스타디움의 북문으로 온몸을 붉은 장포로 휘감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교. 일명 마동왕을 사랑하는 사교모임.

    마교의 친위대장 겸, 교주 겸, 기타등등 수뇌의 자리에 올라 있는 존재가 홀 중앙의 가장 높은 선단에 섰다.

    유다희.

    그녀가 기세등등한 태도로 온 천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다희의 미모는 오늘따라 더욱 아찔하다.

    으레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면 얼굴이 못나 보이고 멀리서 보면 비율이 못나 보이는데 유다희는 가까이서나 멀리서나 외모에 굴욕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반달같이 짙은 눈썹, 크고 청초한 눈망울, 눈이 쌓일 정도로 긴 속눈썹, 살짝 잡힌 애교살,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시선을 확 잡아끄는 상체의 볼륨감과 늘씬하게 쭉 뻗은 하체의 비율까지.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까지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이기적인 자태.

    그런 유다희를 중심으로 마교의 친위대들이 넓게 포진한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중 대부분이 여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늘 그 변태들이랑 끝장을 보죠!”

    “아챔 리그에서 마동왕 님 경기 직관하러 가려면 꼭 이겨야 해!”

    “1열 예매 전쟁 골치 아팠는데 오히려 잘 됐어요!”

    마교원들은 자기들끼리 기합을 넣으며 전방을 노려본다.

    이윽고.

    남문에서 상대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신을 아무것으로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알몸의 남자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안 입은 것이 아니라 전신에 쫙 달라붙는 살색 타이즈를 입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복장이다.

    하지만 조금만 떨어져서 봐도 사실상 전라를 노출한 알몸의 변태 군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덜렁교. 일명 고인물의 덜렁거림(?)을 사랑하는 사교모임.

    이윽고, 덜렁교의 최고자문위원 자리에 올라 있는 존재가 홀 중앙의 가장 높은 선단에 섰다.

    임요셉.

    한때 한국 통합 랭킹 1위였다가 최근 코치로 전향한 남자가 위풍당당한 기세로 서 있었다.

    임요셉의 외모 역시도 오늘따라 더욱 아찔하다.

    잘 단련된 근육의 데피니션들이 그대로 드러나 보일 정도로 쫙 달라붙은 살색 타이즈, 그의 8등신 몸매와 조각 같은 근섬유들이 약동하는 것이 선명하다.

    그 뒤에 있는 남자들 역시도 모두 비슷하다.

    덩치가 큰 이도 있었고 작은 이도 있었고 마른 이, 뚱뚱한 이, 키 큰 이, 키 작은 이,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이것 하나는 공통적이다.

    알몸.

    그들은 살색의 파도를 이루어 눈앞에 있는 살기등등한 여자들의 기운에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은 채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상대가 여자들이라고 해서 겁먹을 것 없다!”

    “고인물 님과 1열에 나란히 앉아 한 마음 한 뜻으로 응원할 수 있는 기회! 플랜카드 흔들려면 오늘 꼭 이겨야 혀!”

    “현피 경력만 32년째야! 국군 투스타의 위엄을 보여 주마!”

    오늘 마교와 덜렁교는 돈을 반반씩 내서 이곳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을 빌렸다.

    그들은 현피를 뜨기를 원했지만, 사실 마동왕과 고인물이라는 두 대상의 위명에 흠집을 낼 수는 없는 일.

    따라서 오늘 벌어질 싸움의 종목은 바로 ‘퀴즈대회’로 변화했다.

    유다희와 임요셉은 정상에 서서 서로를 향해 눈빛을 강렬하게 쏘아 보냈다.

    “서로가 서로의 우상에 대해 공부해 와서 문제를 내는 거였지?”

    “그래. 자기 최애선수의 정보를 상대방이 더욱 빠삭하게 알고 있다면 그것만 한 굴욕이 없을 테니까.”

    그렇다.

    마동왕의 팬클럽인 마교는 고인물에 대해 공부해서 문제를 준비해 와 덜렁교에게 출제한다.

    고인물의 팬클럽인 덜렁교는 마동왕에 대해 공부해서 문제를 준비해 와 마교에게 출제한다.

    만약 덜렁교가 고인물에 대한 문제를 틀린다면 그것은 굴욕이다.

