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기억의 습작 (1)
이젠 버틸 수 없다고.
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는 걸.
너의 슬픈 눈빛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걸.
나에게 말해 봐.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김동률 『기억의 습작』 中-
* * *
드머프 엘리제 벨럿.
그녀는 지금 황금의 절벽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벨럿의 목을 쥐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마몬이었다.
마몬은 마치 벌레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벨럿의 목을 조른다.
[나는 관대하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라고 하지만, 도구를 고치는 입장인데 그럴 수야 있나. 허풍선이 아르파공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네게도 기회를 주마.]
벨럿은 희미해지는 시야로 마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순간, 마몬의 귓가에 그동안 잊고 살았던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남에게 우러름을 받을 상이로군.’
거칠고 쉰 노인의 목소리.
누구에게 들었던 말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 마몬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벨럿을 절벽가 맨땅에 팽개쳤다.
[커헉!?]
벨럿은 수은으로 된 피를 토해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텅! …텅!
그런 벨럿의 좌우로 망치 하나씩이 던져진다.
오른쪽에 있는 망치는 너덜너덜한 C급 아이템.
벨럿이 들고 다니던 망치였다.
-<기억의 습작> / 한손무기 / C+
초보 땜장이 ‘드머프 마몬 클레망소’가 처음으로 만들어 낸 도구.
서툴고 조악하지만 바른 정신과 큰 꿈이 깃들어 있다.
-공격력 +120
-SET (특수)
이 아이템을 본 마몬은 조금 놀랐지만 이내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띄운다.
[감성이나 팔아먹으려고 이 먼 거리를 온 것은 아닐테지. 만약 그렇다면 잡상인은 사절이다. 네 의지가 ‘진짜’라는 것을 내게 증명해 보여라.]
말을 마친 마몬은 왼편에 자기가 쓰던 거대한 망치를 던져 놓았다.
-<악마성좌 마몬의 대지진망치> / 한손무기 / S+
힘, 그 자체.
산을 두들겨 평지로 만들고, 평지를 두들겨 무저갱으로 만들 수 있는.
-공격력 +20,000
-특성 ‘대지진’ 사용 가능 (특수)
현실의 핵폭탄을 이에 견줄까?
깡 공격력만 해도 2만에 이르는 괴물 같은 스펙.
어지간한 이는 다루기는커녕 들 수조차 없는 무시무시한 아이템이다.
오른편에 있는 망치는 싸구려.
왼편에 있는 망치는 명품.
이별의 밤과 완벽하게 똑같은 상황.
마몬은 두 눈을 빛냈다.
[나를 내려칠 기회를 줄 테니 둘 중 하나를 집어 들어라. 그리고 사제로서 증명해 보아라. 네가 옳고 내가 그르다는 것을.]
마몬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벨럿을 내려다보며 비죽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어디 한번 보자. 단순히 물건을 넘어 그것의 영향을 받을 사람을 볼 줄 아는지.]
마몬의 목소리 끝은 이미 제련이 한계까지 끝난 쇠처럼 단단하고 또 견고한 것이었다.
“…벨럿!”
나는 벨럿을 향해 뛰어가며 외쳤다.
데스나이트의 ‘선택’ 특성은 벨럿의 왼쪽과 오른쪽에 놓인 망치 중 어느 것을 집어야 가장 효율이 좋은지 바로 답을 내려준다.
“벨럿! 왼쪽이야! 마몬의 대지진망치를 잡아! 그게 공격력이 훨씬 더 높아!”
왼쪽에 있는 대망치는 마몬이 주로 쓰는 무기.
제아무리 마몬이라도 자신의 애병에 직격탄을 맞는다면 데미지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승님의 뜻을 받든다! 너를 단죄하는 것은 이것이야!]
말을 마친 벨럿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오른쪽으로 달려 나갔다.
…터억!
기억의 습작. 마몬이 맨 처음으로 만들어 낸 망치를 손에 든 벨럿은 그대로 마몬을 향해 곧장 달려가기 시작했다.