    마찬가지로 마교가 마동왕에 대한 문제를 틀린다면 그것 역시도 굴욕일 것이다.

    유다희는 임요셉을 향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오늘을 위해 고인물에 대해 빠삭하게 연구했다. 너희들은 아챔 직관에서 1열 절대 못 앉아.”

    그러자 임요셉은 코웃음을 치며 유다희의 말을 받았다.

    “우리 역시도 마동왕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했다. 이젠 우리가 너네보다 마동왕에 대해 잘 알걸?”

    유다희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한때 고인물과 죽자사자 싸워 봤던 몸이 아니던가?

    놈의 교활한 심성과 비열한 플레이에는 이미 충분히 적응되어 있다.

    한편 임요셉 또한 자신이 있었다.

    한때 마동왕과 같은 구단에 몸담고 있지 않았던가?

    그의 화려하고 묵직한 플레이는 현역 선수 시절에도 수없이 보며 분석했던 바 있었다.

    ‘…제대로 붙어 보자!’

    유다희와 임요셉은 서로를 향해 이를 갈았다.

    이내, 행사의 순서가 안내되었다.

    전광판에는 제비에 따라 공수가 정해진 뒤 마동왕과 고인물에 대한 퀴즈가 번갈아서 나오게 되어있다.

    퀴즈 시작 전, 마교와 덜렁교는 서로에게 줄 퀴즈 우승 굿즈를 먼저 소개했다.

    유다희가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약 너희들이 이긴다면 우리는 상품으로 이것을 주마.”

    이내 마교의 친위대들이 몇 개의 굿즈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껴안고 자는 커다란 베개였다.

    일명 ‘다키마쿠라’라고 불리는 캐릭터 모양이 그려져 있는 베개로 껴안고 자는 용도로 쓰인다.

    물론 이 커다란 베개에는 마동왕의 등신대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어때? 우리는 이런 굿즈도 만들 정도라고.”

    유다희는 덜렁교 교인들을 내려다보며 뽐내듯 말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임요셉이 피식 웃었다.

    “고작 그거냐?”

    말을 마친 임요셉은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뒤에 일렬로 서 있던 덜렁교의 친위대들이 일제히 바지를 확 내려 버렸다.

    그러자 살색 타이즈 안에 보이는 살색의 팬티, 그 팬티의 전면에는 고인물이 윙크를 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사진이 크게 프린트되어 있다.

    “우리는 이런 굿즈를 준비했지. 너희들이 퀴즈에서 우승한다면 이것들을 주겠다.”

    그러자 유다희의 표정이 확 썩는다.

    “…그딴 더러운 거 필요 없거든?”

    “사실 우리들도 너희들의 굿즈 따위는 필요 없어.”

    ‘서로 쓸모없는 선물 주기’같은 이 행사는 사전 취지와는 달리 서로간의 반목만을 심화시킨 채 서둘러 끝을 맺었다.

    한편, 마교와 덜렁교 멤버들은 뒤돌아서 서로 수근거린다.

    “어떻게 이 베개를 탐내지 않아 할 수가 있지? 당최 이해가 안 돼.”

    “세상에, 이 팬티를 보고서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안 생기는 사람들이 있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서로 이마를 탁 치며 놀라워하는 모습, 자기들이 준비한 굿즈의 멋짐을 모르는 상대방들이 불쌍하고 또 한심하다는 듯하다.

    이윽고.

    드디어 본격적인 배틀이 시작되었다.

    유다희는 눈앞에 있는 살색 타이즈 남들을 쭉 훑어보았다.

    딱히 남자만 받는다는 규정도 없을 텐데 기가 막히게 남자들만 모였다.

    뭐, 마교 역시도 여자만 받는다는 규정이 없지만 여자 비율이 높은 것과 비슷한 결과일까?

    ‘그래도 마교는 여자와 남자 비율이 8:2는 되니까 뭐.’

    유다희는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제비뽑기에서 이긴 그녀가 문제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나오는 문제들은 마교 구성원들의 집단지성이 한데 모인 결과이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고인물이 먹었던 빵의 개수를 기억하고 있……?”

    유다희가 막 문제를 읽기도 전에.