[……!]
벨럿의 모습을 비웃고 있던 마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쾅!
마몬이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벨럿의 망치가 마몬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하지만 벨럿의 망치는 C+등급의 아이템, 고정 S+등급 몬스터인 마몬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파사사삭…
벨럿의 망치는 그 자리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굳게 쥐인 손아귀 안에 자루만을 남긴 채.
[…….]
마몬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벨럿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의 표정은 극도의 불쾌감으로 일그러진다.
[…네 스승조차 결국 마지막에는 도구의 성능 그 자체에만 주목했거늘. 너는 허풍선이보다 더 질이 나쁜 위선자로다.]
가루가 된 망치, ‘기억의 습작’은 검은 분진이 되어 마몬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코뮌 강의 사철(沙鐵).
아르파공이 늘 재료를 구하러 가곤 했던 강둑의 흙.
마몬이 태어났던 마을을 휘감아 흐르던 고향의 강줄기에서 구할 수 있는 흙이다.
…흥!
마몬은 콧바람 한 번으로 검은 분진을 모조리 몰아내 버렸다.
이윽고.
쿠구구구구구…
마몬이 망치를 들었다.
집채만한 망치가 벨럿의 머리 위로 천천히 올라간다.
[가장 비싸고 성능 좋은 망치다. 세상물정 모르는 사제를 가엾게 여겨 한 방에 보내 주마.]
마몬의 힘. 힘의 마몬.
전 세계의 모든 존재들을 1:1로 비교했을 때 가장 강한 근력 스탯을 가진 몬스터가 온 힘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대분화(大噴火)’
화산이 폭발하는 힘과도 맞먹는다는 마몬의 오른손이 지금 거대한 망치를 들어 벨럿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익!]
벨럿은 이를 악물고 마몬의 힘에 저항했다.
망치에 맞설 수단으로 그녀가 선택한 아이템은 바로 방패였다.
철판만 대충 덧대고 기운 티가 나는 철쪼가리.
대장간 귀퉁이에 굴러다니는 짜투리 철을 이용해 만든 서툴고 조악하기 그지없는 방패.
그것은 벨럿이 태어나 처음으로 만든 도구이다.
마몬은 그 방패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예전 이별의 밤 당시 자신을 막아섰던 저 조악한 방패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너는 전혀 성장하지 않았구나. 그따위 쓰레기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말을 마친 마몬은 오른손을 최고로 높이 들어올렸다.
이제 곧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운석처럼 떨어져 내릴 저 재앙과도 같은 망치!
그리고 그 망치의 앞에 툭 떨어져 내리는 이가 있었다.
“…어이, 벨럿. 괜찮아?”
바로 나다.
나는 서둘러 달려와 벨럿의 옆에 섰다.
벨럿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서 있는 것도 힘들 지경, 혼자서는 마몬의 공격을 이겨 내기 힘들 것이다.
“사매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막장이구만.”
내 몸에서 시커멓게 뿜어져 나오는 죽음룡의 기운이 마몬의 광기와 사납게 대립한다.
…철컥! …철커덕!
나는 오즈의 비늘을 빳빳하게 곤두세운 채 마몬의 일격에 대비했다.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친 마몬은 여전히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너는 오즈의 후예가 아니로군. 용 사냥꾼인가?]
마몬은 나에게서 굉장히 불쾌한 어떤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히 용을 싫어하는 악마의 성향 때문만은 아니다.
뭘까? 과거의 어떤 편린이 그의 마음을 쿡쿡 찌르고 있는 것일까?
[…‘용 사냥꾼’이라. 분명 낯익고도 불쾌한 단어로고.]
약간 고민하던 마몬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시간은 곧 금이지. 더 이상 너희들에게 쓸 시간은 없다. 죽어라.]
동시에.
…후우욱!
마몬의 망치가 떨어져 내렸다.
천산거력(千山巨力)!
온 세상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용의 일격!
콰-콰콰콰콰쾅!
마몬의 망치는 나와 벨럿에게 떨어져 내렸고 반경 수백 미터를 거의 폭파시키듯 뒤집어 놓았다.
대지진은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데미지가 딜 미터기를 뚫고 하늘을 찌른다.
주변의 황금 산맥들이 풀썩풀썩 허물어져 내렸고 근처에 있던 보석의 산들은 모두 자색, 녹색 분진으로 변해 훅 쓸려가 버렸다.
단 한 방.
그것만으로 지형이 완전히 뒤틀렸다.
휘오오오오오…
자욱한 포연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 무엇도 남아나지 않을 충격파.
마몬의 망치가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한번 이동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
……나만 빼고!
[!?]
이윽고 연기가 걷힌 뒤, 마몬은 나를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는 벨럿을 뒤에 보호하는 동시에 방패를 들어 마몬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낸 것이다!
-<기억의 습작> / 방어구 / C+
초보 땜장이 ‘드머프 벨럿 엘리제’가 처음으로 만들어 낸 도구.
서툴고 조악하지만 바른 정신과 큰 꿈이 깃들어 있다.
-방어력 +120
-SET (특수)
스승을 지키고자 했던 벨럿의 절박한 마음이 담긴 방패.
거기에 부서져 자루만 남은 마몬의 망치가 방패의 뒷면을 단단하게 덧대고 있다.
둘 다 ‘기억의 습작’이라는 이름, 생애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아이템들.
한편 마몬은 실로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이다.
[…뭐냐? 무슨 속임수를 쓴 것이냐? 어떻게 그따위 방패로 내 망치를 막아냈지?]
천하의 서브스트림, 이 세계를 구성하고 다스리는 17개의 AI중 하나.
하지만 그런 존재조차도 내가 벌인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다.
“도구는 쓰는 사람 나름이지.”
일침(一針).
내 말을 들은 마몬은 미약하게 떨기 시작했다.
[궤변이다! 도구는 내가 더 잘 알아! 그따위 조악한 방패가 어찌 내 힘을 견뎌 낸단 말인가!]
“그야 쓰기 나름이라니까.”
시종일관 태연한 내 말에 마몬의 몸은 숫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오래 전 스승에게 들었던 멘트가 생각나는 모양이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단순히 물건을 넘어 그것의 영향을 받을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마몬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내 손에 들린 방패를 바라본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 센 괴물의 공격을 받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흠집 하나 없는 방패.
[…그럴 리가 없다!]
마몬은 다시 한번 더 망치를 휘둘렀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쾅!
나는 또다시 한번 마몬의 망치질을 방패로 막아 내 보인다.
“그럴 리가 있지.”
또다시 대지진!
주변의 풍경이 크게 뒤틀리는 충격파 속에서도 나는 상처 하나 없이 벨럿을 지켜 내고 있었다.
바로 벨럿이 처음으로 만들어 낸 방패로!
[……???]
마몬의 머리 위에는 무수히 많은 물음표들이 뜨고 있다.
하지만 놈의 궁금증을 풀어 줄 의무는 내게 없다.
나는 그저 두 번의 망치질로 인한 반사 데미지를 적의 몸통을 향해 쏘아 보낼 뿐!
콰-기기기기긱!
죽음룡 오즈의 시커먼 기운이 내 양손을 향해 폭사되었다.
나는 양손에 깎단 쌍수단도를 쥐고 그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마몬의 복부로 꽂아 넣었다.
[…끄헉!?]
마몬의 허리가 처음으로 ㄱ자로 굽혀졌다.
마몬의 망치가 가져다 준 거대한 충격을 두 번이나 중첩시킨 데다가 깎단의 도트데미지까지 실어 놓은 공격!
나는 흔들리는 마몬의 동공을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바로 잡아 볼까?”
두 번의 백도어를 통해 바로 만난 보스 몬스터.
그리고 스승과 사제를 버리고 비뚤어진 제자.
그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시간이다.