    삐익-

    부저 누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임요셉, 그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운 채 말했다.

    “고인물이 방송에서 먹었던 빵의 개수를 묻는 것이라면 문제를 더 들을 것도 없다. 답은 총 32개. 단팥빵 6개, 고로케 4개, 소시지 빵 3개, 옥수수 카스테라 2개… 그리고 언젠가 지하철에서 따듯한 델리만쥬를 사서 한 개를 먹고는 냄새만 맛있지 맛은 없다며 나머지를 남겨 현실에서 먹은 빵의 개수는 총 16개로 카운팅된다. 나머지 16개는 게임 속에서 먹은 것으로 초보자 마을 유토러스 여인숙에서 조식으로 제공하는 흑빵 10개를 10회에 걸쳐, 얼어붙은 마을에서 구했던 딱딱한 바게뜨 4개를 한 번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약상점에서 용기의 브런치 세트로 파는 용기의 모카번과 용기의 물약 세트 2개를 2회에 걸쳐…….”

    하지만.

    유다희는 손바닥을 들어 임요셉의 말을 막았다.

    “호오,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하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지?”

    그러자 전광판의 문제가 바뀌었다.

    Q: <고인물이 지금껏 방송에서 먹었던 빵의 개수는……총 32개이다.>

    놀랍게도, 마교원들 역시도 이것을 자세히 분석해 왔던 것이다.

    한 방 먹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임요셉, 유다희는 그런 그를 비웃는 듯 다음 문제를 이어 나갔다.

    Q: <고인물이 지금껏 방송에서 먹었던 빵의 개수는……총 32개이다……그렇다면 이 경우 고인물의 얼굴 중 T존의 피부는 지성일까? 건성일까?>

    게임과는 상관도 없는 문제, 심지어 앞서 나왔던 문제와도 아예 관련이 없는 페이크 문제이다.

    마교의 친위대 1열 중 여고생 군단 측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 난이도가 쉬운 빵 문제로 적들을 낚은 뒤 본격적으로 난이도 있는 문제를 출제한 것이다.

    말하자면 초반 견제구를 커브로 던져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큭큭큭큭. 뭐냐. 이것도 신경전이라고 걸어오는 거냐?”

    얼굴에 음산한 음영을 드리운 알몸 사내들 또한 만만치 않다.

    삑-

    개중 한 명이 피식 웃으며 눈앞의 부저를 눌렀다.

    그리고는 마교 인원들을 쭉 흩어보며 입을 열었다.

    “답은 ‘지성’이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고인물의 피부는 약건성인 것으로 유명하지. 방송 중 가끔 얼굴이 건조하거나 당기는 듯 인상을 쓸 때가 잦고 또 가끔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로션의 타입으로도 손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이마와 코를 지나는 T존은 방송 중 가끔 유분으로 귀엽게 반들거릴 때가 있어. 이것은 스포츠 사진을 주로 찍는 5800만 이상의 초고화소 카메라로 몇 번이나 찍어서 확인한 사실이야. 아무튼 이 때문에 고인물은 로션을 발라도 볼이나 턱 등 U존에만 바르지 이 T존에는 잘 바르지 않는다. 가끔 피지 분비로 인해 뾰루지 등이 나는 곳도 주로 이 부분이고 이곳에 사용하는 지성 T존 전용 화장품이 3개월 하고도 3일 전 유튜뷰 영상 23분 7초쯤에 한번 스치듯 잡힌 적도 있지. 또한 이것은 우리의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종종 같이 합방을 하곤 하는 뷰티 유튜버 BJ부반장 씨의 증언으로도 알 수 있었다. 조공으로 화장품을 보내기 전에 자문위원으로 초대해 자문을 구해 보았었거든. 그것도 자그마치 일곱 번이나 말이야.”

    고이다 못해 썩은 물의 대답.

    …….

    홀 안에는 잠시 정적이 깃들었다.

    이내.

    “쯧!”

    유다희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정면의 임요셉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뭐, 나름 준비를 한 모양이군?”

    “후후후. 고인물을 빠는 고인물을 얕보면 곤란하지.”

    마교와 덜렁교 사이에 점점 더 깊은 골이 패인다.

    그 사이로 전보다 더욱 더 살벌해진 전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